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청명하게 맑고 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가서 더운 날씨였다. 어제 먹다 남은 만두소를 먹기 위해 오늘은 만두피를 사기로 했다. 만두피를 만드는 시간을 절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어제 택배를 보냈다고 해서 택배를 받으려면 집에서 기다려야 한다. 대충 택배가 오는 시간을 알기에 그전에 마트에 가면 된다. 집을 나서서 가까운 공원 뒤쪽에 금난초가 많이 핀 곳에 가서 보고 사진을 찍었다.
다음은 서둘러 마트에 가서 만두피만 사서 나왔다. 곁눈으로 파는 만두를 봤더니 글쎄 만두피 가격보다 싼 것 같다. 나는 만두피를 2종류 샀으니까, 같은 가격에 만두를 25개는 살 수 있다. 그래서 오는 길에 집에서 만든 만두 가격을 계산했더니 재료값만 해도 꽤 비싸다. 이 가격이면 좋은 수제 만두집에 가서 배 터지게 2번 이상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만두피 가격보다 싼 만두에는 어떤 재료가 들어갔을까? 가격을 생각하면 집에서 만드는 것이 아주 비경제적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것이 항상 경제적인 걸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에 만두를 빚고 싶을 때는 하는 것이 좋다.
택배가 오전에 배달하라고 지정했으니까, 12시까지 오는데 오늘은 늦어서 12시 반에 왔다. 택배를 받아서 언니가 보낸 반찬을 소분해서 반은 냉동하고 친한 이웃에게도 나누려고 따로 조금씩 포장했다. 언니네 아들 가족이 연휴라고 하코네에 놀러 갔다가 선물로 홋카이도 피클 2병, 가고시마 간장, 나가노 짠지, 하코네 떡을 사 왔는데 형부가 포장도 뜯지 말고 다 나에게 보내라고 했단다. 그런데 피클이나 간장, 짠지가 꽤 비싸다. 하코네 떡은 아주 맛있었다. 다 나름 좋은 데서 만들거나 유명한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지역 명산품을 만드는 단계에서 시험적인 상품에 대해 비평을 부탁받은 적도 있어서 그걸 떠올렸다. 일본에는 마트에서 본 매우 저렴한 만두가 있는가 하면 별로 든 것도 없는 피클이 아주 비싸게 팔리기도 하는 격차가 아주 심하다. 솔직히 어디서 쇼핑을 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사는 세상이 다를지도 모른다.
낮에는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친한 이웃과 산책하러 나가면서 책을 25권 버렸다. 작은 상자로 하나이지만 책 부피가 있어서 무거웠다. 오후 늦게 친한 이웃과 만나서 반찬도 나누고 같이 산책했다. 오늘은 금난초 탐색을 테마로 주변을 걸었다. 친한 이웃은 나이를 먹었지만 아주 잘 걷는 걸 넘어서 날아다닌다. 특히, 탐색을 할 때는 야성화하는지 정말로 나는 것 같다. 오늘은 내가 알고 있는 금난초가 많이 있는 곳과 많이 핀 곳을 안내했다. 올해 이 주변 금난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모양이다. 며칠 전에 발견한 금난초 군락지를 친한 이웃에게 알려주고 내년에 내가 없어도 금난초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 알려달라고 했다. 군락지에서 금난초가 필 생각을 하면 어떤 풍경이 될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설렌다. 금난초를 많이 발견하면 보물 찾기에서 보물을 찾은 것처럼 뿌듯하다.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재일 제주도 사람들의 역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파친코'에서 주인공 선자 가족이 살고 있는 지역은 이쿠노라고 나온다. 이쿠노는 이전에 아카이노라고 불린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지역이다(https://huiya-kohui.tistory.com/2939). 이런 경향은 시간이 흘러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파친코'에서 제주도는 등장하지도 않고 제주도 사람들도 주목해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스쳐 지나간다. 그건 마치 제주도에 살면서 제주도에 관한 배경 설명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친코'를 보실 때는 거기에 보이지 않는 제주도와 제주도 사람들의 역사가 있다는 걸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 왜 제주도 사람들은 '노예선' 같은 '기미가요마루(군대환)'을 타고 오사카 이쿠노를 향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기본적 소개하는 내용은 1995년에 제출한 박사논문 『20世紀の滞日済州島人ー その生活過程と意識』에서 논문의 배경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각주도 그대로 옮긴다.
제Ⅰ장 예비적 고찰
본 장의 목적은 현재까지 연구성과에서 제주도의 위치를 재검토하고 본 논문의 배경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와 다른 제주도의 지역상을 재고하며, 제주도인의 정체성의 현주소를 조명하기 위해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제주도의 문화적 배경의 특징으로 유교문화와 성격이 정반대인 해양성(해인) 문화와의 공존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유교문화는 육지를 중심으로 사는 정착민의 문화이고, 해양문화는 바다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동민의 문화라는 점에서 그 개념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해양문화를 공유하는 일본과의 접점, 중세 제주도인의 이동, 일본 명치 초기부터 제주도인과 일본인의 관계를 검증하고자 한다. 재일 제주도인의 존재는 일본 명치 초기부터 제주도와 일본의 관계에 규정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제주도인의 일본으로의 이동, 즉 100년에 걸친 도일 시기에 따라 세대를 4세대로 구분하고 각 세대의 특징을 기술한다.
