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5 태풍이 지날 무렵
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흐리고 비가 온다. 27호 태풍이 온다나…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지난번에 왔던 26호 태풍피해가 컸다. 단지 태풍피해가 큰 게 아니라, 좀 슬프다. 내가 가려고 했던 섬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그 섬에 옛날 해녀를 했던 제주도 할머니가 살고 계시다. 다른 할머니도 계시다. 내가 잠깐 만난 두 할머니는 너무나 달랐다. 천사와 악마 정도로 달랐다. 그러나, 두 분 다 제주도 할머니로 옛날에 해녀를 하면서 살았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이번 태풍도 그 섬을 거쳐가는 모양이다. 뉴스에 의하면 일찌감치 피난 지시가 내렸단다. 지난 번에 피난 지시를 내지 않아서 피해가 커졌다고 한다.
이번 주는 학교가 축제기간이라, 오늘은 쉬는 날이다. 쉬는 날이어도 날씨가 나빠서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안 든다. 내가 좋아하는 빨래도 못한다. 오전에 비가 오는 데, 역 근처 마트에 다녀왔다. 과일이 부족해서 좀 사려고 갔다. 요새 태풍 때문에 물류사정이 나쁘다. 그래서 신선한 야채도 적고 가격이 비싸다. 과일도 아주 비싸다. 포도가 많이 나와 있는 데, 가격이 엄청 비싸다. 별로 맛있게 보이지도 않는 비싼 포도를 째려 봐줬다. 포도도 나의 시선을 충분히 의식을 했으리라. 그리고 계란을 한 줄 사고, 부엌세제와 고구마를 네 개 사 왔다. 살 게 없었다. 실은 냉장고에 야채들이 좀 있다. 오늘 아침에 새삼스럽게 생각을 해보니, 가을철 과일을 못 먹은 것 같아 일부러 갔는 데, 타이밍이 나빴나 보다. 요새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은 주로 찐 고구마다.
오늘도 마트에 갔다 와서 고구마를 쪘다. 요새 고구마를 찔 때, 당근도 고구마와 같은 크기로 썰어서 찐다. 점심에는 계란도 같이 쪄서 먹었다. 고구마만 먹으면 목이 메는 데, 당근과 같이 먹으면 목이 메이지 않아서 좋다. 찐 고구마를 먹을 때, 김치가 없어서 오이피클을 같이 먹는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다. 어제는 오후에 수업을 하면서 안팎의 기온차로 인해 유리창이 점점 흐려져 가는 것을 보면서 의아해했다. 아니 지금이 언제라고 벌써… 교실에는 학생들이 있어서 따뜻하다. 바깥은 벌써 추워졌다. 어제, 여성학 수업에 가수로 데뷔한 학생이 수업에 나왔다. 지난번 왔을 때, 사정을 말하면서 결석이 많을지도 모른다고 양해를 구했다. 노동학도 들었던 학생이고, 개인적인 말도 했던 학생이다. 결석을 할 때는 이유서를 내고, 학교에서 정해진 이상은 내가 고려할 수가 없다는 걸 전했다. 어제 낸 결석 이유서는 미비한 점이 있었다. 웃으면서 증빙할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점심시간에 시민대학에 등록해서 여성학 강의를 듣는 학생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아마, 칠십 대에 가까운 여자분이다. 맨 앞에 앉아서 가장 열심히 강의를 듣는 학생이다. 오랜만에 스파게티를 먹고 큰 머그잔으로 카페라테를 마셨다. 내가 커피를 샀더니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우개 세트를 준다. 아주 예쁘게 생긴 동경 스카이트리 모형이다. 지난번에는 손에 끼워서 종이를 넘기기 쉽게 하는 걸 세트로 받아서 주위에 나눠줬다. 그것도 아주 예쁜 색이었다. 일본에는 문구가 아주 예쁘고 실용적인 것이 많다. 이제는 사지 않으려고 관심을 끊었지만, 문구는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도 아기자기한 실용적이면서도 예쁜 것이 많아서 가격 대비 만족감이 크다. 나에게는 매우 유혹적이다. 위험하다. 다시는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말고 가끔 슬쩍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족하다. 필요한 것만 사는 쪽으로 사상을 개조했다.
어제저녁에 돌아오니 춥다. 추울 때는 국물을 먹어야지. 닭날개를 사다 논 것이 있어서 그 걸로 국물을 만들었다. 생강을 넣고, 다시마도 넣어서 오래 끓였다. 충분히 국물이 우려 져 나왔을 때, 샐러리를 조금, 배추를 많이 넣고 약한 불로 오래 끓였다. 오늘 아침에는 거기에다 싱싱한 당근을 하나 썰어서 끓였다. 아침에 따뜻한 국물을 먹으니 썩 괜찮은 음식을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마트에 나갔던 것이다.
요새 기분이 좀 센티하다. 호주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예년에 비해 상당히 이른 시기다. 페북에 올라오는 소식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다. 거기서 열심히 활약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답답하다. 그리고 동경에서 가까운 곳에서 태풍 피해가 있었다. 그 영향으로 요즘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어 있다. 사회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다. 아무리 올림픽이 어쩌고, 경기가 좋다고 떠들어도 사람들이 실감하는 경기는 나쁘다. 매스컴에서 하는 말과 나의 생활 실체가 다르니 내가 나쁜 것 같다. 날씨도 변화가 급격해서 몸이 따라가질 못한다. 감기에 걸린 사람도 많다. 의욕이 저하되어 지쳐간다. 괜히 짜증이 난다. 그런 와중에 태풍이 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학생들의 축제기간이어도 들뜬 기분이 전해져 오질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앞뒤 생각 없이 그냥 즐겨도 되는 게 아닌 것이다. 요즘 분위기가 그렇다. 괜히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비가 오고 추운 오후에 기분이 좀 밝아지라고 향기로운 홍차에 꿀을 타서 마셨다. 가끔 마시는 홍차는 향기가 강한 것이 좋다. 특히 비가 올 때는 향기가 강한 것이 기분을 좋게 해 준다. 얼그레이를 몇 잔인가 마시면서 심심한 드라마를 보며 뜨개질을 했다. 몸은 여기 있는 데, 마음이 여기에 없다. 내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나도 알 길이 없다.
내일은 고마바 엄마네 집에 간다. 엄마네 집에 가서 몸과 마음의 영양을 보충해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