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iya(kohui) 2019. 12. 30. 22:17

2014/12/31 광주

 

오늘 동경은 아주 맑고 기온도 높은 따뜻한 날씨였다. 일본에서는 명절을 앞두고 대청소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대청소하기에는 따뜻하고 너무 좋은 날씨였다. 나도 대청소를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불과 담요, 베개 등을 말리고 나머지 손빨래를 해서 말리는 걸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베란다를 살짝 청소했다. 대청소는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려고 마음먹었다. 내일도 오늘 못지않게 날씨가 따뜻할 것 같다. 내일은 베란다와 유리창 청소까지 하고 연말연시에 먹을 야채를 사러 갈 것이다. 연말 기분은 전혀 안나지만, 연말을 지내고 연시에는 마트도 쉰다. 도매시장도 쉬니까, 마트가 문을 열어도 신선한 야채는 적고 가격이 엄청 비쌀 것이다.

 


광주에 갔던 이야기를 하자.
오블에서 알게 된 프라우고님이 계신 광주에 갔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광주사태라고 불렸던 5.18이 일어난 1980년 이래 광주에 못 갔다. 그 전에는 갔었으니까, 35년 만에 광주에 갔다. 1980 5월, 나는 서울에 있었다. 당시,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단편적으로 들었다. 그 걸 전하는 목포 출신 친구는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어서 미쳐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너무 충격적이어서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군대가 민간인에게 총을 들이대다니 상상도 못 했다. 

분단국가에 태어나 군사 독재정권 하에 성장한 세대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며 성장한 나에게 정치적인 상황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물론, 주변에 정치적인 상황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절묘한 타이밍에 적발되는 간첩사건이나, 억울한 누명을 씌워 조작된 간첩사건을 들으면서 간첩은 얼마든지 조작된다는 걸로 알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구에게나 간첩으로 조작될 수 있다는 공포가 조성되어 있었다. 국민이 아니라, 간첩사건을 조작하는 국가가 압도적으로 힘을 가진 것이다

일본에 유학 왔을 때,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뉴스 영상으로 본 사람들은 그때 일어난 일에 관해 말했다. 나는 그 영상을 본 적이 없어서 무슨 일인지 몰라서 시답잖은 반응을 했다. 아니,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그 걸 눈치챈 사람들은 얼른 말을 마쳤다. 그 후 한국에서는 착실히 민주화가 진행되어 광주사태라고 불렸던 일에 관해서도 주된 책임자에게 책임추궁을 해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물론,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국가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된 책임자들은 사회복귀를 했고, 여전히 일부 사람들에게는 존경받는 모양이다. 한국을 떠나 사는 나에게는 한국에서 진행되는 일들이 혼란스럽고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다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군사 독재정치 하에서 성장한 나에게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90년대에 들어서 한국의 민주화는 재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1980년 이후, 광주에 가질 못했다. 그전에 광주에 간 적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지명과 인상이 있을 정도의 기억은 없다. 전에 목포에 살던 친척오빠가 전남대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직장 다니며 이모와 같이 살고 있던 인연으로 광주에 갔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나는 호남선 야행 열차를 타면 아침에 광주에 내렸었다. 아주 가끔 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광주에 갔던 것이다. 오빠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오는 게 겨우였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나에게 광주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던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특별한 일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군사 독재정권 하에 성장한다는 자신의 선택과는 전혀 무관한 생을 살면서 특별한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뭔가에 의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위험하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위험한 줄 알고 있었다. 공포정치의 무서운 세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국가와 국민이라는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선을 확실히 넘어섰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군인이 민간인에게 총을 겨눈다는 사실이 용납된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나라, 국가가 너무나 싫어졌다. 그러나 나는 아무 힘도 없는 젊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내가 살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

독재시대에 성장하면서 느꼈던 숨 막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서울에서 있으면서, 느꼈던 무력감에 확실히 점을 찍어준 것이 광주의 5.18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광주를 한 번은 가야 했다. 내가 살았던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서 라도 가서 봐야 했다.


하필이면, 광주에 35년 만에 가는 날은 영화라도 찍는 것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인상적인 날씨였다. 의외로 망월동 묘지에서는 무덤덤했다. 당시의 영상을 보면서도, 소화가 되지 않는 내가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대, 더 젊었던 사람이 죽은 걸 보면서 울컥했다. 상상 이상의 압도적인 과거의 흔적을 보면서 현실감이 없어서 멍했다. 망월동에 다녀온 날 밤, 잠을 못 잤다.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 현재 다른 형태의 광주가 진행형이라는 것이 너무나 슬프다

프라우고님과 프라우고님의 옆지기이신 돼지띠 오빠의 동행으로 슬프고도 기쁜 광주행이었다. 마치 모험 영화라도 찍는 것처럼, 휘날리는 눈보라를 맞으면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보리밥에 눈이 뒤집혀서 정신없이 먹었다. 식후의 수정과가 유난히 맛있었다

광주에 있는 동안 프라우고님네가 세심한 배려를 해주셨다. 게스트하우스에 마중 오셔서, 전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탈 때까지 차로 동행을 해주셨다. 군고구마, 따뜻한 유자차에 모과차, 간식으로 챙겨주신 대봉과 단감. 별도로 챙겨주신 김장김치와 깨, 고춧가루에 김을 들고 다니다가 동경까지 끌고 왔다. 헤어지기 전에 창평에서 사주신 엿과 과자는 지금까지 먹었던 같은 종류 과자 중 가장 맛있었다. 많이 사올걸, 뒤돌아서서 후회했다. 김치는 한국에 있는 동안 발효를 거듭해서 지금도 냉장고에서 부글거리고 있다. 덕분에 연말연시에 김치를 먹고 지낼 것 같다. 프라우고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