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난 뒤
2012/10/01 태풍이 지난 뒤
오늘 동경은 아주 쾌청하게 맑은 날씨였다.
어제저녁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밤에는 태풍이 지난다고 몇 시간이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참 긴시간였던 걸 보면 큰 태풍이었나 보다.
덕분에 오늘 아침은 아주 맑아서 거의 구름도 없었다. 그러나 햇살이 따가워서 외출하는 걸 포기했다. 어제 논문이 끝나서 멍한 상태이다. 사람이 껍질만 남았다. 영혼도 정신도 다 어디론가 갔다. 나에게 아직도 뭔가 남아있는지, 뭔가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텅 빈 상태이다. 태풍도 지나갔고, 날씨도 좋다. 오랜만에 창문을 닦고, 커텐을 빨고 유리가 붙은 곳은 다 닦았다. 하늘도 새파랗게 맑고 집안도 맑아진 느낌이다. 베란다에 떨어진 나뭇잎도 쓸어냈다.
내가 이 번에 썼던 논문을 쓸 때는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반쯤은 뭔가 씌운 상태가 된다. 그래서 눈물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몸도 아파온다. 그걸 지나면 나른해진다. 정신은 그곳으로 쏠려 있어서 다른 걸 제대로 못한다. 정상적으로 학교에서 강의를 하려면 빨리 끝내야지, 강의를 제대로 못한다. 학생들이 무슨 죄냐, 정상이어도 좋은 강의가 될까 말까 한데… 다행이다. 논문이 끝나서. 내가 논문을 쓸 때는, 내 논문을 가장 먼저 읽는 사람을 향해서 쓴다. 후배, 편집자 다. 이번에는 편집자가 되는 셈이다. 독자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쓰는 것에 관해 편집자와 제대로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내 분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을 못 한다고도 하는데, 나는 편집자와 대화를 하면서 좀 더 좋은 걸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제는 기대를 안 한다.
대청소를 해서 집안 공기를 바꾸고 강의 준비에 들어간다. 아직 강의가 틀이 안 잡혔다. 새로운 과목에 영상자료를 쓰는 경우는 더 그렇다. 이것도 빨리 제자리로 와야 하는데…
사람이 어딘가를 향할 때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거기서 나올 때도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엽서를 써서 보냈다. 이 친구와는 몇 년 가끔 문자나 엽서를 주고받지만, 만나지 않는다. 지금은 그 정도 거리가 좋은 것 같다. 고마바 엄마에게도 엽서를 쓰려다가 전화가 좋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같이 놀러 갈 학생에게는 이메일을 보냈다. 논문이 끝났어, 시간 맞춰서 놀러 가자고. 밖에 나가면서 쓰레기를 버리고, 우체통에 엽서를 넣고 일찌감치 산책을 시작했다. 어떤 아줌마가 나이 먹은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한다. 요 동네에서 드문 스타일로 머리를 단정하게 세트를 한 데다가 화장을 곱게 하고 큼지막한 이어링도 했다. 강아지도 옷을 멋지게 입고 머리도 미장원에서 했다. 이건 시내에 외출하는 스타일이지 산책 스타일이 아니다. 아줌마 신발도 산책에 어울리지 않게 힐이 있는 것이다. 아줌마가 말하길 강아지가 10살인데 아프단다. 그런데 아줌마가 하는 말도 잘 못 알아듣겠다. 어쩌면 아줌마도 아픈지 모르겠다.
어젯밤에 보름달을 못 봤지만, 오늘도 달은 뜰 것이다. 오랜만에 하는 산책이라, 짧은 코스를 택했다. 달이 떠오른 건, 산책이 끝나서 돌아오는 길이였다. 달이 특별히 밝고 크다. 확대경이나, 내가 달에 다가가서 보는 느낌이었다. 집에 와도 달빛 만으로도 방 안이 환할 정도였다. 오늘 유리창을 닦아서 달빛도 잘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니, 달은 더 높이 올라갔다. 그냥 평범한 달이 되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