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여행 1- In Pulang Vally
2011/12/29 네팔 여행 1- In Pulang Vally
올여름은 45일 간 네팔에서 보냈다.
45일 간이라고 해도 거의 두 군데서 지냈다고 할 수 있다. 그중 한 달은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라는 룸비니에서 지냈다. 그다음은 포카라에서 2주일을 지냈다.
이 해가 지나기 전에, 간단히 네팔 여행 이야기를 씁니다.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보면서 하는 거라, 생동감이 별로입니다. 그래도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소중한 시간이었기에 써서 남기고 싶네요.
올해 초반 일본, 특히 동경은 지진이 난 후 사회분위기가 아주 뒤숭숭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매일 같이 오늘은 전력 몇 퍼센트 절약했다는 걸 내걸고, 모두가 마치 군사작전이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묵묵히 참아야 하는 무슨 집단체 제도 아닌데 찍 소리도 못하고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재해를 겪고 그 후에도 무시무시한 사회적 압력이 가중된 긴장감의 연속인 하루하루를 보내며 스트레스가 피크가 돼서 피곤해 지쳐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습도가 높은 무더운 날씨만 해도 참기가 힘든데. 그런 무겁고 뒤숭숭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방학이 되자마자 도망을 가야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가 도서관에서 일을 할 수 있나 봤지요, 글쎄 도서관도 28도 정도로 꼭 잠자기 좋은 온도였답니다. 이 건 집단적으로 미친 거지 싶었습니다.
저도 일중독이라 한 10년 동안 휴가다운 휴가를 못 보냈습니다.
그래서 네팔로 가기로 했습니다.
아는 네팔 아이네 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갔지요. 제가 타이항공을 이용해서 방콕 경유로 카트만두로 들어갔습니다. 방콕도 한 10년 만에 갔는데, 방콕 공항이 새로워졌더군요. 모양은 인천공항과 비슷했는데, 하룻밤을 지내봤더니 전혀 쾌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인천공항은 지내기가 참 좋습니다. 공항에서 하룻밤을 지내보면 그 공항이 좋은 공항인지 어떤지 아주 잘 알게 됩니다. 제 주위 사람들은 인천공항을 세계에서 제일 좋은 공항이라고 합니다.
네팔 비자도 받을 시간이 없어서, 현지 공항에 도착해서 받았습니다.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더니 네팔 아이 형이 마중을 나왔더군요. 그 형이 택시를 잡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머무르는 거리였습니다. 호텔도 별로인데 가격이 비싸더군요. 저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사람이라, 대충 가격을 아는데, 하룻밤에 미화 40불을 내라고, 네팔에서, 한 달 월급이 100불이면 좋은 편이라고 하던데, 내용에 비해 턱도 없이 비싸더군요. 네팔 아이가 집에 돈을 부쳐서 돈을 바꾸러 갔지요. 같은 동네에서 온 사람이 하는 환전소에서 말했더니, 호텔 요금이 20불로 깎이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리 비싸도 10불짜리였습니다. 그 아이 형 체면이 깎일까 봐, 그냥 내기로 했습니다. 방은 트윈으로 샤워와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제가 네팔 아이가 부탁한 돈을 좀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 형에게 말을 했지요. 내 돈도 아니고, 너네 부모님에게 전해줄 때까지 잘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불안하다고 걱정했더니 그 형이 내일은 대학원 시험인데, 오늘 자기가 같이 있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맙겠다고 해서 같이 있기로 했지요.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란 것은 제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 아이 형이 러닝과 팬티 차림으로 방에 있는 작은 침대에서 아주 릴럭스 한 포즈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놀랬지만, 그 친구가 너무나 평화롭게 당연한 듯 하기에 무안할까 봐 내색을 못했답니다. 같이 저녁을 먹고 나서 저도 피곤했고, 그 친구도 공부를 하고 잤습니다. 가기 전에 가이드북도 살 시간이 없어서 Lonely Pranet을 사놓으라고 했더니 다른 가이드북을 사놨더군요. 여행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별로 없는 책이어서 좀 난감했지요.
