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겐헌터

오늘의 수확

huiya(kohui) 2019. 12. 27. 21:40

2013/12/16 오늘의 수확


오늘도 동경은 맑고 건조한 날씨였다. 나는 월요일에 수업 준비를 한다. 두 과목을 준비해야 한다. NPO매니지먼트론과 여성학이다. NPO는 화요일에 수업이 있고, 여성학은 목요일에 수업이 있다. 강의 중에 탈선하면 언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2주 전에 NPO 강의 중 노숙자 문제가 나와서 요코하마 고도부키초에 관한 얘기를 잠깐 했는 데 한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강의하던 내용은 완전히 까먹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해서 강의로 못돌아간다. 그래서 강의 내용은 다 입력한다. 아주 간단히 메모로 하는 것은 전문성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작년에 했던 일본문화사라는 과목이다. 일본문화의 역사, 주로 그림이나 공간성, 철학에 관한 것이라, 다른 과목과 전혀 겹치지 않아서 그게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 주는 수요일에 목요일 수업을 준비하면 된다.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를 하고 아침으로 닭가슴을 한 쪽 먹고 수프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우유도 마시고 카페오레도 마셨다. 연달아 계속 마셔서 배가 출렁일것 같다. 가까운 농가에 야채가 나왔는지 보고, 싱싱한 당근도 사고, 도서관에 새책이 들어오는 날이라,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요전날 도서관 책장에서 책들이 춤추는 게 보였다고 블로그에 쓴 걸 수업 중에 학생에게 말했더니, 한 학생이 심각하게 텔레비전에서 봤는데요, 마약을 하는 사람이 금단증상이 그렇게 환각이 보인데요. 선생님 그거 금단증상, 환각이에요. 나도 안다. 금단증상에 환각이라는 걸… 다만 뭐에 대한 금단인지가 문제다. 도서관인지, 책장인지, 책인지…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학생에게 말했다. 난 마약은 아니야, 내가 마약에 관해서는 호기심도, 용기도 없어서 못해봤고, 앞으로도 안 할 걸. 사실 외국여행을 다니다 보면, 눈 앞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그냥 나에게도 쑥 내미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그냥 담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난 담배도 안 피워서 거절했다. 나중에 그게 담배가 아니라 마리화나라는 걸 알았다. 호주에서는 주에 따라 다르지만, 자기가 피우는 것에 관해서는 합법이란다. 그리고 중고등학생 때, 거쳐가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유럽쪽 친구들은 자기네가 어렸을 때 해봤다고 한다. 작년에 프랑스 친구에게 어디서 만난 남자아이들이 나에게 권하더라고 했더니, 걔들은 아직 애들이네, 그랬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금단증상이 보이기 전에 예방차원에서 나갔다. 우선 농가에서 쇼고인무와 보라색 무, 달달한 대파를 샀다. 그리고 무인판매 야채에 가서 싱싱한 당근을 두 봉지 샀다. 하나에 백 엔이다. 행복감을 덤으로 주는 고마운 가격이다. 도서관에 가니 읽을 만한 책이 꽤 있었다. 열 권쯤 추려서 보고 여섯 권을 빌려왔다. 책 내용도 폭이 넓고 흥미가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떨어진 감과 꽃 같은 나무 열매를 줏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수확이다. 내가 수렵/채취 민족이냐고…/ 수렵생활 기분이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고구마를 쪄서 먹으려고 가스에 올렸다. 큰걸 반쪽으로 잘라서 넣었다. 갑자기 충동적으로 머리를 자르고 싶어 졌다.. 고구마가 쪄질 때까지 잘라야지 했는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어쨌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청소를 했다. 찐 고구마를 데워서 점심으로 먹었다

그리고, 느지막히 수업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왠지 춥다. 날씨가 춥거나, 방이 추운건 아닌데 춥다. 생각해보니 머리가 짧아서 추운 것이었다. 이렇게 앞 뒤 생각 없이 머리를 잘라서 난리를 피운다. 그래서 모자를 썼다. 방에서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머리에는 모자를 써서 수업 준비를 했다.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 혼자서 생쇼를 한다

수업준비에 들어가기 전에 쇼고인 무와 당근, 무청을 조금 잘라서 소금에 절였다. 그리고 가끔 뒤적거리면서 수업준비를 한다. 그런데, 정신은 온통 수업준비가 아니라, 소금절인 무우에 가있다. 뒤적뒤적거린다. 무우가 부드러워서 빨리 절여진다

저녁 메뉴로 싱싱해서 달콤한 대파를 먹으려고 했다. 베이컨에 대파를 넣고 볶아서 계란을 넣어서 먹으려고 했다. 어디까지나 대파가 주인공이었는 데 베이컨에 떡볶이 떡을 좀 넣고 계란을 넣었다. 대파는 그냥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닭삶은 국물에 야채를 넣어서 야채수프를 만들었다. 싱싱한 당근에 오렌지색 배추, 팽이버섯에 무청도 넣었다. 여기에도 대파 넣는 걸 잊었다. 나중에 대파를 하나 다듬어서 넣었다. 그런데 스프색감이 당근과 오렌지색 배추, 대파의 하얀색이 어우러져 예쁘다. 스프를 보면서 색감이 예쁘다는 걸 느낀다. 지금까지 이렇게 음식의 색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있었나

소금에 절였던 무우의 물기를 뺐다. 그리고 유자와 식초에 절였던 자른 다시마를 버무려서 병에 넣었다. 그런데, 이것도 버무리면서 보니 유자의 노란색과 무의 하얀색, 무청의 녹색과 당근색이 어우려서 색감이 예쁘다. 빛난다. 과일이나 야채를 보면서 예쁘다고 여겼지만, 음식을 만들면서 색감이 예쁘다는 걸 새록새록 느낀 적은 별로 없다. 음식이 예쁘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사랑에 빠질 대상이 필요했나 보다. 하필이면 피클이라는 게 좀 걸리지만, 뭔가에 잘빠지는 나는 피클/김치 만들기에 빠지는 건가? 지금은 각종 무를 대상으로 실험 데이터를 뽑는 것 같은 기분인데… 재료의 조합 만이 아니라, 색감의 조합도 중요하구나… 이렇게 흥미진진 하다면 대학 강의나 뜨개질이 아닌, 피클/김치장사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운명일까?

 

며칠 전에 만든 것도 색감이 아주 예쁘게 완성되었다. 물론, 순전히 천연색소로…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