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2013-3
2013/08/22 야스쿠니 신사 2013-3
오늘도 동경은 뜨거운 날씨였다. 최고기온은 34도. 그런데 오후에 들어서 3시쯤에 소낙비가 크게 올 것 같았다. 천둥번개는 물론이요, 비가 올 것 같은 냄새가 훅하고 났다. 나는 비가 내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청소기를 돌리며, 비가 크게 오기를 빌었다. 하늘에서는 천둥이 우르릉 꽈당 난리를 편다. 신났다, 비야 내려라, 완전 기대를 했다. 비는 조금 왔다. 크게 내릴 것처럼 폼이라는 폼은 다잡고, 속은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은 것 보다 훨씬 낫다. 일주일 만에 밑에 내려가서 시장을 봤다. 오늘은 옥수수가 싸서 옥수수를 많이 사 왔다. 10개쯤 샀다. 집에 먹을 게 별로 없어서 식량조달차 내려간 것이다. 내가 사는 근방은 좀 시원해도 밑에 내려가니까, 비가 조금 와도 그다지 효과가 없는지 더웠다… 옥수수를 삶아서 저녁으로 먹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관해 계속 써서 마쳐야지. 야스쿠니의 유슈관과 캔버라의 전쟁기념관이 왜 그렇게 달랐을까? 베트남 호찌민에서 전쟁기념관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미군 옆에 한국군으로 보이는 인형이 있었다. 한국군은 자기나라 전쟁도 아닌 데,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베트남 사람들을 죽였다. 물론, 전쟁이니까, 한국병사들도 죽은 사람들이 있으리라. 학교에 다닐 때, 위문편지를 쓴 기억이 난다. 위문편지는 거의 강제적으로 쓰는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서 한국군인들은 돈벌이를 위해서 베트남전에 참전을 했다고 생각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전쟁을 해서라도 돈이 필요했었다고 정당화를 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남의 나라에 가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한 것에 관해 정당화할 이유가 안된다. 가난했어도,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택할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군인에게 가족을 잃은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군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런 것이 걸려서 쉽게 베트남에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군인의 인형을 보고 마음이 착잡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아저씨가 해설하는 땅굴에도 갔다. 영어가 좀 독특해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자신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상대로 전쟁해서 이겼다는, 베트남이 통일되었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스쿠니와 캔버라, 호치민의 전쟁을 기념하는 것에 공통점과 다른 점이 있다. 공통점은 끝난 전쟁이라는 것이다. 과거, 즉 역사적인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캔베라와 호치민의 그것은 두 나라의 현재 모습에 큰 영향력이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전쟁기념관이 할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으리라. 야스쿠니는 과거로서 끝난 역사가 아닌 현재의 구심점을 만들고 있으며, 미래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려 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단지 과거를 되새김하는 역사적인 모뉴멘트가 아닌 현재에 과거의 고난과 영광을 되새김질하면서 미래로 연결시키려 한다. 야스쿠니가 그 점에 있어서 결정적인 정신적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유슈관에서 변태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일본에서 이런 사람을 ‘치한’이라고 한다. 전쟁을 기념하는 곳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적흥분을 주나 보다. 그 변태는 자신의 성적으로 흥분된 상태라는 걸 누군가(나?)에게 어필을 하고 싶어서 자신의 몸을 나에게 밀착시키고 지나갔을 것이다. 다른 장소였으면 아주 놀랐겠지만, 나는 이미 너무 놀란 상태여서 거기에 변태가 보태져도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성적으로 흥분할 만큼 그 장소가 특별하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게 해 줬다.
유슈관을 나와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연못이 있는 정원으로 갔다. 정치가들이 참배를 오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정치가가 오긴 왔는 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 거기서 좀 기다렸지만, 잘 보이지 않아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전쟁 때 말이나 개들도 많이 죽었다고, 그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로 말과 개 동상이 서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이의 동상도 서있다. 설명문에 의하면, 전쟁미망인과 아이로, 어머니가 고난과 고독 속에서 아이를 잘 키웠다고, 아이가 커서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의미로 바쳐진 것이라고 한다. 유슈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이나 동상들을 보면, 어디까지나 가족적인 느낌이 든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서 죽는, 전쟁에 나가는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더 큰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걸까?