저녁 먹을 때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 시내를 걸어 다녔는데, 먼지와 매연도 많고, 비가 와서 냄새도 나고 피곤해서 좋은 게 좋게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왠지 길가에는 왼 통 남자들만 떼 지어 있습니다. 시장 외에는 여자들이 잘 안 보입니다. 좀 이상했습니다. 이걸로 카트만두는 끝입니다.
그 이튿날은 호텔에서 주는 맛도 없고 비싼 아침을 먹고 시골 가는 버스를 타러 갔습니다. 택시 타고 가면서 보니까 길에는 쓰레기가 넘치고 그 냄새가 진동하더군요. 형은 시험을 보러 가고 나를 시골로 데려가는 건 작은 누나인데, 작은 누나가 아침 일찍 전화를 했는데도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되어도 안 나타납니다. 버스가 손님이 도착하기를 기다립니다. 버스가 출발시간이 지나 작은 누나가 오자마자 출발합니다. 저는 표를 빨리 사서 좋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 가방은 열쇠를 채우고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버스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척들도 탔습니다. 그 아이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었고, 우수한 학구적인 타입이더군요. 영어도 깔끔한 제대로 배운 영어를 합니다. 버스를 탈 때, 어머니 주라고 망고도 사주고요. 그 전날 내가 그렇게 과일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도 안 사주더니만, 어머니에게는 사서 보내더군요. 작은 누나는 좀 얌통머리 없다고 할까, 얌체 스타일이었습니다. 근데, 부잣집에 시집가서 제일 잘 산다는데 영어도 못하고 그래도 좀 하니까, 나는 네팔 말이라고는 나마스테 밖에 모르니까, 같이 다녀야 하지요.
카트만두 시내에서 나오니까 살 것 같더라고요. 길은 좁고 꼬불꼬불 울퉁불퉁 하지만,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았습니다. 버스 음악이 인도풍인데 크게 틀어놔서 좀 시끄러웠지만, 참을 만했습니다. 나중에는 음악이 시끄러워 멀미를 해서 운전사에게 볼륨을 좀 줄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운전사도 기분 좋게 줄여줬습니다. 근데, 네팔에서는 버스 운전사나 차장이 아주 멋있게 차려입었더랍니다. 운전사가 수입이 좋은 모양으로 차장은 운전을 배워서 운전사가 될 모양입니다. 세 시간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렸습니다. 도중에 가난한 아이들도 탔고, 카스트나 민족이 다른 사람들도 탔습니다. 쪼끄만 아이들이 타서 제가 옆이나 앞에 앉으라고 했더니, 작은 누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주 거만하고 차갑게 대합니다.
집에 도착했더니 어머니와 아버지, 옆집 사람까지 기다리고 있더군요. 바로 집 앞에 버스를 세워서 내렸습니다. 제 가방을 버스 지붕 위에서 내렸습니다. 가방은 두 개였는데, 큰 가방에는 네팔 아이네 가족에게 줄 선물과 동네 아이들에게 줄 과자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초콜릿도 스무 상자를 샀습니다. 이렇게 스튜 케이스를 가지고 간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거든요. 제가 아주 오랜만에 이런 여행을 해서 이런 실수를 한 겁니다.
제가 이 집에는 아주 귀중한 손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제가 쓸 방에 모든 걸 새 걸로 갖추어 놨습니다. 시트도 사서 빨지도 않은 새 것이었습니다. 그 집은 삼층이었는데 맨 아래층은 사람이 안 살고 곡식을 저장해 있습니다. 뒤쪽에는 쇠 외양간이 있었습니다. 이층에 방이 네 개 있고, 중간에 마루 같은 데에 계단이 있어서 위로 갑니다. 맨 위는 반이 창고고 침대도 있지만, 부엌입니다. 거기에 다 따로 화장실과 샤워실이 집 뒤에 있습니다.
