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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코로나 19

일본, 한국인 입국 금지가 뜻하는 것

오늘은 일본이 코로나19의 감염 확산 방지를 목적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입국자, 실제로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입국 금지가 시작된 날이다. 아마, 어제까지 많은 유학생과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한국에 있던 일본인이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유학생이나 회사원처럼 4월부터 개강이나 입사가 없는 사람 중에는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는 걸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3월 31일까지 라고 했지만 그때까지 코로나19가 종식되기는 어려울 걸로 본다. 원래 한국인의 입국 금지가 코로나19의 방역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코로나19가 진정이 되어도 입국 금지가 풀릴지 어떨지도 모른다. 지난번 수출규제가 그렇든 이번 입국 금지도 아베 총리가 기습적으로 공격을 한 것이기에 코로나19의 이름을 빌렸을 뿐 원래 한국에 대해 하고 싶었던 일을 했을 뿐이다.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로 인해 일본 경제가 입은 타격이 절대로 만만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수출규제를 원상 복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일본이 경제적 손실이 크면 수출규제를 원상 복귀할 줄 알았을 것이다. 일본은 수출규제가 한국 경제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해서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다. 따라서 이번 한국인 입국 금지도 코로나19가 진정되어도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아까, 보도를 봤더니 작년, 2019년 10-12월 일본 GDP가 -7.1%라고 한다. 요전에는 -6.8%라고 하더니 더 내려갔다. 하락 수준이 대단한 것으로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던 2011년 1-3월이 -6.9%에, 2014년 4-6월이 -7.1%라고 한다. 작년 동시기 GDP가 -7.1%인 이유를 소비세 인상이라고 했다. 2014년이 소비세 인상의 영향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비세 인상보다 훨씬 더 많이 마이너스가 된 것에 대한 해설을 볼 수가 없다. 여기에 이번 코로나19가 왔다. 아베 정권에서는 작년부터 코로나19가 오기 전부터 경제 동향이 나빴는데 벌써부터 코로나19의 영향이라는 구실을 붙이고 있다고 한다. 나는 작년 하반기 일본의 경제 침체에 한국의 불매운동이 큰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보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해설이 일절 나오지 않는 것이 재미있다. 수출규제로 인해 오히려 일본에 타격이 크고 손해를 입어도 절대로 철회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수출규제를 철회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일본 아베 정권 스타일이 원래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옛날 전쟁을 할 때 가미가제 특공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자폭하는 공격 스타일을 멋있고 아름답다고 여긴다. 

 

오늘 동경은 기온이 20도까지 올라간 따뜻한 날씨였다. 어제는 하루종일 비도 오고 추운 날씨여서 주말 행사인 청소를 하지 않았다. 한국인 입국 금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서 아주 우울했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서는 갑자기 이런 극단적인 사태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양국 간에 '전쟁'이라도 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수출규제라는 명목의 경제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한국에서도 불매운동은 생활화했고 일본 여행도 자제를 하고 있다. 물론, 일본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어제 하루종일 우울했던 것은 이번에 코로나19를 빙자해서 행해진 한국인 입국 금지에 대해서 정말로 마음이 복잡했다. 항상, 아베 총리는 내가 예상하는 것을 월등히 뛰어넘는 정치역량을 발휘하면서 많은 것을 파괴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한 건설적인 파괴도 있지만 어떤 희망이나 가능성을 남기지 않기 위한 파괴도 있다. 아베 총리의 파괴는 후자다. 어제 떠오른 생각은 2006년 10월에 일본이 북한 지하 핵실험을 이유로 갑자기 북한과 일본을 오가던 만경봉호의 입항 금지였다. 그 후 모든 북한 선박은 일본에 입항 금지를 했다. 짧았던 1차 아베 내각이 해낸 성과다. 만경봉호는 실질적으로 재일 동포가 북한을 방문할 때 이용하는 여객선이었다. 재일 동포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족을 위해 일본에서 많은 물건을 가지고 갔다. 비행기로 중국에 가서 북한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통상적으로 재일동포가 북한을 방문할 때는 만경봉호를 이용했다. 일본이 갑자기 칼로 무 자르듯 만경봉호의 입항 금지를 한 것은 북한에 가족이 있는 재일동포에게 가족과 만나지 못하게 한 것과 같은 조치다. 일본과 북한 사이의 연결고리, 다리를 일본이 잘라버린 셈이다. 나도 그때 느꼈던 이상한 기류를 기억한다. 어제 처음으로 그때 재일동포가 느꼈을 심정을 상상했다. 자신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갈 수단, 조국과의 끈을 일방적으로 잘리다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재일동포가 일본에 살고 있는 것은 100년이 넘는다.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남과 북이 분단되고 남북이 전쟁을 하고 분단이 고정화되었다. 일본에 남은 조선인의 대부분은 한반도 이남 출신이다.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는 재일동포의 교육과 많은 것을 지원했다. 재일동포가 보기에 남한보다 북한이 친일파를 숙청하고 제대로 조선인이 원하는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고 공감했다. 조선인 지식인이 북한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우상화 이후라고 한다. 또 하나는 재일동포의 북송사업으로 1959년 12월부터 1984년까지 일본 정부와 일본 적십자사가 인도적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총련과 북한이 함께 재일동포를 북송한 일이다. 일본 정부와 적십자사는 조선인을 조국으로 송환한다는 미명으로 포장해서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조선인을 일본에서 쫓아냈다. 거기에는 조선 총련과 북한의 재일동포를 환영한 배경도 있다. 앞서 재일동포의 대부분이 한반도 이남 출신이라고 했다. 이남 출신이 북한에 가는 것은 조국으로 송환이 아니라, 땅설고 물선 타지에 가는 것이다. 당시 젊은 학생들이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차별을 받으며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조국건설에 앞장서겠다고 우수한 젊은이가 많이 자원해서 갔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하고 말았다. 북한에 건너간 가족이 인질이 되어 재일동포는 북한에 왕래를 하기 위해 '조선적'을 유지하고 정작 고향인 한국에는 갈 수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북송된 사람 중에는 1948년부터 시작된 제주도 4.3항쟁에서 일본으로 도피한 사람, 한국전쟁과 전쟁이 끝나서 한국에서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강제송환이 되면 한국 정부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서 수용소에서 린치를 당하거나 나라에서 받을 핍박이 두려워서 북한으로 송환을 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북한에 가족을 보낸 재일동포는 북한에서 일본을 방문할 수가 없으니 가족을 만나려면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가야 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먹고살만해졌다고 재일동포가 북한보다 한국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간적인 차원에서 먹고살만한 한국에 있는 친척은 일본에 놀러 와서 만날 수 있고 일본에 공부나 일하러 올 수도 있지만 북한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은 재일동포가 가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다. 북한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가족과 친척은 재일동포의 아픈 손가락으로 한국이 잘되면 될수록 북한을 더 애틋하게 생각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 심정을 잘 몰랐다. 한국은 먹고 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먹고살지 못하니까 도와줘야지 하는 심정이다. 

