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경생활

한잔 걸치다

2013/10/19 한잔 걸치다

 

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흐려서 꾸물거리는 날씨였는 데, 저녁때가 되어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가 오는지 안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아주 살짝 비가 오고 있다.

이번 주는 수요일에 태풍으로 인한 휴강이 있어서 금요일이 되어도 어중간한 느낌이었다. 주말이 된건지 아닌지도 헷갈렸다. 어제 날씨는 약간 쌀쌀한 데, 건물안은 더웠다. 오전 수업에서는 냉방을 켜고 했지만 나는 땀을 흘렸다. 오후 수업도 교실이 따뜻해서 창문을 열어도 시원하지 않았다. 약간 쌀쌀하면서도 더웠다. 요새는 왠지 바쁜 일이 많아서 쉬는 시간도 바쁘다. 아마 수업을 하는 시간이 가장 차분한 시간이다

이번 학기가 시작되어 복도에서 나와 마주치는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하나 같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만지고 난리를 핀다. 하도 비명을 지르기에 그 비명의 정체를 사무실 직원에게 물었다. 여학생들이 이런 비명을 지르는 데, 무슨 뜻일까요? , 그건 선생님을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겁니다. 무책임한 답변을 듣고, 제가 몸조심해야 겠네요 했다

수업을 마치고 왔더니 친한 미국 선생이 있었다. 같이 퇴근하려고 기다렸다. 자기 사물함에서 계피사탕을 한 봉지 꺼내서 준다. 나에게 주려고 거기에 뒀던 것 같다. 다른 선생들이 없을 때 주려고 기다렸나 보다. 조금 피곤했던 차에 맛있는 계피사탕을 입에 무니 너무 맛있다. 피곤이 녹아 나고 행복해졌다. 친구가  배려해줬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줬다. 미국 선생은 나를 귀엽게 봐준다. 나도 그 선생을 따뜻하게 본다. 계피사탕이 맛있다고, 피곤이 풀린다는 솔직한 표현을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친구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다. 그녀는 나에게 귀엽다, 친절하다는 연발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말로 위안을 하면서 지낸다. 학생들에 관한 불만에 같이 열을 내기도 한다

둘이 시간이 맞아서 같이 퇴근을 했다. 같은 버스에 탔다는 것이다. 버스를 같이 타서 역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떠는 데, 어제는 앉은자리가 앞과 뒤여서 버스에서 수다를 못 떨었다. 피곤하지 않아서 물끄러미 학교에서 역에 오는 사이에 있는 창밖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바라보니 참으로 멋대가리도 없고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학교로 갈 적에 보는 쪽은 반대쪽이다.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같은 곳이라도 이렇게 다르게 보인다. 같은 풍경이라도 버스에서 보느냐, 택시에 타서 보느냐도 달라 보인다.. 나는 버스에 타서 앉은 정도의 눈높이를 좋아한다.

역에 도착했더니 미국 친구가 갑자기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다. , 특별한 계획이 없어요. 그러면 자기가 살테니까, 맥주를 한잔하고 가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지만 기분이 싱숭생숭했던 차라, 갑시다하고 나섰다. 역은 스쳐지나가는 곳이라, 주변 건물을 제대로 보는 일도 없다. 그 친구가 앞장서서 가게로 간다. 날도 아직 밝았다. 친구는 술을 좀 마신다. 나는 거의 못 마신다. 그러나 아주 가까운 사람과는 조금 마신다. 친구가 목이 말라서 맥주를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일을 마치고 가는 길에 ‘한잔 걸친다’는 게 바로 이런 거야, 생전 처음하는 경험에 약간 흥분했다. 남자들이 일을 마치고 한잔 걸치고 집에 가는 게 이런 기분일까. 가게에 들어가서 나는 글라스 맥주를 한잔 친구는 조끼로 시켰다. 술안주는 닭날개와 쵸리소라는 소시지였다. 그리고 둘이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테마는 여기로 갔다 저기로 간다. 요즘 바빠서 학교에서도 제대로 말을 못 했으니 뭔가 할 말이 많았나 보다. 친구는 맥주를 다시 시킨다. 정말로 맥주가 고팠었나 봐. 친구가 하는 말이 집에 가서 마셔도 되는 데, 목이 말라서 들렸단다. 혼자서는 못하니까, 내가 같이 있어서 마시자고 했다고… 남자라면 괜찮을 텐데, 여자가 혼자서 식사를 하는 건 괜찮은 데, 혼자서 술을 마시기는 아직 좀 어려운 분위기다. 몇년 알고 지냈어도 둘이서 차도 한잔 같이 마실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던 사이다. 그래도 가끔 서로 작고 부담 없는 성의를 표시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둘이 수다를 떨고 깔깔거리고 웃느라고 정신이 없다. 나는 주말이었지만, 친구는 토요일에도 아침부터 강의가 있다. 그래서 일찌감치 자리를 일어나기로 했다. 한 시간 동안 친구는 맥주를 세 조끼 마셨고 나는 한잔이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구름에 둥둥 뜬 것 같은 상태였다. 수다를 떨고 정신없이 웃다 보니 많은 게 해소가 되었는지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몸은 약간 감각이 이상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느꼈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구나. 기분 좋게 한잔 걸치는 경험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주말 식량을 조달했다. 별로 살게 없었다. 감을 네 개, 고구마를 다섯 개 샀다. 토마토를 사려다 아무래도 토마토를 먹기에는 날씨가 추운 것 같아서 그만뒀다. 내가 사는 닭이 싸면 사려고 했는 데,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다. 조금 기다리다가 포기한다. 그런데 야채들이 반값이 되는 시간이 되니,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몰려왔다. 반값이 되는 걸 기다렸다가 사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학생들에게 말을 들으면 도시락이나, 반찬들이 반액이 되면 사다 냉동했다가 먹는단다. 학생들이 아닌 사람들도 반값이 되는 걸 기다렸다가 산다

