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5 행선지
오늘도 동경은 맑은 날씨였다.
기온은 여전히 낮았지만, 낮에는 햇빛으로 포근하고 저녁에는 바람이 불어서 추웠다. 지난 주말부터 스리랑카로 여행을 가려고 여행사에 메일로 티켓을 교섭 중이었다. 스리랑카 사람으로 호주에 있는 친구에게도 메일을 했다. 스리랑카에 계신 어머니는 잘 계시냐고, 스리랑카에 가서 만나고 오겠다는 것이다. 티켓 가격이 적당하면 중국을 경유해야 해서 중국비자가 필요하고, 다른 건 예산의 세배나 되는 요금이란다.
어젯밤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 이전에 이철선생님 고별식이 끝나서 식사를 갔을 때, 잘 아는 분이 지금 살고 있는 주변에 제주도에서 건너와 살고 있는 1세 해녀 할머니들이 계시다고, 나에게 시간을 내서 할머니들이 살아온 말을 들으러 와달라고 했다. 알았다고, 언젠가 시간을 만들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 분이 거기까지 말을 하니까, 할머니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였지만, 정말로 목적을 가지고 시간을 내서 갈 생각은 없었다. 어젯밤에 갑자기 그 말이 생각이 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그 할머니들 말을 들으러 가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필드에 나가는 건 여행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준비와 시간, 체력이 필요하다. 준비를 빨리하면 다음 주에는 갈 수가 있겠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그 분께 전화를 했다. 지난 번에 말씀하신 것 때문에 전화를 했는 데, 정말로 가도 괜찮겠느냐고, 가면 신세를 질테고 사례도 못합니다. 아니 괜찮다고 오라고 하신다. 아주 갑작스럽게 정해졌다. 메일을 열어보니, 스리랑카에 계셨던 친구엄마는 작년 4월에 돌아가셨단다. 여행사에서 대한항공으로 콜롬보에 직항으로 가는 좌석이 있다는 데, 가격도 괜찮고 시간대도 좋다. 인터뷰를 일주일만 하고 와서 스리랑카로 날랐다가 4월 초순에 서울에 들러서 개강날짜에 맞춰서 돌아올까, 좀 바쁘긴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 친구엄마가 돌아가셨는 데, 할머니들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 스리랑카는 내년에 가도 되니까, 인터뷰 기간을 정하지 말고 할머니들을 만나러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오전 중에 편지를 썼다. 요새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 거의 없어 편지를 쓰다보니 두 장이나 파지를 냈다. 글씨도 엉망이고, 간단한 한자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편지내용이다.
조금 전에 갑자기 전화를 드려서 놀라셨지요?
제가 사는 주변에는 매화가 피어 봄이 가까워진 걸 알려줍니다.
저는 방학 때 마다 외국에 갔는 데, 이번에는 ‘제주도 일세의 생활사(2권)’ 교정원고가 나오길 기다리다 보니 외국에 갈 준비를 못했습니다. 비행기표를 알아보던 중, 이철선생님 고별식 때 만났을 때 말씀하신 게 생각이 났습니다. 주변에 제주도에서 오신 해녀할머니들이 살아계시다고, 그 할머니들이 살아온 말을 들으러 와달라고 하셨지요. 아까, 전화로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들 말을 들어도 논문이나, 자료로 발표할 계획이 없습니다. 그리고 연구비도 없이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라, 할머니들께 사례도 못하고 선생님께도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점 아주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현재 저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듣고 제가 시간을 내서 갈 수 있는 이상, 인간으로서 저는 할머니들의 말을 들으러 가야 하겠습니다. 아마, 저의 역할은 할머니들이 살아온 인생을 듣는 걸로, 할머니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면, 제주도에서 온 사람이 자신들이 살아온 말을 들으러 와줬다는 게 할머니들께 조그만 위안이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시고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주위에 계신 제주도에서 오신 일세 할머니들께, 제가 ‘살아오신 말을 들으러 간다’고 전해주세요. 언제 가는 게 좋은 지도요. 할머니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실 겁니다. 저도 인터뷰에 쓸 도구들을 찾으며, 녹슨 감각을 되살려 보겠습니다. 다음 주 초에 가려고 합니다. 사실은, 이런 말을 듣는 것은 말하는 쪽도, 듣는 쪽도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각자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라면, 아마 저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사모님께도 갑자기 가서 신세를 끼칠 텐데 안부를 전해주세요.
아와(지명)에는 유채꽃이 피었는지요? 정말로 오랜만에 바다와 유채꽃을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랩니다.
2013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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