제1절 제주도의 문화적 배경
1. 제주도의 지리적/역사적 배경
제주도는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배경으로 보면 한반도와는 다른 문화를 보유했던 지역이다. 먼저 제주도의 지리적 위치를 보면 한반도에서 떨어진 동지나해의 해로상에 위치해 해인 문화의 영향을 생각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1105년 고려의 군현제에 들어가기까지 탐라국이라는 독립국이었다. 제주도(탐라)는 항상 한반도의 정치정세에 영향을 받아 정치적 종속관계에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독자성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문화적으로 독립성을 갖고 있던 제주도를 정치적, 문화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조선시대(1392년 이후)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결론을 먼저 쓰면 조선시대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책으로 제주도는 정치적으로 한반도에 통합되었지만 문화적인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영향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의 영향을 받았던 시대도 있었다. 1273년부터 약 100년에 걸쳐 몽골의 직할지로서 지배당해 군마 공급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거기에 그 시대에는 몽골의 죄인, 운남 귀족과 원(元) 나라의 왕족 등의 유형지이기도 했다. 한반도 국가의 유형지가 된 것은 고려 말기부터이며 유배자는 주로 정치범이었다. 제주도로 유배된 정치범은 원래 중앙정치에서 중심적인 존재였고 권력투쟁에서 패한 당파의 대표적인 귀족과 지식인이었다.
이상과 같이 제주도는 토착민의 문화에 중국, 몽골, 한반도에서 오는 사람들이 가져온 문화가 어우러져 제주도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1).
제주도의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시점을 제공하는 전경수의 주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제주도의 역사와 사회에 관해 지금까지 연구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제주도를 중심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제주도의 역사와 사회를 저술하고 있는 많은 저서가 (제주도에 대해) 한반도의 국가에 종속된 하위단위로서” 지위를 부여해 왔다(2). 특히, “중세와 근세, 현대에 이르러서는 제주도의 역사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은 거의 고정관념으로 되어 있다”는 상황이다(3). “제주도가 정치적/행정적 하위단위로서 한반도(국가)의 일부로 편입(종속)되기 이전에 탐라 상고시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이후에 확립된 한반도 중심의 제주도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전면적으로 적용되는 걸 비판하고, “제주도를 중심으로 제주도의 역사와 사회를 보는 시각의 결여에 대해 반성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4-5). 거기에 제주도 역사를 연구할 때 사료로서 지금까지 중국에 의한 기록이 활용되어 왔지만 중국 측 사료는 중화사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제주도의 개국신화를 재검토하고 “탐라인(제주도인)은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이 아니라, 수용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는 탐라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요점이 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6).
또, 그는 제주도의 유적과 유물에서 제주도는 오키나와와 연(기원전 323-222년)의 경제권에 속하고, 그 활동범위로 추측되며, 당시 이미 동지나 해양 문화권과 해상무역로가 있었다고 논하고 있다. 거기에 기원전 14년부터 23년까지 유통되었던 화폐가 한반도 북부와 제주도를 경유해서 일본 관서지방까지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활발한 해운무역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제주도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시점이 한반도의 정복국가에 의해 주 변화되어 나라(국가)를 잃어버린 유민의 피난지, 유배지, 황량한 땅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7).
그는 제주도의 역사와 사회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중요한 시점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의 역사와 사회 연구가 제주도 중심의 시각을 갖지 못했던 배경에 대해 약간의 고찰을 하기로 하자.
제주도 역사의 통사로 자주 인용되는 김태능의 ‘제주도 약사(1969년)’와 김석익의 ‘탐라 기년(1918년)’이(1918년) 있지만, 둘 다 중국과 한반도의 사료를 활용해서 제주도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 배경으로 우선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기록이 없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문자문화가 일찍 발달하고 옛 기록이 있던 지역의 사료로부터 제주도 역사를 기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역사책을 서술한 지식인들은 유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교육과정을 토대로 하면 중화사상에 기초한 중국의 사료 및 한반도의 기록을 활용할 때 비판적인 시점이 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조선시대부터 중앙집권적인 정책이 전개되었으므로 원래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제주도사가 기록될 수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먼저 소개한 기록에서 제주도 문화(해인 문화적인 측면)가) 누락된 것은 유교적인 가치관에서 보면 농업이 우위에 있고, 해인의 생활은 하위에 있었기 때문에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제주도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거기에 역사를 문자로 기술하는 것과 지역의 역사 전승 방식과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제주도에 널리 문자 교육이 보급된 시기를 향교가 설치된 시기로 본다면 1392년부터 보급되었다(8). 그때까지 제주도에서 문자 습득은 한정된 사람들뿐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래서 제주도의 역사(각 가족의 역사를 포함)를 전하는 방법으로 전설이나 설화와 같이 ‘구술’에 의해서 전승(구전)되어 왔다. 제주도인의 ‘구술’에 의한 전승 방식을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고, 특히 문자를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승 수단으로 오늘날에도 그 기능을 하고 있다(9). 결국, 역사의 전승 방식은 중앙정부의 기록(문자를 습득한 남성 중심)이라는) 측면과 민중에 의한 구전(문자 습득을 하지 못한 여성 중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주로 중앙정부 또는 한반도(인)에 의한 기록이 채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고선휘 석사논문 『在日済州島出身者の生活過程―関東地方を中心に』에서 재인용.
2-7), 전경수 ‘상고 탐라시대의 사회구조와 운동방식’ 제주사 연구 제4집 제주도 연구회 1987년 11-45페이지
8) 양진건 ‘조선조 제주도 교육시설’ 탐라문화 제12호 제주대학교 탐라문화 연구소 1992년 a 193페이지, 향교는 고려/조선시대에 지방 군현에 설치되었던 국립 유학 학교. 일본의 향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平凡社 『朝鮮を知る事典』에 의함).
9) 제주도의 ‘구술’ 문화는 한국에서 제주도에 관한 연구가 방언, 민요, 구비문학의 조사연구에서 시작된 것으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거기에 의사소통수단으로써 재일 제주도 1세 여성이나 제주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오늘 오전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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