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 반찬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 34도라고 한다. 오전에는 35도라고 했다가 오후에 수정되었다. 내일은 최고기온 36도, 최저기온 27도라고 나온다. 열대야가 되겠다. 실은 어제도 최고기온 34도로 찜통더위였다.
오늘 일을 보지 않으면 다음 주는 8월이 되기 때문에 오늘, 덥기 전인 아침나절에 볼 일을 봐야 한다. 병원에 가서 병원비를 지불하고 돈을 뽑아 세금을 내는 일이다.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도보로 병원에 가서 청구서가 온 걸 지불하고 바로 마트를 향했다. 돈은 병원 ATM에서 뽑았다. 마트에 가는 길에 편의점이 있어서 거기서 내면 된다.
집에서 병원까지 가는 길은 숲이 많아서 나무 그늘을 따라 걸으면 아침나절은 선선하다. 병원에서 마트에 가는 길은 뙤약볕을 맞으며 걷는 주택가다. 마트에 간 것은 깻잎을 사기 위해서다. 어제 깻잎을 처음 보고 싱싱한 걸 다 샀다. 아침에 깻잎을 절이려고 양념을 만들었는데 깻잎보다 양념이 몇 배나 많다. 요즘은 일본에서도 한국 식자재를 구하기 쉽다지만 나처럼 한국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 사는 입장에서 보면 일본 마트에서 깻잎을 보는 건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어제도 깻잎을 보고 꿈인가 생시인가 하고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 아침에 가면 어제 팔리지 않고 남은 시든 깻잎이 싸게 나왔을 수도 있고 새로 신선한 깻잎이 입하될 가능성도 있다. 중요한 것은 깻잎도 깻잎이지만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집에 돌아와야 한다. 아니면 길에서 쓰러지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마트 가까이에 있던 편의점은 폐점해서 새금을 낼 수가 없었다. 다른 집에서 가까운 편의점은 도보 10분 이상 걸린다. 날씨가 이렇게 더우면 언제 편의점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트에 갔더니 어제 남은 시들고 상하기 시작한 깻잎이 2 봉지 남았다. 그런 깻잎이라도 우선 확보하고 새로 들어오는 걸 보려고 과일과 야채가 있는 곳을 어슬렁 거리면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작은 수박 2개와 큰 멜론도 1개 집어넣고 30분 이상 기다려도 물건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마트는 근방에서 가장 크고 손님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점원에게 물어봤다. 어제도 와서 샀는데 오늘 날씨가 더우니까, 빨리 사서 가려고 아침에 왔다. 몇 시에 물건이 진열되느냐고 했더니 보통 11시까지 온다고 한다. 11시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래도 기다린다고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10시 20분에 점원이 오늘 깻잎이 40 봉지 들어왔는데 진열하려면 몇 시가 될지 모른다고 알려준다. 그 넓은 마트에 물건을 진열하는 점원이 2명뿐이라서 어쩔 수 없단다. 내용을 알려주는 건 고맙지만 날씨가 뜨거워지는데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어떡할까, 깻잎을 포기하고 가야 하나 했다. 그런 내가 안되어 보였는지 점원이 와서 몇 개나 사느냐고 한다. 상태를 보고 5 봉지나 10 봉지나 산다고 했다. 이건 보통 일본 사람들이 절대로 사는 개수가 아니다. 점원이 나를 위해서 가져오겠다고 하지만 고르면 성에 차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고맙다고, 넉넉하게 가져오라고 했다.
