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들
2013/03/01 도구들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이 높은 따뜻한 날씨인 데, 바람이 세차게 분다.
꽃샘바람인 걸까.이름이 좋다. 일본어로는 ‘하루 이치방’이라고 한다.
요새 잠을 자는 게 점점 늦어서 아침에 깨는 시간도 늦어진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짧다. 이건 순전히 아침햇살을 못 받기 때문이고, 영양부족에 운동부족이 겹쳐서 그렇다. 그냥 계속 이렇게 가면 멀지 않아 ‘폐인모드’로 돌입한다. 그런데, ‘폐인모드’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없다. 내일과 모레는 세미나를 가고, 월요일에는 필드에 나가야 하니까.
어제는 벽장에 넣어둔 상자들을 꺼내서 ‘도구’들을 꺼냈다. 필드에 나갔던 게 너무 오래전이라, 내가 어떤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으로 필드를 하는 사람이라, ‘기본적인’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안다.
어제 찾아낸 건, IC레코더 둘이다. 하나는 건전지를 넣은 채 둬서 건전지를 넣는 곳 스프링 같은 게 부식이 됐다. 칫솔로 털어내다가 스프링마저도 꺾이고 말았다. 이 게 쓸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구가 부족하다. 그리고 건전지를 넣어서 작동을 익혀야 한다. 일을 할 때 쓰는 도구는 거의 SONY다. SONY뿐이다. 기계가 발달하는 속도가 빨라서 그 걸 쓰는 사람들이 쫓아가질 못한다.
보통, 인터뷰를 할 때 레코더 두 대를 동시에 쓴다. 하나에 문제가 생길 걸 대비해서다. 그리고 내가 인터뷰를 하는 분들이 전혀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라, 인터뷰 자체에 긴장이 보통이 아니다. 물론, 나도 그에 못지않게 긴장한다. 내가 더 긴장을 한다는 게 맞다. 그래서 인터뷰를 일단정지해서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그럴 ‘여유’가 없다. 일단정지를 하면 안 된다. 인터뷰의 흐름을 자르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한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그 흐름을 중단시키면 안 된다. 두 번 다시 그런 흐름이 생겨날지 어떨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해본 경험에 의하면, 흐름이 생기면 거의 인터뷰에 성공한다. 한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짧게는 두 시간, 길면 몇십 시간을 가는 경우도 있다. 밤을 새는 경우는 허다하다. 둘 다 흐름을 타면, 일종의 트랜스상태에 빠져간다(이 건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이지 일반적이지 않다). 자신의 좋았던 일, 나빴던 일, 괴로웠던 일, 즐거웠던 일들에 관한 ‘기억’이 온갖 감정표현을 동원해서 말과 몸으로 재(표)현된다.
필드웍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체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는 사람, 특히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거나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어렵다. 억압을 많이 받을수록 어렵다. 상처를 많이 받고 살아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무장을 하고 있다. 우선, 말을 듣는 사람과 말을 하는 사람이 마음을 열어야 시작된다. 말을 들을 사람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옷을 다 벗는 것처럼 무장해제를 한다. 그러면, 말을 할 사람이 말을 할지, 안 할지를 정해 간다.. 가장 삼가야 할 것은, '절대'로 억지로 말을 시키면 안 된다. 일단, 말을 시작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듣기'이다. 잘 듣는 것이 말을 끌어낸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잘 듣지 않고, 잘 듣는 사람이 적다. 잘듣는 것은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듣는,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다. 잘들어야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기본적인 예의다. 거의 여기서 승부가 난다.
나는 옆에서 중요한 사항만 노트를 적어가며, 같이 흐름의 ‘파도타기’를 한다. 말하는 내용은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나에게는 감정의 흐름이 단순하면서도 강력히 전달된다. 파장으로… 그러므로 말하는 분이 힘들었던 상황은 나도 힘들고, 괴로웠던 대목에서 나도 괴로워진다. 같이 아프고, 울고 웃는다. 그러나 전해지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나에겐 단순히 평면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본인에게는 단순하지 않다. 힘든 것도 힘든 것 만이 아니고, 괴로웠던 일도 괴로움 만은 아니다. 물론, 봄바람이 솔솔 부는 것처럼, 즐거운 대목도 화려한 대목도 있다.
내가 쓰는 노트다. 그다지 두껍지 않고, 칸이 넓어야 좋다. 두껍지 않은 것은 손에 잡히는 맛 때문이다. 칸이 넓이는 보통 6미리인 데, 나는 7-8미리를 좋아한다. 그런데, 7-8미리는 잘 나오질 않아 보이면 사둔다. 가끔 9미리짜리도 있다. 사이즈도 어느 정도 규모나, 기간이 있으면 대학노트 크기, 가지고 다니기 좋은 것은 그 보다 작은 것이다. 노트와도 장기간 동고동락을 하는 관계가 되기 때문에 맘에 드는 걸 써야 한다. 이번에는 대학노트 크기와 중간 것을 가져간다. 현지에 가서 말을 들어봐야 어느 노트를 쓸지 짐작이 가니까. 노트 칸이 넓어야 좋은 이유는, 글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색도, 블루다. 눈에 확 들어온다. 물론, 빨강색이 필요하고, 초록색도 필요하다. 그래서 삼색, 실은 사색, 의사들이 쓰는 볼펜이다. 내가 잘 쓰는 것은 사진에 나온 것보다 좀 가는 흰색 바탕에 색이 있는 걸로 파는 데가 별로 없다. 그래서 발견을 하면 두 자루 정도 사둔다. 필기도구도 중요하다. 집중과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필요한 걸 알기쉽게 적어내는 거니까… 그리고 일을 하면서, 필드를 마치고도 보고 또 보는 관계가 되니까… 노트는 앞장만 쓰고 뒷장을 남겨둔다. 뒷장은 나중에 따로 쓰기 위해서다.
노트외에도 나는 작은 스케치북을 갖고 다닌다. 평소에 쓰는 스케치북은 세 권 정도다. 스케치북이 없으면, 주변에 있는 종이에 그려서 테이프로 붙이기도 한다. 물론, 필드에 나갈 때도 뜨개질 거리를 들고나간다. 나에게 뜨개질은 신경안정제 역할도 한다. 뜨개질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며 메모를 해간다. 이상하게도 손을 움직이면 머리도 더 잘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아직 도구고 뭐고 아주 턱없이 부족하다. 아무래도 필요한 물품을 리스트업 해서 하나씩 줄을 그어야겠다. 이러다 보면,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은 뒷전이 되어 제대로 못 챙긴다. 필드는 완전, 전지훈련이다. 그래도, 이번은 다행이다. 레코더와 카메라 등이 필요할 뿐이니까, 장비가 별로 없는 편이다. 영화를 찍은 적이 있는 데, 그때는 촬영용 카메라에 랩톱, 밧테리, 레코더 등 필요한 총장비를 지고 다녔다. 비행기를 갈아탈 때, 시간이 있어서 쉴 때도 장비가 든 가방을 껴안고 잤다. 그때는 (상상이지만) 특수부대에 입대한 기분이었다.
필드에 나가기 전에 정작 필요한 것은, 온갖 상상을 다 하는 일이다. 우선, 필드 디자인에서 어떻게 자신이 생각한 것에 도달할까, 실제로 아주 다르다면 어떻게 전환을 할까. 그런데 이번은 마음을 비우고 간다. 말을 듣는 게 목적이니까.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로 필요하기나 한 걸까. 가보려고 한다.
아래 사진은 내 재산목록 일호다.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