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대학생

넷우익이 될 뻔한 학생

huiya(kohui) 2020. 1. 11. 23:44

선생님의 강의를 듣지 않았다면 저는 넷우익이 되었을 거예요. 그건 틀림이 없어요. 이 말을 듣고 정말로 놀랐다. 지금 강의를 듣는 학생 중 가장 우수하고 건전한 사고를 가진 학생이 넷우익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일본의 넷우익은 한국의 일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동경은 기온이 낮아도 맑은 날씨였다. 새해가 밝아 개강해서 바쁘게 일하는 주였다. 새해가 되었지만 일본은 밝은 뉴스가 전혀 없다. 수요일부터 과목마다 새해 인사를 겸해서 학생에게 물었다. 2020년이 일본에게, 아니면 여러분에게 좋은 해가 될 것 같냐고 아니면 그다지 좋은 일이 없을 것 같냐고 했더니 대부분 학생들 얼굴이 어둡다. 올해는 동경올림픽도 있으니까, 좋겠지? 했지만 학생들은 좋은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좋은 해가 될 것 같다는 학생은 한 클래스에 두 명정도나 아예 없다. 내 예상으로는 그저 막연히 학생들이 좋은 일이 있겠지 여길 줄 알았다. 

 

아직 세상을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거운 책임을 진 입장도 아닌 학생은 그저 막연하게 라도 좋으니 좋은 해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으면 좋겠다. 좋은 해인지 어떤지는 지나고 봐야 안다. 2020년이 끝날 무렵이 돼야 안다. 그러니, 올해는 좋은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무슨 일이 있으면 그때 가서 대처해도 된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나 호주의 산불처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뭔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호주의 산불에 대해 기부도 할 수 있고 마음으로 하루빨리 비가 와서 산불이 꺼지도록 기도할 수도 있다. 결국, '희망'은 정치가가 이뤄주지도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사람들 손에 있으니까, 작은 '희망'을 모으면 큰 '희망'이 되겠지? '희망'이 구체적인 형태가 될 수 있게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래도 좀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는 걸 새해 인사로 했다. 학생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조금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얼굴색이 달라진다.

 

지난 목요일은 강의가 끝나고 시내에서 약속이 있어서 평소와 다른 전철을 타야 했다. 내 강의를 2년째 듣는 학생과 같이 역에 가서 전철을 타고 도중까지 옆에 앉아서 갔다. 그 학생은 평소에 쓰는 감상문은 항상 높은 점수를 받고 리포트도 높은 점수를 받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다. 한국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지금 일본에서는 아주 드문 학생에 속한다. 매주 강의가 끝난 후 질문할 정도로 열심이다. 그 학생에게 지금 학기말에 가까우니까, 강의 성과가 나온 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학생이 하는 말이 대학에 와서 내 강의를 듣지 않았다면 자기는 넷우익이 되었을 거라고 한다. 정말로 깜짝 놀랐다. 학생 중에는 넷우익 같은 학생이 항상 있다. 학생 중에는 넷우익의 성향을 지닌 학생이 적지 않다. 그런 학생은 강의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인 학생이 많다. 가끔 성적이 좋은 학생이 그런 경향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 학생의 경우는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사회와 정치, 문화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다. 그런 학생이 넷우익이 되면 아주 복잡해진다. 한국을 좋아하면서도 '혐한'을 해야 하니까..... 내가 보기에는 넷우익과 가장 거리가 있게 보이는데 본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넷우익이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일본에서는 넷우익이 활개를 치지만 다른 나라에서 보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못할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로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봐. 나는 학생들이 건전한, 정상적인 범주에 있기를 바라. 왜냐하면 넷우익이 되어 '혐한'이나 '혐중'을 하게 되면 사고가 그쪽으로 발달하게 되거든. 넷우익이 되었다면 너는 우수한 학생이니까, 아주 우수한 넷우익으로 능력을 발휘했을 거야. '혐한'이나 '혐중' 이전에 그런 걸 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으로 살지 말았으면 해. 학생도 자신이 넷우익이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학생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내심 정말로 놀랐고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일본 사회를 바라보면 그 학생이 왜 넷우익이 되었을 거라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 학생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아베 정권 하에 성장했다. '혐한'과 '혐중'이 일본에서 가장 핫한 유행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시대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냈다. 작년에도 '혐한 비즈니스' 밖에 돈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할 정도였고 아베 정권은 기본적으로 '혐한' 정권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하면서 주위를 보면 '혐한'을 하는 넷우익이 당연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덕분에 넷우익 세대가 형성되고 말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하에 성장해서 '반공' 소년 소녀가 되는 것이 당연했던 것처럼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 학생은 우수한 학생이라서 자신이 넷우익이 되었을 것이라는 걸 안다. 강의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학생들은 넷우익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그게 넷우익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넷우익이라는 말의 뜻도 잘 모른다. 성적이 좋으면서 넷우익 같은 행동을 하는 학생 중에는 확신범처럼 알고 있으면서 한다. 넷우익이 되는 것이 '반공'이나 '애국' 소년처럼 당연한 세대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넷우익이 되지 않는 것은 힘들고 넷우익이 되지 않으려고 의식하는 것이 힘든 일이 되고 만다. 실상은 자신들의 넷우익 세대로 '혐한'이지만 '혐한'이 나쁜 일이라는 걸 알면 '혐한'이 아니라고 한다. 일본에서 '혐한'이나 '혐중'이 대다수라는 상상도 못 하는 객관적인 수치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혐한'이나 '혐중'은 극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이라고 인식한다.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인 셈이다. 

 

군사독재 정권 하에 성장한 사람으로서 그시대에는 그런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했다. 독재정치 하에 산다는 것은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도 못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일본, 지금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생들도 '혐한'의 시대에 성장했기에 다른 세계를 상상도 못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닐까? 자신들의 그런 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될지도 모른다. 독재 정치 하에서 성장한 사람에게 민주주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토리 세대는 유토리 교육이라는 교육정책에 의해 탄생한 세대였다. 아니러니 하게도 교육정책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는 넷우익 세대가 될 것 같다. 일본 대학에서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혐중'과 '혐한'의 시대를 구축하고 이웃나라를 혐오하는 것이 당연한 세대를 육성했다는 것은 아베 정권이 이룩한 성과가 된다. 일본에서 넷우익은 폭넓은 지지를 받지만, 젊은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대를 형성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