그 집 엄마는 부엌에서 불을 때기도 하고 가스도 쓰면서 밥을 하더군요. 밥에다 카레에 반찬이 몇 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베지탈리안이어서 먹는 게 야채 중심입니다. 그런데 먹는 밥, 양이 장난이 아니게 많습니다. 정말로 엄청나게 많습니다. 저는 밥을 잘 안 먹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비싸다는 과일도 사다 놨더라고요. 그리고 젖소에서 짠 우유로
만든 요구르트 같은 것도 있습니다. 아침은 비스킷과 차이로 간단히 먹고 점심과 저녁을 많이 먹습니다. 저는 첫날 먹으니까, 맛있는 데, 모든 게 카레 냄새가 납니다. 심지어 물까지도 저는 카레를 싫어하지 않지만, 한 달에 한 번이나 이 주에 한 번 정도로 족합니다. 매일 카레를 못 먹지요. 밥을 먹을 때는 엄마가 밥 먹는 걸 보면서 반찬을 더 넣어주고 계속 시중을 듭니다. 자기는 밥을 같이 안 먹고요. 나중에 혼자서 밥을 먹더랍니다. 그 게 보통인 모양입니다. 저에게는 무조건 무엇이든 많이 먹으라고, 쉴 새 없이 권합니다. 저는 그렇게 못 먹지요. 하는 게 없는데 소화도 안되고, 카레 냄새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가 한시도 제 옆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아침에 눈뜨면 제 시중을 들어주려고 문 밖에 대기 중이고, 아무것도 제 손으로 못하게 합니다. 너무 잘해주는 게 괴롭습니다.
저는 옥수수나 그냥 감자를 삶은 것, 부침개 등 먹을 수 있는 걸 먹기로 했지요. 그 걸로 충분했으니까, 깻잎도 많더라고요.
아버지는 동네 유지입니다. 매일 깨끗한 옷을 입고 사회활동을 하러 돌아다니십니다. 직업군인이었는데 은퇴한 체격도 좋고 멋있는 신사입니다. 어머니는 식사 준비에 밭일, 소꼴을 베고 손님을 맞고 아주 바쁩니다. 그리고 항상 웃는 아주 영리하고 사랑이 넘치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밭일을 거의 여자가 하더군요. 소꼴을 베는 것도, 남자가 같이 하거나 남자가 밭에 있는걸 거의 못 봤습니다. 여자들이 밭일을 할 때도 전통적인 옷을 입고 장신구를 주렁주렁한 채로 합니다. 너무너무 예쁘고 멋있습니다. 물건을 나를 때도 아주 큰 소쿠리를 머리에 연결시킨 끈으로 무거운 것도 나릅니다. 엄청난 양의 양배추를 하나 가득 넣어서 나르기도 하더군요.
저는 작은 누나와 같이 친척네 집을 다 돌았습니다. 가는 집마다 차를 주더군요. 그리고 동네 사람이나, 옆 집 사람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듭니다.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보고요. 옆 집은 좀 작은 집이었습니다. 막내아들, 저는 여자아이인 줄 알았는데 남자아이였습니다. 귀엽습니다. 제가 가방에 넣어서 데리고 오고 싶을 만큼 귀여웠습니다. 학교 제복을 입으면 제복이 너무 커서 아이들이 불쌍해 보이는 데, 전통옷을 입으면 예쁘고 멋있게 보입니다. 전혀 다릅니다.
윗 사진은 나의 '바부(귀여운 아들이라는 의미)'가 Sandy가 사준 비스킷을 들고 있습니다. 아래는 누나와 같이 부동자세로 서서 귀엽고 예쁘지요? 남자아이예요.
하루는 혼자서 산책을 나갔지요.
동네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나를 본 사람이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해서 그 집에 들어갔지요. 그 사람은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사람 집에서 일을 했던 모양입니다. 한국에 일하러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나에게 방법을 알려달라고, 같은 동네에도 한국에 일하러 간 사람이 있을 테니까, 물어보라고 했지요. 나는 그냥 한국 사람일 뿐이지, 그런 걸 잘 모른다고.
비가 오기 시작해서 어두워지니까 산에서 내려왔지요. 금방 어두워지고 비도 세게 오고 길을 잃어버렸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어쨌든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나와서 어두워서 집에 도착해 보니 난리가 났습니다. 말도 모르고 길도 모르는 사람이 나가서 안 들어오니, 비도 오고 걱정을 했나 봅니다.
