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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도 사람들

김석범선생님과의 대화

김석범선생님과의 대화

재일 제주도 사람들 2012/05/27 21:30 huiya



오늘 동경 날씨는 청명하고 바람도 살랑 살랑 부는 아주 좋은 날씨였습니다
. 햇살이 눈부시게 찬란했다고 할까, 마치 특수한 조명처럼 빛이 났습니다.

저는 읽을 책이 밀려서 아침에 일어나서 평소 하던 것들을 하고 아침을 먹고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지요. 진도가 별로 안나갑니다. 입이 출출해서 팝콘을 한 양푼 만들어서 먹으니 맛있게 금방 먹힙니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두번째 팝콘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너무 많더군요. 먹다가 남겼습니다. 책이 별로 안읽혀서 두 권만 읽었습니다. 저녁 산책을 나가기 싫었지만, 팝콘을 많이 먹어서 배가 이상합니다. 소화가 안된다고 할까.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러 길을 나섰지요
. 걸어서 왕복 한 시간이 더 걸리거든요. 책을 반납하고 오는 길에 학교 마당에 있는 작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제가 그 학교를 25년 다녔는데도 그 산에 못 올라가봐서 갑자기 올라가기로 했지요. 올라가는 길도 잘 몰라서 산을 돌다가 무조건 위를 향해서 올라갑니다. 이만 저만 가파른게 아니예요. 길도 없고 아주 가파라서 올라가면서 걱정을 했지요. 내려올 엄두가 안납니다. 
어쨌든 올라가서 보니 옛날에 소문을 들었던 작은 신사같은게 있고 내려가는 계단이 보입니다
. 그 계단을 내려왔더니 시간이 많이 걸리더군요. 그래도 정상을 정복한 성취감이 있고 땀도 많이 났습니다. 그리고 집에 오면서 헌책방에 들러서 잡지를 한 권 사서 왔더니 두 시간 정도 걸었더군요. 이 걸로 저녁산책을 한 셈으로 치렵니다.

김석범선생님과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김석범선생님은 재일제주도사람 일세 지식인들이 가졌던 정체성을 아주 뚜렸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재일제주도사람 일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엄밀히 말하면 1925년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이세입니다. 그러나, 일세 같은 이세입니다. 1925년이면 제주도 사람들이 오사카로 이주를 시작한 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태어나 자라고 젊을 때 까지 지낸 건 제주도사람들의 집거지인 이카이노였습니다. 그 당시는 학교외에 생활언어는 제줏말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활환경이 제주도사람들 속에서 살았던 거지요. 그러나 자신은 1940년 제주도에 가기 전에는 일본제국주의 교육을 받아서 황국소년이였다고 합니다. ‘황국소년이라는 건 "자신도 천황폐하의 아이로서 천황폐하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을 바친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당시 대부분의 재일동포나 재일제주도사람 일세 지식인들이 가진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1940년에 제주도 고향에 가서 일년정도 지냈다고 합니다. 제주도 고향마을에서 지내는 동안에 선생님께 혁명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선생님께 혁명이였던 것은 제주도의 자연 제주도사람들의 삶이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기는 남들과 달리 일본이 전쟁이 끝나기 전 부터 반일이였고, ‘민족주의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약간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그 세대 재일동포 일세나 지식인들은 일본이 패전 후에 자신들이 조선인이라는 걸 발견하고 급속히 ‘조선인으로서 민족주의에 눈떠가거든요. 물론, 그 전 부터 민족주의 사회주의사상으로 노동운동을 리드한 케스도 있기는 있습니다만, 소수라고 할 수 있지요. 선생님도 그 후에 자신이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며, 중국으로 가려고 서울에 가기도 했습니다. 결국, 중국에는 못갑니다.


아마도 선생님이 제주도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이카이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일제하 교육에서 조선인으로서 뭔가 열등감을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면서 보는 일본사람들과 주변에서 보는 일본말도 못하는 제주 아지망들과 이질감을 느꼈겠지요. 그 게 제주도 고향마을에서 지내면서 제주도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할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할까, 식민지출신 황국소년에서 제주도사람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소년 때 경험한 제주도 자연이, 고향마을에서 본 제주도사람들 생활이 그 후 선생님이 소설을 써가는 데 원동력이자, ‘원풍경이 됩니다. 소설을 써서 발표하기 시작한 게 1957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55년이나 쓰고 있는 소설이, 소년 때 일년 동안 제주도 고향마을에서 경험했던 것에서 나오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선생님은 제주도 제주도사람들 만 썼거든요. 사실 제주도출신 작가들은 제주도 제주도사람을 쓰고, 썼습니다. 그러나 김석범선생님 처럼 제주도 제주도사람만 전문적으로 끈질기게 쓴 사람은 없지요. 이 게 제주도사람이라는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재일제주도사람 일세들에게 민족적인것은 제주도적인 것 입니다. 

일본 식민지하 
조선인으로 성장해서, 일본이 패전 후 조국에서는 동족끼리 전쟁을 하고 분단이 됩니다. 재일동포가 보는 관점에서, 북한은 표면적으로 나마 친일을 청산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친일도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민족이 자주독립을 못한 상태로 봅니다. 당시 대부분의 재일동포 지식인들은 북한이 민족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통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북한쪽 조직에서 활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화 경향이 뚜렷해 질 때, 많은 지식인이 북한 쪽 조직에서 나옵니다. 이런 분들이 모여서 만들었던 게 삼천리라는 잡지였지요.

북한 쪽 조직에서는 이 분들을 조국을 배반한 남조선 스파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보면 좌경이였지요. 그러나 이 분들이 생각은 통일된 조국만이 진정한 조국이였다는 겁니다. 북한 정권이나, 한국이라는 분단한 국가는 조국이 아니라는 거지요. 같이 일을 하시던 분들 대부분이 한국정부의 끈질긴 공작으로 전향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전향은 한국정권을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향에 가고 싶어서 였다고 합니다. 이 분들의 고향에 대한 집착 또한 대단합니다. 어디까지나 고향이였지, 국가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까지, ‘통일된 조국이 아니면 돌아갈 조국은 없다며 고향에 가고 싶어 미칠 것 같으면서도, 그냥 죽어간 분들도 계십니다. 


김석범선생님도 나는 조국이 통일될 때 까지 민족주의자 라고 하더군요. 이 게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민족주의자의 정체성입니다. 이 경우 조선적이라는 건 국적이 아니라, 출신 지역을 나타내는 겁니다. 


아무렴요, 이 분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성립되기 전, 북쪽에 있는 나라가 성립되기 한참 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였거든요. 

모쪼록, 선생님이 죽기전에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