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08 '기적'의 리포트
오늘 동경은 맑고 더운 여름 날씨였다. 장마철 같이 눅눅한 날씨가 아니라, 여름철 날씨다. 이번 주에 들어서 날씨가 눅눅함이 가신 눈부신 햇살이 공포스러운 폭염이 돌아왔다. 월요일부터 최고기온이 36도였다. 오늘도 최고기온이 35도였다. 날씨라는 게, 최고기온도 높다가 낮다가 하는 줄 알았더니, 요새는 일주일 최고기온이 35도 이상이 계속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저기온이 24도로 열대야가 아닌 것이다.
오늘부터 실시한 폭염대책이 있다. 그동안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걸 봤는 데, 오늘 처음으로 해봤다. 그런데, 정말로 아주 시원하다. 일본은 지진 이후에 절전을 해서 더위를 지혜롭게 지내기 위한 아이디어 상품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처럼 TV를 거의 안보는 사람은 잘 모른다. 전철에서 하고 다니는 사람을 봤는 데, 내가 할 줄은 몰랐다. 내가 한 것은 케이크를 살 때 같이 껴주는 식품의 온도를 차게 유지하는 젤을 냉동한 것을 세 개, 가제에 싸서 스카프처럼 목에 두른 거다. 가제는 약간 두께가 있는 게 좋겠다. 목을 차게 했더니, 체온이 내려간다. 오늘도 낮에 집에 있으면서 땀을 흘리지 않았다.
지난주는 여름방학이라고 푹 쉬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서, 먹고 자고, 뒹굴뒹굴거렸더니 몸이 다시 부풀어 간다. 그래도 요가나 산책도 안 하고 폐인모드로 지냈다. 낮과 밤이 바뀌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책을 읽어도 아침 9시에는 일어났는 데, 지난 일요일은 일어나니 낮 12시였다. 이러면 안 된다. 다음 날, 월요일부터 7시 기상, 아침을 먹고 학교도서관에 채점을 할 리포트를 짊어지고 나갔다. 우선 숫자가 많은 것부터 해야지. 500명 수업, 500명의 리포트가 무겁다. 가는 길에 유기농 오이가 있어서 두 봉지를 사서 들고 간다. 짐이 무거운 데, 더 무거워진다.
그러나, 학교도서관은 나에게 놀이터이기도 한지라, 놀다 보니 채점은 그다지 못했다. 참, 한심하다.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까, 무거운 리포트에 오이와 새로 빌린 책을 등에 지고,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갔다. 밤에는 목욕을 하고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사실 학생들 리포트는 재미가 없다. 재미있는 리포트는 아주 잘 쓴 거라, 드물다. 어떻게 하면 점수를 더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읽어야 해서 피곤하다. 그리고, 채점은 아주 스트레스를 받는 노동이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책을 읽는다. 강도 높은 노동의 스트레스에 비례해서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은 욕구도 강해진다. 다행히 요즘 아주 재미있게 읽는 책들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된다. 어젯밤도 12시가 넘어서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다 보니 새벽 4시가 되었다. 조금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재미없고 짜증 나는 노동을 시작한다. 밤에는 다시 재미있는 책을 읽는다. 이런 걸 번갈아 3일간 했다. 그러니까,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읽고 또 읽고를 거듭하다 보니 목이 뻣뻣하고, 등짝이 뻣뻣 해진다. 한마디로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약간 자학 증세가 있나?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욕구에 충실하다 보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전형적인 예다.
오늘로 500명 수업 채점을 마치고 성적을 입력했다. 전체 숫자를 정확히 몰랐는 데, 521명이었다. 다시는 그런 수업을 하고 싶지 않다. 내 능력으로 그 정도 숫자는 연속된 수업이 안된다. 어쩌다가 한번 하는 강연이라면 모를까… 학생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데, 어떻게 수업이 먹혀들어간다는 건가?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후유증으로 일주일 고민을 했다. 그리고 결론이 났다. 내 능력으로 500명 수업을 해서 내가 생각하는 성과를 얻지 못한다는 결론이었다. 대학에서 그런 수업을 하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도 강의를 하는 사람에게도 스트레스만 안기고 성과가 별로 없는 수업이 될 뿐이다.
이번 리포트에서 만점은 두 명이었다. 둘 다 여학생이다. 한 명은 내가 낸 과제를 잘 이해해서 자신이 공부한 것과 생각을 더해서 쓴 것이다. 이건 고기로 예를 들자면, 마블링이 아주 잘된 비싼 값을 받는 최고급 고기다. 또 하나는 작년 일 년 휴학을 해서 쓰나미 피해가 있었던 지역에서 볼런티어 활동을 했다는 학생의 리포트였다. 볼런티어 활동을 했던 지역의 활성화에 관해, 마치 자신의 인생설계처럼 몸과 마음으로, 그 지역에 대한 사랑과 정성으로 쓴 리포트였다. 감동해서 눈물이 났다. 이런 리포트는 ‘기적’이다. 그리고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주위 사람이 바뀌고 세상도 바뀐다. 한 사람의 작은 ‘기적’은 세상의 희망으로 변한다. 말을 안 듣는 학생들이 ‘악마’처럼 보였던 적도 있었다. 그 ‘악마’들 중에 ‘천사’들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강의를 하면서 내가 느꼈던 피로감, 종강을 하고 내가 느꼈던 공허감이나, 허무감을 위로해 준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