점원이 가져온 건 15 봉지였다. 깻잎이 든 양도 봉지에 따라 들쑥날쑥, 깻잎도 어린것도 있고 줄기째로 이미 센 것도 있었지만 그저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아까, 확보한 시들고 상하기 시작한 2 봉지는 놓고 싱싱한 걸로 10 봉지를 샀다. 바로 계산하는 곳으로 가서 계산을 하고 나왔다. 오늘은 깻잎을 사러 갔기에 다른 걸 살 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너무 많아서 과일을 보다 보니 좀 사고 말았다. 평소에는 배낭을 메고 다니는데 링거 맞았던 자리에 배낭 메는 곳이 맞닿아서 상처가 난다. 그래서 손에 드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짐을 나눠서라도 충분히 들 수 있는 양과 무게였다. 하지만, 최고기온 35도를 향하는 오전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걸 오늘 절실히 알았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덥기에 선글라스를 꼈다. 거기에 KF94 마스크를 꼈다. 양산을 쓰지 않으면 녹아내린다. 짐을 한 손에 들 수밖에 없고 땀이 흐르기에 땀을 닦는 타월 손수건도 들어야 한다. 이런 조건만으로도 평소와 비교할 수 없는 핸디캡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마트에서 집에 오면서 그렇게 길에서 자주 쉰 적이 없을 정도로 자주 쉬면서 겨우 집에 왔다. 집에 와서 현관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쨌든 선선한 집안으로 왔으니 길에서 쓰러지는 불상사는 모면했다.
깻잎 반찬을 목숨 걸고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다. 날씨가 너무 더운 것이 문제다. 아침에 집을 나선 것이 9시 전이다. 집에 도착한 건 11시가 넘어서다. 날씨는 내가 사는 주변, 숲이 많은 곳은 아직 그렇게 덥지 않아서 충분히 걸을 수가 있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양산을 쓰고 나무 그늘이 없는 길을 걷는 건 위험하다.
이제는 깻잎을 잘 씻어서 손질하고 깻잎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 어제 산 것부터 차례로 한 장 한 장 양념하면서 깻잎을 절였다. 오전에 너무 힘들어서 현관에 쓰러졌다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가를 반복해서 정신이 없었다. 오전에 너무 무리했다. 그래도 이미 산 깻잎을 빨리 반찬을 만들지 않으면 바로 상할 것 같다. 집에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 암막커튼을 쳐서 어두운 부엌 낮은 싱크대에 기대 가면서 일을 했다. 깻잎이 아까워서 평생 먹을 생각도 못했던 줄기와 대까지 다 양념을 하기로 했다. 마지막에는 양념이 모자라서 남은 깻잎은 장아찌를 만들었다. 장아찌 레시피를 검색했더니 너무 간단하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깻잎과 사투를 벌이면서 반찬을 만든 것은 나만 먹으려는 건 아니다. 다음 주에 온다는 친구에게도 주고 암에 걸렸다는 편집자를 만날 일이 있으면 나눌 생각이다. 하지만, 깻잎만 15 봉지, 16,200원 정도 걸렸지만 양이 정말로 적다. 양념 값이 훨씬 더 든 것 같다. 거기에 일본에는 깻잎과 비슷한 향이 나는 오오바라는 허브가 있다. 이건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친구가 오오바를 좋아하는지, 깻잎을 좋아하는지 실은 모른다는 건 함정이다.
오늘은 날씨가 일찍 더웠는데 오후가 되어 바람이 분다. 저녁이 되니 다른 날보다 바람이 불어서 좀 선선함을 느꼈다. 하지만, 더운 날씨로 너무 피곤한 나는 녹초가 되어 다른 일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저녁을 먹고 난 다음이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대장정을 하게 된 깻잎은 한국에서 사는 것과 향이 좀 달랐다. 향이 약하다. 노지에서 재배하지 않는 걸로 보인다. 어쩌면 종류가 살짝 다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깻잎을 보고 눈이 돌아간 나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만든 깻잎 반찬이 맛이 없으면 큰 일이다. 깻잎 줄기까지 양념한 것은 실패인 것 같다. 사람이 너무 뭔가에 결핍하다 보면 이런 실패도 하는 모양이다. 마지막 문제는 냉장고에 깻잎 반찬을 넣을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