집에 와보니 Sandy가 와있습니다. Sandy는 NGO에서 일하는 영국 사람인데, 제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 언니입니다. 실은 Sandy가 그전에 이 집에 살아서 주인집 아들이 일본에 유학을 가니까, 동생이 동경에 있을 때 부탁을 한 겁니다. 동생은 호주로 떠나면서 저에게 부탁을 하고 갔지요. 그래서 네팔 아이와 제가 연결이 됩니다.
어젯밤 여기까지 쓰고 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Sandy동생에게서 벌써 연하장이 왔네요. 물론 Sandy얘기도 들어있고요.
그날 밤은 야채만두(모모)를 해서 같이 먹었습니다. 저도 있는 재료를 동원해서 김치를 만들었습니다. 김치가 아니더라도 뭔가 있어야 기름진 음식을 먹지요.
이튿날 Sandy와 작은 누나가 같이 버스를 타고 작고 예쁜 티베트 절에 갔습니다. Sandy가 불교신자여서 Sandy가 다니는 절이라고, 바나나를 사서 갔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가깝다고 로컬 사람처럼 버스비를 안 냈습니다. 좀 미안하더군요. 절은 버스 길에서 한참 걸어서 산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거기까지 사람의 힘으로 모든 걸 날라서 공사를 했다는 걸 못 믿을 정도였습니다. 절 장소도 좋고요. 절도 아주 예쁩니다. 티베트에서 왔으니까, 얼굴은 몽골리안입니다. 거기에 언니가 누들을 먹겠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티베트 절에서 인스턴트 라면과 콜라를 마셨습니다. 맛은 세속/문명의 맛이었습니다. 환대를 해주신 거랍니다. 제 목에도 축복을 의미하는 흰 스카프를 매주시고, 특별히 사진을 찍는 것도 허락해 주더군요. 화장실을 빌렸지요, 화장실이 너무너무 기분이 좋게 되어있더군요.
절 마당에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린다는 탑, 파고다가 세워졌는데, 크고 이 걸 또 스님이 손수 재료를 날라다 지었다는 데, 정말로 모든 게 정성이 깃들어 있는 걸 느껴집니다. 절이 있는 곳이 성스럽게 느껴졌고요. 조금 내려오면 이 부근에서 추앙을 받는 신, 부처님이랄까, 시바신이랄까 얼굴이 저절로 바위에 나타나 있었답니다. 거기에는 힌두교식으로 꽃가루를 많이 뿌려서 채색이 되어 있고요.
돌아오는 길은 버스가 언제 올지 몰라서 버스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갔지요. 도중에 폭우가 쏟아져서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가 아닌 돼지가 되어 가게에 들어갔답니다. 불가에 앉아서 젖은 옷과 몸을 말리고 기다리고 기다려도 버스가 안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차를 세웠지요. 좀 태워다 달라고, 젊은 인도 사람 두 가족이었는데 놀러 왔다가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좋은 차에다 음악, 날렵한 운전 솜씨였습니다. 단지 문제는 모두가 카레 냄새에다 세 사람이나 끼여서 탔기 때문에 다른 사람(여자) 피부와 제 몸이 밀착된 상태였지요. 그런 상황에서 저는 계속 긴장한 상태입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피곤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Sandy에게 의논을 했지요.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달라고, 벌써 5일째 신경성 변비라고, Sandy가 돌아갈 때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네팔 아이네 부모님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고, 계속 자기네 집에 있을 줄 알았다고 아주 섭섭해하더군요. 그러면서 어디 갔다가 덥거나 힘들면 언제든지 자기네 집으로 돌아오라고, 어머니는 자기 옷을 주려고 하는데, 작습니다. 겨우 새로 사준 샌들/슬리퍼를 가지고 왔지요. 이 걸로 Pulang Vally에서 나옵니다.
Pulang Vally는 아주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사람들도 점잖고 살기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다음은 룸비니로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