조천 할아버지와 할머니
2010/11/14 조천 할아버지와 할머니
주말에는 날씨가 나쁘지 않으면 주변을 산책한다.
내가 사는 곳은 공원에 둘러싸여 있을 정도로 공원이 많다. 시간이 있을 때 매일 산책 해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공원이 몇 군데나 있다. 단풍이 한창이라 산책이 즐겁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한 시간 정도는 찻길을 건너지 않고 걸을 수 있다. 해가 질 무렵이 산책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맑은 날에는 멀리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오늘은 흐려서 보이지 않았다.
오사카 이야기를 마저 하자.
연락이 가능한 곳은 전화로 연락해서 찾아갔으나, 연락이 안된 곳은 주소를 가지고 직접 찾아가보기로 했다.
금요일 아침에 간 것은 오오이케바시에 사는 조천 할아버지 할머니 댁이다.
두 분 다 90세가 넘었다. 건강히 잘 계신다. 그 전에는 이층에 살았는데 지금은 이층을 비우고 아랫층에 사신다. 식사는 가까운데 사는 딸이 와서 해준단다. 할아버지는 지금 그 나이에도 자신이 쇠퇴해 가는 기억력과 씨름하며 한문공부를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오사카에 처음 온 건 15살때, 만주사변이 나던 해였다. 제주도에서 7살때부터 한문서당을 다녔고 신식 소학교도 나왔다. 신식 소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오사카로 일하러 와서 단추공장에 다녔다. 이 시절에는 할아버지처럼 제주도에서 초등교육을 마치면 오사카나 동경으로 일하러, 공부하러 오는게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정해진 코스였다.
해마다 오사카에 와서 일하고 제주도에 돌아가기를 몇년하고 19살때 옆 마을 처녀와 결혼한다. 할머니는 결혼하기 전 처녀 때부터 언니나 친척과 같이 육지로 물질을 다녔다. 할아버지가 21살때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해에 큰 아들이 태어난다.
이 아들은 대를 이어야 할 장손이라 태평양전쟁이 심해졌을 때, 혼자 제주도 고향에 남겨둔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있었고, 조선전쟁도 끝나 오도 가도 못하게 됐을 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사카로 밀항한다. 제주도사람들에게는 전쟁때 가족이 분산되어 있다가 나중에 밀항 등으로 재결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는 다시 북송사업으로 가족이 북한으로 건너가 이산된 경우도 참 많다. 이산 가족은 일본에도 있다.
할머니는 원산까지 물질을 간 적도 있다. 할아버지도 청진으로 일본 배 타러 가서, 오사카로 와 공장에 다녔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해는 할머니가 큰 아들을 데리고 동경까지 물질하러 왔었다. 전쟁이 심해졌을 때는 할아버지가 징용으로 고베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일했다. 할아버지 동생은 군인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동생은 전쟁이 끝나서 오사카를 경유해 제주도로 간다. 4.3 사건 때 피난해서 밀항으로 와서 고베에 살았다.
할아버지가 고향에 다니기 시작한 건, 1965년부터이다. 아직 합법적으로 양국 간을 오가기가 어려웠던 시절, 오사카에 있는 마을 친목회에서 돈을 모아 고향마을을 지원할 때였다. 할아버지는 먹고 사는 일도 집어던지고 고향마을 지원하는 활동을 열심히 해서 할머니가 힘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때라고 했다. 기부를 모으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리고 고향마을 발전을 위해 힘썼다. 고향마을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 힘든 줄 모르고 신났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친척일을 보러 고향에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친척이나 마을에서 최고령자가 되어 있단다.
찾아간 나를 보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한다. 찾아줘서 영광이라고 저 세상 갈 때 선물로 가져가겠단다. 어렸을 때 공부했던 한문책을 보여준다. 할아버지가 서당을 다녔던 시대는 정말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몇 개나 거치고 국경이 바뀌고 없었던 나라가 생기는 시간을 살아오셨다.
그야말로 옛날 어른들이다.
아직도 옛날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들이 오사카에 살고 있다.
큰 딸이 손자가 태어나 병원에 가서 나중에 온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어, 나한테 점심 대접을 못한다고 속상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