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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도 사람들/'파친코'와 재일 제주도 사람들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일본의 어업 침략- 조선 연해

오늘 동경은 흐렸지만 낮에는 따뜻했다가 저녁에는 비가 왔다. 나는 오늘 항암치료를 하는 날로 오후에 예약이라서 아침을 늦게 먹고 병원에 갔다. 오전에 혈액검사를 하고 그 결과를 보고 항암치료를 받지 못하기도 하고 치료 내용을 조정하기도 한다. 오늘도 골수 수치가 생각보다 회복이 늦어서 모자랐지만 다른 수치가 올라가고 있어서 치료약을 줄여서 항암치료를 하기로 했다. 지난번 항암치료에서 6주나 간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다른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여기서는 병원이 가깝기 때문에 병원에 가기가 쉽다.

 

진료는 예약시간보다 빠르게 점심시간에 받았다. 치료실에 가서 링거를 맞는 것도 약을 줄여서 만드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지난번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마지막에는 치료실에 나 혼자 남아서 간호사가 구급 외래에 일손이 부족해서 가야 한다고 나를 데리고 구급 외래 병동으로 갔다. 병원에서 맞는 링거는 다 맞고 링거를 꼽은 채 집에 오는데 거기까지도 잘 끝났다. 그래서 오늘은 오후 예약이었는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싶었다. 동경에서 이런 날도 있구나 하고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건 일본에서는 아주 행운에 가깝다. 행운은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마지막에 병원비를 계산하는데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병원비를 계산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 내가 3번째였다. 처방받은 약을 병원 앞 약국에서 받아야 하는데 병원비 계산에서 시간을 잡아먹어서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약국이 열렸냐고 물으니 6시까지라고 한다. 회계가 늦장을 부려서 6시가 넘고 말았다. 근처에 다른 약국이 없다. 집에 돌아오는 것보다 뭔 곳에 가야 약을 받을 수 있다. 비도 오는데 화가 났다. 결국, 약을 받지 않고 그냥 집에 왔다. 비가 조금 왔지만 우산 쓰기도 귀찮아서 그냥 걸었다. 비가 오는 날은 신록의 향기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약을 받지 못해서 화가 나고 내일 비가 아주 많이 온다는데 링거를 꼽은 채 다시 약을 받으러 갈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힌다. 그래도 병원에서 나올 때는 기분이 좋아서 발걸음도 가볍게 귀갓길을 걷는다. 

 

집에 와서 오징어 회무침을 만들어 회무침 덮밥을 먹었다. 오늘 만든 회무침에는 죽순을 넣었다. 냉장고에 있는 야채로 할 수밖에 없어서 죽순에 부추, 명이나물, 생강, 양파, 요전에 딴 생목이버섯도 넣었다. 먹어 보니까, 목이버섯은 넣지 않는 편이 좋았다. 마지막에 산초잎을 많이 넣어서 향을 더했다. 항암치료를 받고 나면 입맛이 없기에 먹고 싶은 걸 먹으려고 한다. 병원에서 돌아온 시간이 7시 가까워서 저녁을 준비하는 게 늦어 먹는 것도 평소보다 늦었다. 그래도 오늘 낮에 병원에서 잠을 많이 자서 피곤하지 않다. 내일 오전에 비가 많이 온다는데 약국에 가는 게 걸리지만 어쩔 수가 없다. 

 

 

 

2절 일본의 어업 침략과 제주도 

1.    조선에 대한 어업 침략

 

일본이 한반도에 어업을 목적으로 침략했던 일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예부터 이루어져 왔는데, 특히 倭寇鎮圧의 수단으로 무역정책에 임했던 조선 측의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중략- 그러나 순수 해적행위로부터 半漁半賊的 또는 半商半賊的인 행위로 전향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침략행위를 포기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70). 일본에서 한반도에 대한 어업 침략은 이와 같은 半漁半賊的 또는 半商半賊的인 형태로 시작되었다. 어쨌든 '해적' 행위가 포함된 것으로 조선에서 보면 그야말로 '왜구'인 것이다.  “고려말 경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무역항은 부산포, 내이포 등이었는데, 특히 부산포는 그 중심지로서, 여기에 다수의 일본인이 살았다”(71). “태종 18(1418)년 -중략- 염포(울산군)와 우도에서도 加脊梁(綾営郡)에 왜관을 설치하고, 거류 왜인을 별도로 살게 하는 것을 청해서 왕은 이를 허용했다”(72). 거기에 초기 조선 거류 왜인 중에는 어민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일본인 어업이 정식으로 허용된 것은 같은 해 “경상도의 제포, 부산포, 염포 삼 항을 열고 여기에 왜관을 설치하고, 동시에 삼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어업을 허용했다”는 것에 의하지만, 그것은 “조선에서 정식으로 허용된 이주 어촌을 설치한 염포일 것이다”라고 한다(73).