어제는 집에 돌아와서 전날 만들어서 남은 도미조림을 먹었다. 매실주에 담궜던 매실도 네 개 먹었다. 고마바에서 얻어온 것이다. 고마바집 마당에 있던 매실나무는 작년 태풍에 부러져서 잘라냈다. 이게 마당에 열렸던 마지막 매실인 것이다. 매실나무가 있을 때는 당연해서 고마움도 몰랐는 데, 없어지니 아쉽고 섭섭하다. 심심한 드라마를 보면서 뜨개질을 하고, 인터넷 쇼핑몰을 보다가 괜히 늦게 잤다. 두 시가 넘어서 잤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뜬 것은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추웠다. 눈을 떠서 화장실을 갔다가 다시 잤다. 자다가 가까운 유치원에서 운동회 하는 마이크 소리가 시끄러워 깼다. 아랫집도 수선을 하느라고 뚝딱거린다. 열시쯤 되었다. 빨래를 하려고 앞쪽 베란다에서 하늘을 봤다. 찌뿌둥한 데, 조금 맑은 기운이 보인다. 뒷쪽 베란다에서 보니 완전히 흐려서 찬바람이 분다. 어떻게 할까?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목욕탕 욕조에 있는 따뜻한 물로 채운다. 세제를 풀어서 담가 둔다. 고구마를 씻고 잘라서 냄비에 넣고 삶기 시작한다. 그동안에 요가를 한다. 요가를 마치고 머리를 감고 손빨래도 하고 세탁기도 돌린다. 냄비에서 찐고구마를 꺼낸다. 빨래를 널고 손빨래도 짜서 널었다. 고구마를 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벌써 열두 시 가깝다. 늦게 일어난 날은 하루가 짧아진다. 찐고구마와 깻잎으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심심한 드라마를 보면서 뜨개질을 좀 하고 그럭저럭 지낸다. 날씨는 완전 흐려졌고 좀 쌀쌀하다. 어제까지 더웠는 데, 갑자기 시월 하순이 된 것 같다. 신경이 쓰이던 음식물쓰레기를 모아서 버리고 수채 구멍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길에 아랫집 아줌마가 심어 놓고 간 나무와 꽃을 신경 써서 봤다. 귤나무 종류인 데, 나뭇잎이 노랗다. 계절이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병이 든 건지 모르겠다. 다른 나무들은 잎사귀가 파랗던 데…

베란다에서 보니 한시쯤에 운동회를 마치고 아이들이 부모네와 같이 쫑알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운동회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다. 운동회 하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으니까…

오후 늦게 왠지 노곤함을 느낀다. 피곤할 일은 없었는 데, 아무래도 기온차가 심해서 몸이 피곤한 모양이다. 한여름에서 늦가을로 갑자기 바뀌니 몸이 따라잡기가 힘들다.

 

 

 

'동경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수하는 날  (0) 2019.10.21
네즈 미술관  (0) 2019.10.21
태풍 피해  (0) 2019.10.21
오랜만에 밤마실  (0) 2019.10.21
옥타마 사진 1  (0) 2019.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