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15 어느 ‘사회주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
쉬는 날에도 일하는 날과 그다지 변함없이 일어난다.
아침에 집 청소를 하고 나서 카메라를 들고 집 주위 단풍을 찍으러 나섰는데, 배터리가 없어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다. 되돌아와 배터리를 충전기에 꼽아놓고 다시 집을 나섰다. 날씨가 흐려서 저녁에는 비가 올 것 같아 산책을 했다. 점심 때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기에는 빠르고 날씨가 싸늘해와서 지난주 독일에서 온 교수가 준 코코아를 타서 먹기로 했다. 우유를 데워서 코코아를 만들었는데 영 맛이 없다. 추워오니까 평소에 마시는 코코아 파우더를 사다 놔야겠다.
오사카 이야기로 돌아가자.
금요일 오전에는 조천 할아버지네를 만나고, 다음은 히가시나리 신미치도리로 갔다. 전에 갔던 길을 찾아서 주소를 보고 집을 찾았다. 사람이 없다. 문패는 할머니 이름이 그대로인데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잘 모르겠다. 돌아가신지 몇 년이 되어도 문패를 바꾸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나중에 전화로 확인해 봐야 한다. 그런데 전화로 확인하는게 좀 어렵다. 살아계시면 다행이지만, 난데없이 낯선 사람이 전화해서 할머니 돌아가셨냐고 묻는게 좀 그렇다.
오사카, 이쿠노는 직접 찾아가서 봐야 한다. 얼굴을 보면서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런 세계이다.
그 날 점심은 식당에서 혼자 먹었다.
그다음에 찾아간 곳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했던 할아버지 댁이었다. 나는 찾아가면서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터뷰를 할 당시 81세였으니까, 살아계시다면 99세가 된다. 남자분이 99세까지 사시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소식을 알고 싶어 찾아갔다.
마침, 그 집에는 홈헬퍼(도우미?)가 있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 할아버지 부인,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도 고령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 움직이는게 어려운 모양이다. 도우미를 하시는 분이 하루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돌보러 온단다. 다행히도 그 시간과 맞았던 것이다. 그 시간이 안 맞았으면 안에서 문을 다 잠그고 있어 얼굴을 못 볼 뻔했다.
‘사회주의자’ 할아버지는 1912년생으로 제주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1923년 학교를 졸업하면서 진학을 목적으로 오사카에 온다. 부모님이 반대로 진학은 못하고 철공소에 다니면서 사회주의 공부를 해, 임금 인상 투쟁을 한다. 할아버지는 제주도에서 보통학교 6학년 때 야학에서 연설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찰에 끌려간 화려한(?) 경력이 있었다. 18살때, 형님이 돌아가셔서 제주도에 불려 간다. 같은 동네 처녀와 결혼, 딸이 태어난다. 이 딸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자식이기도 하다.
다음 해 다시 오사카로 와서 셔츠 공장, 비누공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참가한다. 24살 때는 비누공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위원장이 되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해에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으나 져서 공장을 그만둔다. 그다음은 교토에서 일한다. 1940년에는 북해도에서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산다. 출소하고 나서도 전쟁 중이라 북해도에서 지낸다. 재혼해서 아들이 태어나지만 죽는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지 마자 오사카에 와서 활동을 재개한다. 1948년에는 한신교육 투쟁에 관여, 그 보고를 하러 북한에 갔다 온다. 일본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다. 1949년에는 두 번째 북한행에서 돌아와 미군 정령 위반으로 징역 5 년을 산다. 조선전쟁이 휴전하는 해에 출소해 다시 총련 활동을 한다. 1956년에는 동생 때문에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밀항으로 갔다 온다. 다음 해는 다시 재혼한다. 그분이 이번 만났던 할머니이다.
1958년에는 일본 보도 법 위반으로 징역 7년 선고로 인해 징역을 살고 한국으로 강제송환을 당했던 동생이 밀항으로 오사카에 건너온다. 동생은 결혼해서 북송사업 때 북한으로 갔다.
1980년 동생을 만나러 3번째 북한에 갔다. 김일성 독재체제에 환멸을 느껴 총련을 떠난다.
그 후 50년 만에 귀향, 조국이 발전된 모습을 보고 한국으로 전향한다.
민단 모국방문단 일을 10년 가까이 하고 고향마을과 고향발전을 위해서 일했다.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도 할아버지가 모금을 해서 지었다고 했다. 북한을 지지해도 고향을 위한 활동은 별도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있다. 자신이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아왔고 한 때는 일본 공산당 당원이며 북한의 스파이도 했지만, 결국, 고향에 이길 수는 없었다고 했다. 나이를 들어서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더 강해진다는 뜻이란다.
물론 할머니는 나를 모른다. 할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도.
할머니는 내가 제주도에서 온 줄 알았는지, 제주도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물이 들어간다며 걱정하는 말을 한다. 할아버지와는 나이를 들어서 만나 자식도 없다. 같이 살다 보니 할아버지가 빚진게 많아 할머니가 그걸 다 갚았다고 한다. 할머니 아들이 제주시에서 6층짜리 빌딩을 가지고 잘 살고 있단다. 할머니가 돈 벌어서 사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죽어서 고향에 묻히러 갈 거라고 한다. 죽을 때 까지는 모모타니(재일 제주도 사람 커뮤니티)에서 살겠다고. 제주도에 가면 친구도 없고 자식이 있어도 눈치를 볼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오래 살아서 친구들이 있는 모모타니가 더 좋단다. 이번에 가보니 그 전에는 일을 했던 곳이기도 해서 집이 크다. 큰 집에 길가에 있는 작은 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할머니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다. 혼자서 외로운 생활이지만 모모타니에서는 근처에 아는 사람들이 오며 가며 말이라도 해주지만 제주도에 가면 더 외롭고 힘들 것이다. 고향이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자식이 있지만, 오래 떨어져 살았다.
할머니는 실질적인 고향인 제주도보다 더 고향다운 모모타니에서 살다가 죽을 것을 원한다. 고향에는 죽고 나서 돌아가, 고향땅에 묻힐 것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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