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란한 크리스마스이브
2011/12/24 심란한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동경은 맑지만 기온이 아주 낮았다.
동경에서 최고 기온이 10도 이하이면 한겨울 날씨이다. 요새 최고 기온이 10도 이하인 날이 계속된다. 여기는 집이 추워서 기온보다 훨씬 더 춥게 느껴진다.
낮에 논문에 관해 의견교환을 위한 미팅이 있었다. 집을 나가려고 하는데 네팔 아이가 12시 반에 대학에 도착한다는 문자가 왔다. 미팅도 12시부터 인데, 일방적이다. 속이 뒤집힌다. 어저께도 그저께도 약속을 하고 안 와서,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진학 문제는 알아서 결정을 해라. 아니에요, 제가 선생님 의견을 들어야 할 게 있어요. 그 아이가 좋아할 것 같은 예쁜 여자아이들 사진이 모아진 달력을 준비해 뒀는 데, 그것도 잊고, 주려고 사뒀던 것도 귀찮아졌다.
미팅 시간이 돼서, 논문을 놓고 후배와 말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네팔 아이가 나타났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피곤에 절어있다. 그리고 며칠간 씻지 않은 모습이다. 옷도 추운 날에 따뜻하게 입지 않았다. 속이 상한다. 작년에 따뜻한 오버도 사줬잖아, 왜 안 입어, 말도 못 하고 화가 난다.
지금 이 선생님과 중요한 미팅을 하고 있으니까, 혼자서 점심 먹고 시간을 보내라, 끝나면 문자를 보내마, 몇 시까지 시간이 있는데? 점심 먹을 돈을 줬다.
미팅이 끝난 건 2시 반이었다. 네팔 아이에게 전화를 해도 안 받는다. 열 번 정도 전화를 했다. 3시까지 밖에 시간이 없다던데 어떻게 된건가?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돼? 5시까지 록뽕기요, 신주쿠에서 가까워요. 그럼 시간이 조금은 있겠구나, 내가 다마센터에 가니까 같이 갔다가 거기서 신주쿠로 가거라.
다마센타에 가서 주문한 빵을 받았다. 그 가게에서 양말을 골라 잡는다. 돈은 당연히 내가 내주는 것처럼, 자기가 필요한 걸 고른다. 이거 사도 되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전에 아직 일본에 온 지 얼마 안돼 돈이 없을 때 내가 사줘 버릇을 해서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충분히 돈을 벌고 있다. 사 주길 바라면 물어봐야 한다고 몇 번이나 시켰는데, 기억을 하지 않는다. 나간 김에 마트에 들러서 시장을 봤다. 이 아이는 우리 집에 들렀다 가는 줄 아는 모양이다. 나는 그냥 역 근처 쇼핑센터에서 적당히 지내다 보냈다. 과자를 사서 가방에 넣어줬다.
용건은 월요일까지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대학에 합격을 했는데 월요일까지 학비를 내야 한다고, 네팔에서 돈을 보내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동안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20만 엔 부족한데, 10만 엔은 미국에 있는 친구가 보내줄 거라고, 송금료가 얼만데, 일본에는 친구가 없니? 너 술 마시고 같이 노는 친구들 많잖아, 돈 빌려줄 친구는 없어요. 10만 엔을 일주일만 빌려주세요. 선생님 돈 안 빌려주면 저 대학에 못 가요. 아니 그동안 인간관계를 어떻게 했길래, 그 정도도 해결을 못하니? 말은 못 하고 속만 뒤집힌다.
나는 대학에 가서 사정을 말해서 연장 받으라고, 일본어학교 선생에게 대학에 전화 하라고 어드바이스를 했다. 일본어학교 선생이 못한다고 했단다. 그러면 아르바이트하는 데서 가불 해, 말을 들을 아이가 아니다. 그동안 일본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내가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해결해 주면 자신이 개척하는 걸 못한다. 대학 진학에 관해서도 처음부터 어드바이스를 해왔다. 기회도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대학에 가야지, 장학금을 받을 확률도 높고, 일본에서 취직도 할 수 있다고. 처음부터 나를 우습게 알고 말을 안 듣는다.
나는 30년 가까이 유학생을 관찰해 왔다.
거기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꼭 실력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중에는, 어쩌다가 힘든 길로만 가는 패턴이 있다. 네팔 아이는 가장 힘든 코스를 택했다. 변명을 하면 그 아이는 나름 노력 했다. 일본어학교가 2년 다녀도 일본어 능력시험 2급까지 밖에 못 본단다. 자기네 학교에서 두 명 밖에 대학에 못 갔다고, 그 학교에서는 우수한 학생인 것이다. 일본어학교도 오래 다니게 만들어 놨다. 사실 나도 손발을 다 들었다. 말을 안 들어서다. 이번에 합격한 대학은 이름도 모르는 대학이다. 좀 알아봤더니 정원의 3배 이상 합격자를 낸다고 한다. 즉, 그 대학에는 합격해도 안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대학 중에 이런 대학은 없다.
잘 나가는 아이는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물어본다. 거기에 어드바이스를 하면 따른다. 좋은 결과가 나온다. 그 코스로 가면 잘 풀린다. 왜냐하면 서로가 신뢰를 바탕으로 지혜를 합하니까, 웬만한 건 풀어나간다. 이 아이들은 잘 커가고 있고, 그야말로 성공하고 있다. 이 길로 가면 문제가 없다. 이 아이들에게는 가끔, 예쁘다, 잘한다, 사랑해라고 칭찬하면 감격한다. 조금만 신경 쓰고 마음을 쓰면 잘 나가준다, 쉽다.
문제는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이다. 말을 안듣는 걸 모른다. 그런데 한편은 이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한 것 같다. 나보다 세상을 더 잘 알고 있다. 보통 내 머리 위에서 논다. 나는 복잡한 걸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키울 수 있었던 아이는 혼자 똑똑한 아이가 아니라, 내 말을 믿고 따라왔던 아이들이다.
네팔 아이는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대학에 돈 갖다 바칠 것이다. 대학에 가면 졸려서 잠을 자겠지, 친구를 사귈 시간도 대학생답게 공부나 활동을 할 시간도 없이 일을 하겠지. 자기 힘으로 일본에서 사립대학을 졸업하는 것 그 자체가 힘든 일이고, 장한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은 대학에 따라 단순히 ‘노예’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아이가 나쁘다기보다, 악랄한 '착취 시스템'이 나쁘다. 근데, 왜 거기에 걸리냐고.
내가 그 아이에게 가르친 것은 ‘자기 시간 쓰면서 공부를 하는데, 왜 돈을 갖다 바쳐, 돈을 받아도 시원지 않은데’ 라는
것이었다. ‘대학이나 세상에서도 돈을 갖다 바치는 사람보다 돈을 받아가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더라’고 했다.
정말로 화가 난다, ‘노예’ 생활을 보고 싶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