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진 냉장고
2013/09/04 채워진 냉장고
오늘 동경은 아침에 비가 와서 좀 서늘한 날씨였다. 서늘한 것이 갑자기 가을이 확 온 느낌이었다. 어제도 최고기온이 34도였으니 오늘은 최고기온이 30도로 아주 선선한 날씨다. 올해 여름에 내가 체득한 것이 있다면, 기온을 1도 단위로 체감한다는 것이다. 30도 이상에서 정확히 1도의 차이를 느끼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은 나를 땀 흘리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온도계로 변신시켰다. 내가 비록 옷을 개구리색으로 입어서 개구리가 된 기분으로 변신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지만, 온도계로 변신할 줄은 몰랐다. 개구리는 나름 웃기기라도 하지, 온도계는 솔직히 재미가 없다. 이런 걸 팔자라고 하나, 아니면 운명… 팔자나 운명이라는 단어도 써 본 적이 없는 데…
밤이 되어 바람이 불고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오는 낌세가 아무래도 그냥 비가 아니라, 작은 태풍이 지나가는 것 같다… 태풍인가?
어제는 맑은 하늘에 더운 날씨였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신오쿠보에 나갔다.
내 책 작업하고 있는 출판사의 편집자와 만나기로 한 거다. 현재는 편집을 배우는 입장이다. 그리고 NPO 활동도 하고 있다. 전철을 타려고 역에 갔더니, 가까운 역에서 사람이 선로에 들어갔다고 전철이 늦어진단다. 내가 줄을 서있는 곳에서도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선로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만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사람들 시선을 끈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쳐다본다. 금방 전철이 올 텐데 눈앞에서 사고가 나는 꼴을 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다. 근데, 그 사람은 그냥 사람들 시선을 끄는 게 목적이었는지, 그러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경에서 자살이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일상적이다. 눈앞에서 선로에 뛰어내리려고 깐죽대는 멀쩡한 사람을 보니 화가 났다. 정말로 사고라도 나면, 큰 일인데, 많은 사람에게 불편을 줄텐데… 요새 전철을 타면 웃기는 일이 많다. 대낮부터 멀쩡한 젊은이가 술을 마시고 떠든다던지, 전철을 기다리는 데 줄도 제대로 안 서고 안전선도 지키지 않고 서있는 사람들, 전철이 달리는 데 바로 그 옆을 걸으려는 사람들… 안내방송으로 주의해도 안 듣는다. 기가 막히다. 내가 아는 동경이 아니다.
어제는 둘이서 신오쿠보역에서 만났다. 그리고 식료품을 사서 잘 가는 식당에 갔다. 평일날 오후라서 손님이 많지 않았다. 둘이서 순대국밥을 시켰다. 편집자가 연변에 유학했던 경험이 있다. 연변에 있을 때 시장에 가서 순대국밥을 사 먹었단다. 그 당시에 5위안이었다면서, 나는 순대국밥을 처음 먹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순대를 그다지 먹은 적이 없었다. 근래에 와서 순대를 먹는다. 내가 가는 집에서 만든 것 만 먹지만, 그래도 먹는다. 이상하다, 식성이 변하는 건가… 어제 처음으로 순대국밥에 새우젓과 다진 양념으로 양념을 해서 먹었다. 그리고 둘이서 거의 네 시간이나 떠들었다. 이런저런 말을 하고 내가 요즘 완성한 뜨개질을 가져가서 보여줬다. NPO에서 한국어교실을 하는 데, 선생이라, 교과서를 가져와서 나에게 물어본다. 갑작스러워서 별로 말을 못 해줬다..
시내에 나가면서 생각을 해보니, 특별한 용건이 없이 그냥 사람을 만나는 게, 정말로 오랜만이다.
내가 거의 사람을 안 만나니까… 그 전에는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났다. 바쁘기도 엄청 바쁘고… 그렇게 살기가 싫어서 사람들과 연락도 안 하고 만나지도 않는다. 식당에서 나온 게 밤 10시 반이 넘었다. 신주쿠까지 걸어가서 약국에 들러서 정노환을 세병 샀다. 시간이 늦어서 약국들이 문을 거의 닫았는 데, 다행히 열려있는 곳이 있었다. 역에 도착하니 11시다. 둘이 6시 40분에 만났으니 오랜 시간 떠든 거다. 그런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죽이 잘 맞는 사람과 수다를 떨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는 사람 낯을 가리는 편이라, 오래 알고 지내도 거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죽이 잘 맞으면 금방 가까워진다. 편집자는 말하기가 편하고, 내가 하는 걸 재미있어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쓴 걸 읽은 사람이고, 내 강의도 들었고, 뜨개질도 재미있어한다. 그렇게 알아주고 재미있어해주는 사람 만나기도 드물다.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가까웠다. 나갈 때는 시장을 보려고 야심 차게 시장바구니를 둘이나 가지고 나갔는 데…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좀 보고 하다 보니 금방 2시가 가까워온다. 빨리 자야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선선하다. 기분이 매우 좋다. 냉장고에 먹을 게 없어도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래도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내다가, 마지막 남은 인스턴트면을 삶아서 샐러드면을 만들어서 먹었다.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산책에 나섰다.
단지 안 길가에 남자아이와 엄마가 길바닥에 죽은 벌레를 뒤집어 보고 있다. 내가 말을 걸었더니, 가까운 대학에서 일하는 영어선생이란다. 같은 단지에 사는 서양인 외모의 외국인들은 거진 그렇다. 뉴질랜드에서 왔단다. 아이가 있어서 남편도 같이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혼을 했단다. 아, 미안하다. 괜찮아요. 그러면 혼자서 애를 보고 일도 하겠네. 예. 그러면, 내가 일을 안 나갈 때는 애를 맡겨놔도 되니까, 필요할 때는 말하세요. 저는, 몇 동 몇 호에 살아요. 그리고 헤어졌다.
산책을 다녀와서 마트에 갔다. 냉장고가 너무 허전해서 채우려고… 올해는 결국 수박을 한 번도 못 사고 지나갈 것 같다… 눈물 날 것 같다. 어휴, 수박도 못 사는 내 신세라니… 그동안 너무 더워서 3일이나, 4일에 한번 마트에 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냥, 연명할 정도로 먹으면 되는 거지… 못 먹어도, 운동을 안 해서 뱃살이 늘면 늘었지, 절대로 줄지 않았다. 슬프게도 아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마트에 가서 양쪽 팔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사 왔다. 요거트가 8통, 배도 다섯 개, 계란 열개, 닭 한 마리에 다리만 세 개 추가로 졸지에 다리가 다섯 개 달린 닭이 되었다. 양파도 사고, 과자도 좀 샀는 데, 야채가 부족하다. 그래도 아주 무거웠다. 닭에 생강과 다시마를 넣고 삶으면서 배를 깎아먹고, 콩가루로 만든 사탕을 먹었다. 처음 샀는 데, 엿같은 맛이 난다. 오늘 저녁을 배와 콩가루 사탕으로 때우면, 내일부터 닭을 먹을 수 있다. 삶은 닭을 그냥 먹기도 하고, 야채와 같이 샐러드를 만들어 먹고, 수프를 먹으면 한참을 먹을 거다. 채워진 냉장고 사진을 찍었다. 삶아지기 시작한 닭도 기념촬영을 했다. 냉동고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