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의 역사 , 문화적 배경- 2
어제에 이어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의 역사에 대해 소개한다. 제주도는 서울에서 먼 섬이라고 고립되어 폐쇄적이고 미개한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폐쇄적이지도 않고 미개하지도 않은 어쩌면 일찍부터 가장 교육이 보급된 지역이며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았다는 걸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나온 걸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제주도 유생의 비율을 보면 전국에서 압도적으로 높고 2번째로 높은 함경북도의 2배 이상 높다. 이런 경향은 재일 제주도인 생활사를 통해서도 검증할 수 있었다.
제1절 제주도의 문화적 배경
1) 유교의 영향-교육 보급과 교육관
제주도에서 본격적으로 유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향교가 설치된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제주도의 경우 지방으로서는 가장 빠른 시기(1392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향교는 고려시대에 등장(1127년)해서 조선시대에 전국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공적 교육기관이었다(10). 향교는 인재양성과 유교이념을 보급함으로써 사회체제를 확립할 목적으로 설치되었고, 지방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제주도에 향교가 매우 일찍 설치된 이유는 조선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의한 것으로 제주도를 중앙에 통합하려는 정책의 일환이고, 또 교화가 필요한 지역이라고 봤기 때문이다(11). 제주도에 향교가 설치되어 유생도 늘고 교육도 보급되어 갔다. 하지만, 제주도에 향교가 설치되었지만 제주도인이 한반도 지역 출신자와 똑같이 과거를 통해서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평등한 기회를 부여받은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주도인이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한반도로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리적 조건에 의한 제주도인의 기회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초시가 행해졌던 적도 있지만 제도로 정착되지는 않았다(12).
결과적으로 제주도 유생은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관계 진출의 등용문이었던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제주도 유생의 교육관이 변용을 가져왔다. 유생이 학문을 하는 가장 큰 목표는 과거를 보아 관계에 진출하는 것이었지만 그 기회 불평등으로 학문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된 것이다. 예를 들면 제주도인이 과거에 합격해도 관료가 되어 제주도를 떠나 중앙 관계에 진출하는 일은 대단히 적기에 과거에 합격했다는 명예를 얻는 것에 그쳤다. 그래서 제주도인 유생이 보는 과거는 관직을 얻는 입신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명예를 얻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제주도인의 학문은 실질적인 직업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명예라는 관념적인 가치를 부여받는데 그치고 제주도에서 중앙 관계로 진출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변질된 과거는 제주도인에게 한반도(국가)에 대한 귀속의식보다 오히려 제주도인이 속한 지역(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강화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주도 내부에서 과거에 합격했다는 명예 획득은 수많은 동족마을 단위의 경쟁과 더불어 내부의 발전(유교의 침투와 성숙)을 추진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인은 제주도에서 평가(명예)의 대상이 된다는 이유로 학문과 향교에 집착했다. 제주도인으로서 “향교에 출입하는 것이 특권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다른 지방과 달리 그들이 향직을 독점했다. 향직은 제주도의 경우 양반을 상징하는 중요한 것이었다”(13). 제주도 향직이 제주도인에 의해 독점되었던 것은 제주도의 지역성을 고려할 때 중요한 점이었다는 걸 지적해두자. 제주도의 지역성은 제주도인의 국가관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조선 각지의 유생 비율을 나타내는 <표 1-1>에 의하면 제주도는 일찍부터 한반도보다 교육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사시에 유생은 “어느 지방이나 유생 중에는 양반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유생수는 즉 당시의 양반 및 유생 수로 볼 수 있다”(14). 거기에 “양반 다음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유생은 유교 신자로서 경세제민을 임무로 하는 사람들이다. 유생의 전신에는 자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농공상을 막론하고 향교나 성균관에 들어가-중략-대부분은 양반 또는 유생의 자손이 유생이 된다”(15). 제주도에 유생이 많았던 배경으로 동족 부락을 들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생이 많은 지방에는 양반이 많고, 양반 유생이 많은 지방은 즉, 그 계급에 속하는 동족 부락이 많이 있다”(16). “전라남도에는 동족부락이 많은 군이 각처에 있으나 그중에서도 제주도 283이 특출하며”, 그 다음이 진주군 216, 안동군 183이었다(17). 참고로 진주군과 안동군은 한국에서 양반이 많았던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표1-1> 유생의 비율
