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제주도 사람들

김석범선생님

huiya(kohui) 2018. 12. 23. 22:27

김석범선생님

재일 제주도 사람들 2012/05/26 13:28 huiya



오늘 동경은 오전이 아주 맑고 개인 좋은 날씨였다. 지금은 좀 흐려져있다. 

창밖에서는 환경미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잔디를 깍아대는 기계소리가 시끄럽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게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빨래를 하고 베게와 이불도 말렸다. 지난 주, 너무 추워서 겨울이불을 꺼내서 덥었다. 날씨도 3월말 날씨에서 뒷날은 7월 날씨로 뛰어넘는다. 일기예보를 보고 기온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이 따라가질 못한다. 그래서 학생들도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한 아이도 많고, 수업에도 지장이 있다. 요즘 학생들 체력이 약하다. 학생들 중에는 체력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먹는것도 시원치 못한 아이들이 꽤 있다. 체력이 없으면 사실 아무것도 못한다. 모든 것이 기본은 건강한 체력이다. 

지난 주 수요일 수업이 끝나서 아주 오랫만에 김석범선생님을 만났다. 친하게 지내는 영국친구와 같이 만났다. 선생님을 술을 좋아하시는 데 나는 술을 잘 못마신다. 그래서, 영국 술푸대를 데려간 거다. 김석범선생님을 안 것은 25년 쯤 된다. 가깝게 말을 하게 된지는 15년이다. 



김석범선생님이
 10여년에 걸쳐서 쓴 소설 화산도는 일본 순문학계에서 기록적인 장편이다. 400자 원고지로 13,000장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글은 한글 처럼 띄어쓰기가 없고 원고지 글자수도 두 배가 한장이여서
, 한국식으로 원고매수를 계산하면 도대체 몇 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김석범선생님이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실은 뭔가를 길게 쓴다는 공통점이였다. 사실, 재일동포 저명한 문화인과 유학생과는 거리가 있다. 같은 행사에 같은 회장에 있어도 도우미유학생으로 있는 것과 그 행사를 대표하는 입장은 아주 다른 것이였다. 내가 박사논문을 끝냈을 때, 논문 매수를 들은 ( 논문 내용이 아닌 ) 김석범선생님이 재일동포 제주도어른들을 불러서 축하모임을 열어주셨다. 그 자리에는 지금은 제주도출신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지는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문경수선생도 호출을 받아서 저 한 구석 말석에 자리를 잡을 정도였다. 중심에 계셨던 분은 김석범선생님과 삼천리라는 잡지를 만드셨던 올해 돌아가신 시인 이철선생님이다. 두 분은 일본 문화인들도 존경하는 재일동포 대표적인 지식인이기도 했다. 


내 논문은 
1년반 정도에 400 5,000장 이상을 썼다. 김석범선생님이 장편 그 것도 거대한 장편은 써보지 않은 사람을 그 게 얼마나 힘든건지 모른다면서, 나를 대단하다고 평가 해 주신 것이다. 선생님은 자신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자신이 쓴 것에 반쯤을 쓴 나를 대단하다고 했다. 자신은 상상력을 베이스로 한 픽션을 쓰지만, 나는 필드웍을 하고 자료에 근거해서 논문을 쓰는 거라, 길게 쓰는 게 더 어렵다고 한다. 나는 그 게 뭔지 전혀 모른다. 나는 많이 쓰고 빨리 쉽게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긴 것을 쓸 때는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전개될 모든 것과의 관련성 때문에 스피드를 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것과 별로 구애를 받지않고 그냥 쓴다. 그 건 결코 잘써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 처럼 잘 쓰는 것 보다, 마감날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일본사람들은 다른 건 잘 지키는 데 원고 마감날 만은 잘 안지킨다. 주위사람들은 문학부라서 문장에 관해 안목과 나름 일가견을 가진 비평가들이기도하다, 그리고 뭘 쓸까, 어떨게 쓸까, 쓰고 나서도 만족을 못해 고민에 고민을 한다. 시간이 아무리 있어도 모자란다. 아주 골치가 아프다. 그에 비해 나는 고민이 전혀 없다, 할 일이 많아서 어쨌든 빨리 끝내고 싶은게 우선이다. 어차피 내가 쓰는 건, 내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어서 의뢰가 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쓰면 된다는 것이다. 


김석범선생님이 쓰는 건 상상력의 세계이지만, 나는 발로 걸어다니며 현실을 읽어내는 세계이다. 선생님이 보기에는 그 게 아주 재미있는 모양이다. 내가 필드를 나갈 때도 가끔 같이 나갔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 훌딱 지나간다. 다른사람들이 보기에는 나를 딸처럼 귀여워한다고 하는데, 본인들은 전혀 그렇지않다. 나는 선생님 앞에서 선생님 일을 비판하고, 선생님은 그 걸 인정한다. 나이차는 있지만, 특정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거침없는 대화를 한다. 사실 거침없이 말을 할 수 있는 사이, 일을 하는 사람 중에는 아주 적다. 특히 일본에서는 아주 어렵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서 그런 대화를 나눌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 분야에 일인자이며 인간적으로도 젊은 사람의 오만방자함을 너그럽게 받아줄수 있는 사람이다. 


요 몇년 동안 선생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눌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이 아직 건강하고 소설을 쓰는 현역작가이기를 바랬다. 올해 한국나이로 90세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죽을 때까지 장편소설을 쓴다니까, 당분간은 현역작가일 것 이다. 오랫만에 만난 선생님은 얼굴도 몸도 약간 작아졌지만, 투쟁정신은 펄펄히 살아있다. 선생님이 소설을 쓰는 것은 '투쟁'이고, '투쟁하는 방법'인 것이다.

지금도 살아있고, 소설을 쓰는 한 투쟁의 연속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