 

일본에서 '외국인'은 일반적인 이미지와 실질적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일반적인 이미지는 '서양인'을 뜻하는 용모를 지닌 사람이다. 일본에는 그런 '외국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실질적으로 '외국인'이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살고 있던 조선인, 재일동포를 뜻했다. 물론, 중국인도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법무성에서 말하는 '외국인'에 대한 것은 거의 다 재일동포를 뜻했으며 그들이 일본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외국인'이었다. 일본 재류자격으로 보면 '특별 영주자'나 일부는 '영주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 국적을 취득해서 귀화하기도 했다. 일본에 새롭게 외국인이 많이 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버블경기로 노동력이 부족하고 엔고로 일본에서 일하면 수입이 괜찮았을 때다. 1990년 입관 법이 바뀌면서 일본인의 후손인 브라질인이나 페루인 등 남미에서 정주자 자격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전부터 살던 재일동포에 대표되던 외국인보다 말 그대로 외국인이 더 늘어나게 된다. 지금은 일본의 외국인에 가장 많은 수가 중국인으로 거진 새로 온 중국인으로 채워졌다. 

 

재일동포는 일본에서 '외국인'이라고 하지만, '특별 영주자'를 보면 몇 세대에 걸쳐서 일본에 살아온 사람들로 대부분이 한국말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성장해서 국적만 다를 뿐인 사람들이 많다. 서류상, 행정적으로 '외국인'이라고 분류가 될지 몰라도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을 국적에 따라 '외국인' 취급을 하며 차별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들과 귀화해서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는 다양한 '일본인'이 존재한다는 상상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일동포나 외국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스스로 '자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일동포나 일본에 사는 외국인은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북한에 인연을 가진 사람들에게 만경봉호의 입항금지가 조국과 가족을 만나는 다리를 파괴한 것과 같이 이번 한국인 입국 금지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일본인이 자유로운 왕래를 금지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본다. 만경봉호 입항 금지까지 일본에서 북한에 대해 그 역사적 경위가 있기에 함부로 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 일본에 북한과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래 한국에 대해서는 북한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한국을 이지메하고 짓밟기 위해서는 일본이 받을 데미지를 무시해도 되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라는 이름을 빌렸지만 한국인 입국 금지는 원래 아베 총리가 하고 싶었던, 일본 극우의 소망을 이룬 것이 되겠다. 

 

호주가 한국에 대해서는 입국 금지를 하고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다는 보도를 봤다. 호주에는 한국 사람보다 훨씬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이탈리아에 대한 입국 금지를 내리기가 어렵다. 호주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코로나19의 감염 확산 방지이지만 호주에 사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심리적 타격도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을 차별해서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에 대해 역사적인 경위와 양국 사람들이 일본에 얼마나 살고 있는지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법무성 발표에 의하면 2018년 말 기준으로 중국인 764,720명(28%), 한국인449,634명(16.5%) 순으로 거주하고 있다. 가장 많은 외국인이 한국인과 중국인이다. 방일 관광객은 말할 것도 없이 같은 순위다. 

 

일본이 정말로 코로나19 방역이 목적이었다면 한국과 중국에 대해 코로나19 감염 여부를 증명하는 서류를 요구하거나, 일본 공항에서 검사하는 방법도 있었다. 입국 금지의 목적은 방역이 아니라, 역시 정치적인 판단으로 '혐한과 혐중'을 완성하고 싶었나 보다. 일본 극우의 승리다. 조금 있으면 '대일본제국 만세'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