도별 | 남성인구 | 유생 수 | 남성 중 유생 비율(%) |
경기도 | 934,307 | 15,204 | 1.6 |
충청북도 | 423,098 | 3,233 | 0.7 |
충청남도 | 628,965 | 6,210 | 1 |
전라북도 | 677,287 | 5,713 | 0.8 |
전라남도 | 958,033 | 23,473 | 2.4 |
경상북도 | 1,136,989 | 33,458 | 2.9 |
경상남도 | 956,827 | 11,399 | 1.2 |
황해도 | 706,282 | 31,291 | 4.4 |
평안북도 | 690,006 | 16,637 | 2.4 |
평안남도 | 607,893 | 16,618 | 2.7 |
강원도 | 677,187 | 21,102 | 3.1 |
함경북도 | 298,999 | 13,800 | 4.6 |
함경남도 | 677,461 | 20,372 | 3 |
제주도 | 93,660 | 9,036 | 9.6 |
합계 | 9,466,994 | 227,546 | 2.4(평균) |
1. 남성인구는 1925년 말 현재 朝鮮總督府 『朝鮮の人口現象』 1927年 113-4 페이지
2. 제주도는 주 1의 전라남도 인구에서 제주도 인구(주 1의 224페이지)를 빼고, 다시 남녀의 비율(주 1 144페이지)을 고려해서 계산했다.
3. 유생인구는 1928년 현재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 後編 同族部落』 514-5 페이지
거기에 “즉, 동족부락이 많은 읍면으로는-중략-전라남도 제주도 구우면(현재의 한림읍과 한경면)의 89”이고, 그 다음이 경상남도 진주읍 87,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53 순으로 제주도는 양반의 소규모 동족 부락이 많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18). 제주도의 동족 부락은 제주도적인 지연 결합과 관련된 걸로 볼 수 있다. 동족 부락을 양반이나 유생과 연관 지어 말하면 제주도는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 양반이 많았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을 토대로 보면 유생이 많다는 것은 결국 교육의 보급으로 볼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제주도의 경우 교육 보급의 정도가 대단히 높고 위에서 쓴 과거제도와 관련으로 보면 보급의 정도를 그대로 교육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기에 유보한다. 제주도의 교육 수준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중앙 정치범이 유배지였던 곳이므로 중앙에서 이루어진 학문을 바로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의 보급과 관련해서 한반도에서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에 계급(신분)이나 경제적인 격차 또한 현저했다. 결국 한반도에서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 한편, 한반도에 비해 제주도는 계급이나 경제적인 격차가 적은 지역이었다. “도민은 종래부터 남녀 모두가 근면하며 빈부차가 심하지 않고 생활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19). 제주도는 한반도에 비해 가난한 지역은 아니었던 것이다. 빈부차는 토지소유 상황에서도 그 차이를 볼 수 있지만 제주도의 경우 “순수하게 농업에만 종사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고, 소작농도 아주 적으며 농가 대부분은 자작농이었다”(20). 한반도에서는 대지주가 그 마을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마을 사람들이 소작농이었으므로 계급이나 빈부의 격차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에 비해 제주도의 경우 토지소유는 소규모이면서도 자작농(어업종사자도 많았지만)이 대부분이고, 계급이나 경제적으로도 격차가 적어서 교육 보급이 진전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제주도인의 교육관은 직업을 얻는 수단으로써 공부(또는 학력 취득)가 아닌, 교양(내면화 한 명예)을 얻고 높이는 수단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결국 제주도인에게 공부하는 것은 교양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고 한반도와 같이 고학력이 사회적, 경제적 지표로 볼 수는 없었다. 제주도인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를 보면 재일 제주도인의 앙케트 조사와 생활사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오는 일이 적지 않았던 걸 들 수 있다. 일본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행동은 '공부'한 결과 얻는 '학력'을 수단으로 한 입신출세가 목표는 아니었다. 오히려 '공부'할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제주도인의 '공부'에 대한 사고방식의 표출이며 삶의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주도인은 생활을 위해서 '공부'한다기보다 인간으로서 교양을 몸에 익히는 것에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했다. 여기에는 다분히 제주도인의 교육관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교육관을 가진 제주도인은 '공부'하는 것이 교양이기 때문에 특히 고학력 지향이지도 않고 한반도에 비해 학력이 높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크게 존경받는 일도 그다지 없다.
