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5 왕자님 포스 베스트?
오늘 동경 날씨는 아침부터 쭉 흐리다.
아까 잠시 잠깐 햇살이 비칠 만하더니, 구름이 많다. 이런 날은 전형적인 겨울 날씨다. 기온이 낮지 않아도 흐리면 은근히 춥다. 기온이 낮아도 날씨가 맑아서 햇살이 비치면 따뜻하다. 여름에는 끔찍하던 햇살도 가을에 접어들며 황홀하게 소중해지고, 겨울에는 어쨌든 고맙기만 하다. 인간이 참 간사하다.
오늘은 낮에 좀 걸어서 가야 하는 슈퍼에 한국 유자차를 사러 갔다. 내가 제일 맛있다고 치는 유자차는 제주시에서 과일상을 하는 친척이 직접 만드는 거다. 이 집은 손맛이 좋은지 특별히 맛있다. 그래서 유자가 나오는 철에 제주도에 가면 무거워도 일부러 사 온다. 일반 시중에서 파는 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런 사치를 꿈꿀 수도 없다. 그전에 규슈에서 유자를 많이 보내와서 유자차를 직접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유자 종류가 다른지 향이 다르다. 맛도 별로였다. 그래서 동경에서 가격 대비 먹을 만한 유자차를 물색해 놓는다. 요새는 지금 사러가는 슈퍼에서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보니 유자차가 없다. 점원을 불러서 언제 입하가 되는지 물어봤다. 모르겠단다. 이런, 항상 집에 두고 먹던 게 없으면 뭔가 허전하다. 특히 유자차처럼 용도가 다양하고 쓸모가 있는 식품은 더욱 그렇다. 아쉽다. 유자향이 그리워지는 계절인데… 나는 유자차를 차로 마시기보다, 요구르트에 넣거나 마말레드처럼 빵에 발라서 먹는다. 빵에 발라서 먹으면 오렌지 마말레드보다 향기가 좋아서 더 맛있다.
돌아오는 길에 중고 책방에 들렀다. 여성 패션잡지를 보러 간 거다. 내가 보는 잡지는 오며 가며 책방에 들러서 살짝 넘겨본다. 여성 패션잡지를 나는 그림책으로 보는 거라, 꼭 새로울 필요가 없다. 보고 싶은 그림이 실려 있는 책을 싼 가격으로 구입한다. 그런데, 이 잡지가 중고 책방에 따라 가격이 아주 다르다. 비싼 데는 새책 반값일 때도 있다. 가끔, 운이 좋으면 보고 싶은 그림이 많이 실려있는 잡지가 싼 가격으로 많이 나와있다.
오늘이 여성잡지를 싸게 사는 운이 좋은 날이었다. 고르고 골라서 네 권 사 왔다. 책방에서 고르고 고르는 시간도 좋다. 한 권은 내일 수업과 연관된 자료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 것도 샀다. 내일 가방이 무거울 거다. 짊어지고 가서 학생들에게 보여 줘야지… 이런 게 있으면 보물 찾기에서 보물을 찾은 심정이 된다. 학생들은 모를 거다. 보물찾기 하면서 사는 인생을… 뭐, 유자차를 못 사서 기분이 우울했는데, 당분간 볼 그림책을 샀으니 흐린 하늘이나 그리 나쁘진 않은 일진이다.
지난주에 규슈에 사는 학생이 올해 농사를 지은 쌀과 야채를 보내왔다.
나는 쌀을 잘 안 먹지만, 무농약, 무비료로 농사를 지어서 보낸 걸 생각하면, 고맙기 짝이 없다. 나도 조금은 철이 들어가는 건지, 농사를 짓는 수고스러움과 신경을 써서 보내주는 걸 상상한다. 지방에 살면서, 스스로 농사를 짓고 야채상을 하는 지라, 도시에서 사보낼게 별로 없다. 일 년에 몇 번인가, 계절 야채와 과일을 보내주는 고마움에 연말이 되면 뭔가 뜨개질을 해서 보낸다. 이번에 물어봤다. 뭘 짜면 좋겠냐고, 그랬더니 얇고 가볍고 따뜻한 반짝이가 들어있는 베스트가 좋다고 한다. 이 건 반짝이가 들어있는 모헤어 실이 좋다. 아니면 모헤어 실에 반짝이 실을 같이 섞어서 짜는 게 좋다. 그런데 반짝이 실이 안 보인다. 모헤어 실에 반짝이가 들어있는 것은 실이 좀 두껍다. 내가 실을 주문하는 가게가 마침 이사 중이라, 반짝이 실을 주문할 수도 없다. 그래서 며칠간 고민하며 찾아봐도 만족할 만한 게 없다. 반짝이가 들어있는 모헤어 실이 좀 두꺼운데 그래도 괜찮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괜찮단다.
이 건 지난 주말 이틀 사이에 뜬 거다. 하루 종일 뜨개질을 하는 건 아니지만 실이 두꺼워서 진도가 빨리 나갔다. 크림색 모헤어 실에 오로라색 반짝이가 들어있다. 그것 만으로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주황색 실로 바이어스처럼 테를 둘렀다. 실이 두꺼워서 너무 따뜻할 거라 온도조절이 가능하게 팔 둘레를 깊이 팠다. 그리고 목도 깊게 파서 그냥 두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다. 목둘레를 좀 더 짰다. 짜고 보니 ‘왕자님 포스’가 나는 것 같다. 모헤어 실이 털이 아주 긴데, 오로라색 반짝이가 엄청 고급스럽게 빛난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안 입을 것 같은… 그 친구는 시골에서 농사를 하고 과일상을 한다. 그런데 여름에 외제차를 샀단다. 아이도 두 명이다. 작년에 목도리를 짜서 보냈더니 마누라에게 뺏겼단다. 마누라는 아주 작은 사람이라, 이 베스트를 입으면 원피스가 될 거다. 그 친구는 잘 소화를 시키고 소중히 여기며 입어 줄 거다. 그래서 안심하고 내가 짜고 싶은 걸, 실용적인 걸 짰다.
그런데, 정말로 왕자님 포스가 나긴 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