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부관계의 변화 2
오늘 동경은 맑고 바람도 약간 부는 날씨였다. 날씨가 좋은 주말에는 할 일이 많다.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로 몸을 풀고 욕조에 남은 물로 겨울옷 손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색상과 소재별로 분류해서 빨았다. 다운은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베스트 두 장에 코트 한 장을 빨아서 널었다. 다운은 말리면서도 부풀게 하는 손질이 필요한 옷이다. 겨울에 썼던 머플러도 몰아서 빨아 널었다.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얍은 코트도 두 장 빨아서 널었다. 오늘 빨래한 옷은 다 손질해서 벽장에 넣었다. 겨울에 입지 않았던 옷도 바람을 쐬고 솔질을 해서 벽장에 걸었다. 겨울이불도 바람을 쐬어서 정리했다. 오후에는 청소도 했으니 일을 꽤 많이 한 날이다.
어제 올린 글에서는 일본에서 미디어를 통해서 바라본 고부관계의 흐름의 변화다. 참고로 내가 주변에서 관찰한 것을 소개하는 내용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일본, 동경에서 '중산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중산층'에서 '상'이나 그 위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통'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의식일 뿐 객관적으로 분류하면 '중산층'에서 상위 그룹에 속한다. 지난 글이 어머니 입장을 썼다면, 이번에는 '균등 법' 세대 '딸'의 입장에서 쓰기로 한다.
일본에서 '남녀 고용 기회균등법'이 생겼지만, 사회 주류의 생각은 여자는 4년제 대학은 가지 말고 2년제 단기대학을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결혼을 위해 '전업주부'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여자가 4년제 대학에 가면 쓸데없이 건방져지기 때문에 사회생활이나, 결혼생활에 지장을 준다는 인식이 있었다. 남녀가 동등하다는 생각은 있을 수가 없었다. 여성의 교육은 어디까지나, 결혼해서 좋은 마누라에 어머니가 되기 위한 '교양'을 쌓는 정도가 좋다는 인식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착실히 여성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이 늘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86년부터 '균등 법'이 시행되는 해라서 여성들도 괜히 들떠 있었다. 그렇다고 대학생들이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대학생이라서 사회에 대해 모른다는 말이 적당하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는 90년, 실질적으로는 88년부터 89년 봄쯤에 취직을 내정한다. '버블경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이라,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경기가 좋다고 했던 시기였다. 내 전공 '사회학'은 문학부에서도 여학생이 적은 학과로 40 명 중에 10 명만 여학생이고 나머지는 남학생이었다. 여학생은 4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대부분 남학생은 5년, 일부는 6년 걸려서 대학을 졸업했다. 여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왔다는 인식이었다. 남학생들은 동경대학에 떨어져서 왔다든지 해서 대학에 집중하지 않아 단위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는 확연히 달랐다.
여자 동창생은 '종합직'으로 '대기업'에 취직해서 일을 하면서 회사가 '종합직' 여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없었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단지, '종합직'으로 여성도 조금 뽑은 것뿐이었다. 남성들 세계에 여성이 들어간 셈이다. 일본에는 일하는 여성들이 많다. '균등법'이 생기기 전에는 여성은 남성처럼 승진할 수가 없는 '일반직'이었다. '균등법'이 생긴 후에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일반직'으로 극히 일부 고학력 여성들만 '종합직'으로 취직했다. '종합직'으로 들어간 여성들은 남성들 세계에서 치일 뿐 아니라, 대다수 '일반직' 여성에게도 치이는 참 고달픈 입장에 처해진다. 그래서 3년 정도 일하면 '종합직' 여성이지만 자신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다. 주로 자신보다 늦게 들어온 능력도 부족한 남성 후배가 자신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걸 보게 된다. 3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종합직' 여성이 말 그대로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 결과,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니면 그전에 건강이 악화되어 회사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 하는 말이 여성에게 '일과 결혼' 어느 걸 택하느냐고 했다. 여성은 일을 하려면 결혼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남성은 일을 하기 위해서 결혼해야 한다고 했다.
내 동창생들은 회사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결혼하기 시작했다. 동창생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평생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결혼을 앞두고 회사를 퇴직해서 결혼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중 한 친구가 하는 말이 '회사는 내가 없어도 되지만, 가족에게는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라고 했다. 동창생들이 결혼한 상대는 거진 같은 대학에서 만난 동아리 선배 등이다. 동등한, 내가 보기에는 동창생들이 더 우수했다. 동창생은 여성이라서 결혼해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남편들은 승승장구 승진해 간다. 우수한 '딸'을 가진 어머니는 '균등법'이 생겨서 여성들이 사회진출을 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며 살아갈 것을 기대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사회에서 활약해 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실제로 사회는 여성들이 활약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균등법' 세대의 고학력 여성들은 '종합직'으로 취직했지만, 결혼한다는 명분으로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동창생들을 보면 꼭 평생 일을 하겠다거나, 결혼해야 된다는 생각이 뚜렷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수한 여성들이 갈 수 있는 곳에 가서 봤는데, 일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동창생들이 여건이 된다면 일을 계속하면서 결혼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균등법' 세대 '딸'들은 어머니의 응원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좌절'했다. 결혼해서 '전업주부'가 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실은 자신이 일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중도에 포기했다는 '죄책감'이 있다. '죄책감'은 자신과 가족과 사회에서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다. 동창생들의 잘못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균등법' 세대 '딸'들이 가졌던 딜레마다.
'딸'들의 '좌절'은 사회나 회사에 책임이 있다기보다, 마치 '딸', 여성의 능력 부족인 것 마냥 취급되었다. 옆에서 지켜본 내 눈에는 사회나 회사의 책임이지, '딸'인 여성의 책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능력이 부족한 남성은 회사에서 공들여 키우면서 여성들에게는 공을 들이지 않았다. 여성들을 키우지 않은 것이다.
동창생에게 들으면 거의 '시집', 특히 '시어머니'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동창생들이 결혼해서 사는 것은 친정과 가까운 곳이었다. 집을 살 때 친정에서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친정 가까이에 살면서 육아에 도움을 받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시집'은 멀리 있어서 왕래를 자주 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중에는 친정어머니보다 시어머니와 가까워서 같이 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집'은 남편의 가족이지, 동창생의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항상, 심리적이나 물리적 '거리'가 있어서 고부간의 '갈등'이 생길 정도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동창생들을 보면 독립적으로 살기 때문에 '시집'을 의식하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아마, '시집'에서도 자기네 '아들'과 동등한 며느리에 대해 '시집살이'를 요구하거나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시집에서 같이 살던 친구는 남편이 격무에 시달리다가 일찍 죽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아들/남편을 잡아먹었다"라고 해서 난리가 났단다. 이 말은 일본에서도 시집에서 며느리에게 하는 단골 멘트인 모양이다. 이 친구 '딸'은 친구가 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결혼해서 남편이 죽고 난 후 고생하는 걸 보고 자기는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친구는 국립대학(공부를 잘했다는 의미)을 나왔는데, 교원자격증이 있어서 지금은 보조교사로 일하고 있다. 교원자격증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한다. 아마,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그냥 '전업주부'로 살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남편은 일을 하느라고 거의 집에 없다시피 하니까, 친구가 아이를 둘 키우고 집안을 건사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능력 있는 여성들이 '전업주부'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전업주부'로 사는 것이 꼭 편한 것만도 아니다. 일본에서는 가사와 아이들의 양육 등 집에 대한 일체를 도맡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