먼저 쓴 제주도의 교육(그 내용은 유교) 보급은 제주도인의 생활양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21). 그 예로서 관혼상제의 기본자세에 유교의 영향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상제에 관해서는 유교적 정신이 계승되어 현재에도 매우 엄밀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의 유교는 한반도로부터 받아들여 보급된 것이지만 국가관(제주도인의 국가관을 참조) 및 정치관에 관해서는 변용된 것으로 추측한다. 결국 한반도의 유교와 제주도의 유교는 동질이 아닐 수가 있다. 그로 인해 한반도에서 볼 때 제주도는 “유교적 양반문화가 희박하거나 결여”된 지역으로 비쳐왔다(22). 여기에서 “유교적 양반문화”는 한반도 유생의 비율과 같이 권력이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일부 양반에게 독점되어 일원화되었던 것을 가리키며, 한국에 있어서 문화적 상위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는 일부 권력층을 정점으로 신분적인 계급의 구별(종적 관계)이나 남존여비가 명확하고 이를 무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였다. 그에 비해 제주도는 빈부차가 그다지 없고 교육 보급도 진전된 지역이며 남녀가 평등에 가깝고 다원적으로 완만한 횡적 사회였다. 예를 들면 한반도에서는 양반과 이에 준하는 계층에서만 받을 수 있던 교육이 제주도에서 널리 보급된 걸 볼 때 제주도가 “유교적 양반문화”가 희박했다고 볼 수가 없다. 제주도는 한반도에서 받아들인 유교문화가 생활양식의 일부가 되어 오늘날에도 그 영향이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그 증거로 재일 제주도인의 제사가 재일 조선/한국인 중에서도 가장 잘 지켜지고 있는 걸 들 수 있다.
각주
10-11) 양진건 전게서 191-193페이지
12) 양진건 ‘제주도와 오키나와의 전통교육 비교’ 탐라문화 제11호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1b 98-99페이지
13) 양진건 전게서 a 203페이지
14) 善生永助『耽羅の聚落』後編 朝鮮總督府 1935年a 660페이지
15) 善生永助『朝鮮の人口現象』朝鮮總督府 1927年b 96페이지
16) 善生전게서 a 666페이지
17-18) 善生전게서 a 511페이지
19) 朝鮮總督府『生活状態調査(其の二)濟州道』1929年 148페이지
20) 朝鮮總督府 전게서 83페이지
21) 加地伸行『儒教とは何か』中公新書989 中央公論社 1993年에서 보면 한반도와 제주도의 유교는 가깝다. 매우 가까운 부분에서는 관혼상제에서 혼장제, 특히 장제이다. 그에 따르면 제주도에서는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적 장제 방식이 엄밀히 지켜지고 있다. 거기에 샤머니즘과 유교가 동시에 볼 수 있는 장례식은 유교가 확립하기 이전의 원유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22) 최재석 ‘제주도의 친족 조직’ 1984년 일지사 1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