 

한편 “모든 쓰시마인이 거제도 방면에서 촌락을 형성하고 농//염업에 종사했던 일이 밝혀졌고 그 유래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판단된다(74). “세종 초기(1418-)에 이르면 쓰시마 어민 등이 조선 각자에 널리 이주하고 싶어 한다”는 기술에서 볼 수 있듯이 쓰시마는 거리상 가깝기 때문에 일찍부터 왕래가 활발했던 지역이었다(75). 일본 어민의 어업 침략은 허가받은 지역에 그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본 어업자 중에는 허가받은 삼 포에 근처 연안어업에서 나아가 전라, 충청, 각도 연안까지 발전하는 자도 있고, 게다가 그중에는 무사층을 포함한 장비적(무장해서) 출어하는 자도 볼 수 있었다”(76). 그것은 조선과 맺은 조약 위반이며 이것이 초기 일본의 어업 침략 형태였다. “당시 쓰시마 어민이 조선 연안으로 출어하는 일이 점점 활발해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력적인 수단을 감행할 것 같은 형세였으므로 이 점을 예상했던 것인가” 조선 측에서 약속을 정해서 1441년에 허가했다(77). 이 조선에 대한 출어권은 일본 어업 침략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쓰시마 어업 개척 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78). 어업 개척의 실상은 무력 진출, 어업 침략을 뜻한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출어 허가가 나지 않은 전라도 서남단 해역에서 영역을 침범하는 문제였다. 여기는 해산 자원의 보고이고 조선인 어민도 많이 출어하고 있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이 해역에서 왜인 어선의 해적행위가 빈발하고”, 문제가 확대되어 갔다(79). 전라도 서남단 해역이라면 제주도 근해가 아닌가? 조선인 어민은 제주도인이 아닌가? 일본의 어업 침략은 항상 조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문제화되었다.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사건이 속출해서 양국 간에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분쟁을 야기하게 된 근본 요인에는 항상 半漁半賊的인 경영이라는 시대상이 잠재해 있어, 왜구적 색채가 다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80). 일본인 어민이 조선인을 살상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것에 대해 조선 측은 그 대책에 고심했다. 이것을 입본에서는 “우리 출어자 중에는 어부가 아니면서도 -중략- 어부와 해적의 양면적 성격을 갖는 일이 있고 -중략- 半漁半賊的 출어 형태는 결국, 당시 세태 상황을 반영한 경영 방식이었고, 일본이 조선 수산 개발 사상 특수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81). 당시 세태 상황에서는 조선에 대한 무력적인 어업 침략은 틀림없이 일본 어업 침략의 “특수한 성격”으로 기억하기로 하자. 그리고 지금까지 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어업 침략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유의하시길 바란다. 왜냐하면 다음에 살펴볼 제주도에 대한 어업 침략도 같은 형태로 같은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어업 침략 과정에서 제주도인 해인이 전술한 것처럼 조선 연해를 이동하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왜인에게 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것은 半漁半賊의 왜인과 제주도 해인은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 어선에는 밀어선도 많아서 “당시 일본 밀어선은 멀리 남서제도까지도 진출(침략)하고, 그것은 “전복을 잡기 위한 어업자가 이미 위험을 감수하고 멀리까지 진출(침략)”하였기 때문이다(82). 조선에서 전복의 명산지는 제주도였다. 예부터 일본에서 탐라 전복으로 알려져 왔던 것은 먼저 소개했다. 거기에 1608년이 되면 “조선 남부에서부터 서해안의 먼 섬 방면까지 출어하고 여러 가지 기이한 사건을 발생시키고 있지만 관청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조약에 의한 출어가 아니므로 어쩌면 밀어적 발전이었을 것이다”로 일본에서도 보고 있다(83). 여기서 기이한 사건은 일본 어부의 무력으로 현지 주민을 살상하거나 부녀자를 범하고 식량과 가축을 훔치는 걸 뜻한다고 보면 된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어업 침략은 무장한 어민이 半漁半賊에서부터 일부만 조약에 의거한 출어일 뿐, 실제로는 무력을 동원해서 주로 밀어가 행해졌고, 그 과정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위해 모든 수단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의 어업 침략의 목적은 “주로 조선 남부 중심의 고급 어족을(잡는 걸) 목적”으로 하였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다(84). 거기에는 한반도에서 황금어장으로 옛날부터 전복의 명산지로 알려진 제주도가 포함된 것은 재삼 말할 필요도 없다.

 

각주

70)吉田敬市『朝鮮水産開』朝水 1954年 79p 본문 내용은 이전 가나로 되었지만 인용할 때 현대의 가나로 쓰고 있다.

71-5) 吉田 전게서 80p

76) 吉田 전게서 81p

77-8) 吉田 전게서 83p

79) 高橋c 전게서 174p

80) 吉田 전게서 83p

81) 吉田 전게서 85p

82-3) 吉田 전게서 91-2p

84) 吉田 전게서 110p

※「우도에서도 加脊梁(綾営郡)」 이 지명에 관해서는 현재 어디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일본 외교문서에서 그대로 가져왔지만 기록하는 과정에서 틀린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