앞에 마당에 왔더니, 대만에서 온 사람들이 소수민족의상을 입은 사람을 중심으로 사진이 잘 찍히게 포즈를 잡고 있다. 같이 온 것 같은 매스컴들도 사진을 찍고 있다. 친구가 그 사람들과 말을 한다. 나도 옆에서 듣는다. 한 할아버지가 말하길, 대만은 (일본) 천황의 나라란다. 자신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친구와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다. 대만의 나이 든 소수민족끼리는 일본어가 공통어라, 일본어로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있다.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에 대만에 갔을 때, 공원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일본말로 대화를 하는 걸 보고 물어봤다. 자신들은 소수민족인 데, 그 세대는 일본어가 공통어라고 했다. 소수민족 만이 아니라, 원래 대만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대륙에서 와 정권을 잡은 국민당에 대해 결코 단순치 않은 감정이 있다. 원래 대만 사람이었던 선배는 대만 말과 중국어를 구분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국민당원을 부모로 둔 친구는 중국을 조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대만 사람들도 중국에 대해서나, 일본에 대해서 그 입장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대만에서 온 그룹은 그렇게 포즈를 잡고 있는 게 중요한 모양이다. 계속 누가 사진 찍는 걸 의식하며 그 포즈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젊은 여자분도 두세명 끼어 있었다. 그리고 같이 온 매스컴은 그 그룹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에게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내가 봤을 때는 옷차림과 얼굴이 인도계로 보이는 청년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실은 인도 사람인지, 네팔 사람인지 구분이 잘 안 갔다.
나는 주위를 보면서 서있었더니 비디오카메라를 찍으면서 오는 사람이 있다. 내가 오래전부터 아는 중국 친구였다. 아주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서, 조금 수다를 떨었다. 그는 중국에 남아있던 일본인에 관한 논픽션을 쓴 사람이다. 근래는 중국인 위안부에 관한 것도 썼고 영화도 만든 걸로 안다. 전에는 주로 글을 썼다. 요즘은 영화를 찍는 일을 많이 한다고 들었는 데, 나는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 친구도 대만에서 온 그룹에 대해 짧게 설명한다. 아이들은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일본인 부인도 비디오카메라로 일본 무도관을 찍으러 갔단다. 그 친구는 문화혁명의 혹독한 세례를 받은 세대라서, 그 세대 특유의 감정과 국가에 대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 세대는 80년대 중국이 가난했을 때, 유학으로 해외에 나온 사람들이다. 일본에서도 가난한 유학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세계를 펼쳐나간 사람들로 우수하고 패기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으로 완전히 사회주의적인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자본주의 사회인 일본 생활에 적응하는 데,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아사히신문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정치가들이 참배를 오고 있다는 곳을 향하고 있다. 나도 그냥 인사만 하려고 쫓아갔는 데, 키가 큰 그가 서둘러 가고 있어서 따라잡지 못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연락을 할 일도 없는 아는 사람을 8월 15일 야스쿠니에서 만나다니…
거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전화해도 전화를 안 받는다. 계속 미친 듯이 전화했다. 나중에 집에 와서 메일을 보고 오후에 간다는 걸 알았다. 내가 미친듯이 전화를 계속해서 그 사람은 내가 정말로 미친 사람인 줄 알고 정말 놀랐을 것이다. 미안하다,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내서... 또 한 군데 가려고 전화를 했더니 쉬는 날이란다. 내가 아는 재일동포가 하는 가게도 그 날 만은 쉰단다. 광복절이라서 쉬는 걸까?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명을 ‘지나’라고 쓴 것이다. 이건 전쟁 이후에는 쓰지 않는 명칭이다. 여기에 한국은 한국이라고 썼지만, 내가 받은 전단지에는 한국을 ‘조선, 남조선’이라고 했다. 중국을 ‘지나, 중공’이라고 표기했다. 일본은, 대일본제국이다. 대일본제국이다 그렇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중국이나, 한국, 대만 또한 자신들의 ‘식민지’ 정도인 것이다. 아무리 봐도 시대착오적이라는 걸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야스쿠니에서는 ‘시대착오’가 아닌 그 시대가 살아있다. 아니, 그 시대에 살고 싶은 것일까?
입구에 오니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그 날 거기에 온 사람이 17만 5천 명에서 20만 5천 명으로 과거 최대라고도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걸 본 적이 없다. 굉장하다.
그 날밤에 친구가 왔다. 야스쿠니가 참 인상적이었다고, 일본의 핵심을 본 것 같다는 감상을 말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중 가장 무서웠다고, 역에서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갔을 때, 이 사람들과는 말이 안 통하겠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야스쿠니에 있는 동안 너무 무서워서 정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날 느낀 것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가 있을 때, 따로 쓰리라. 아, 그 날 받아온 전단지도 며칠 뒤 공포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찬찬히 읽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 게 언어문제는 아니다. 내가 그래도 책 몇 권을 썼고, 쓸모없는 박사학위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전단지 내용은 통하는 사람들에게 만 통하는 것이다.
동경에 올 기회가 있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가보시길 권한다. 그야말로 일본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행동과 말을 조심하시길 바란다. 내가 말했듯이 거기는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말이 안 통한다. 말이 안 통한다는 건, 정말로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