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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도 사람들/'파친코'와 재일 제주도 사람들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의 역사, 국가관 - 1

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맑았지만 기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요즘 매일 번역한 논문을 옮기고 옮긴 것이 맞았는지 원문과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침부터 하는 것이 좋아서 아침부터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 늦게 산책을 나간다. 어제까지 주변에 금난초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오늘은 휴대폰을 집에 놓고 나갔다. 금난초가 시들어 가는 걸 보기가 안타깝기 때문이다. 기온이 높지 않아도 습도가 높은 편이라, 조금 걷다 보니까 금방 땀이 난다. 손수건을 가지고 나가서 다행이다. 어제와 오늘 산책하면서 이 시기에 피는 향기가 강한 꽃이 핀 공원에 들러서 떨어진 꽃잎을 주었다. 어제 나무이름을 보고 검색했더니 일본목련이라고 나온다. 떨어진 꽃잎도 향기가 강해서 방에 놓으면 그 향이 퍼진다. 열대 지방 꽃이나 과일에서 나는 향기가 난다. 어제와 오늘은 걷다 보면 길에 나뭇가지를 잘라서 버린 것이 있다. 아직 싱싱한 걸 가져다 방에 꽂는데 어제와 오늘은 연두색으로 올봄에 새로 자란 가지를 가져왔다. 빨간색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빨간색을 오래 꽂아서 좀 싫증이 났다. 어제는 식용버섯도 봤지만 사진만 찍고 따지 않았다. 버섯도 관찰하고 있으면 아주 재미있는 모양이 있다. 이틀 전에 본 버섯은 꼭 쿠키를 군 것처럼 보였다. 

 

아래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일본 외무성 문서에서 제주도 관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제주도 관련 문서를 발견했을 때 멍했다. 이런 일이 있었나? 왜 일본 외무성 문서에 있을까? 거기서부터 일본 외교문서에서 제주도 관련을 찾기 시작했다. 재미있던 것은 조선 관련과 제주도 관련은 별도로 되어 있었다. 한반도 다른 지역에 관한 것은 다 조선 관련에 포함되었는데 제주도는 별도였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일본의 폭거에 대해 제주도처럼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 저항하는 투쟁을 벌인 흔적을 일본 외교문서에서는 보지 못했다. 명치시대 초기 문서는 일본어가 아니라, 한문이다. 나는 한자를 배운 세대가 아니라서 한문을 읽기가 힘들었다. 주위에 옛날 한문 읽는 법을 물을 사람도 없고 혼자서 힘들게 읽었다. 그런데,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 어업 침략에 맞서 싸우는 부분은 나중에 나오지만 읽으면서도 힘들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이 몇 년에 걸쳐 몇십 명이나 백여 명씩 상경해서 시위를 하고 조선 정부에 항의하면서 로비활동을 하는 걸 보고 대단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았다. 현지에서는 일본 어민과 무력으로 맞서고 있었다. 지금 말로 하면 '집단지성의 힘'이었다. 제주도에서는 19세기부터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서울로 왔을까? 아직 철도가 개설된 시대도 아니었는데, 몇십 명, 백여 명이 단체로 올라왔다는 것은 생업을 팽개치고 왔다는 것이다. 여비는 어떻게 조달했을까? 아마, 모금을 했을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상상하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제주도 사람들은 조선 정부에 매달렸지만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다. 아니, 가장 정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제주도를 버렸다. 조선 정부가 일본에 가장 먼저 식민지로 내준 지역이 제주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필사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사람들의 어장을 일본에 침략당해 빼앗기고 결국 일본에 지배당하게 된다. 논문에 쓴 내용은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인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난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가장 큰 상처는 4.3 항쟁이라고 본다. 일본의 침략은 외국이니까, 당시 조선 정부가 힘이 없어서 제주도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4.3 항쟁은 다르다. 제주도를 무시하고 멸시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 정부였다. 자국 정부의 군대와 경찰, 우익에 의해 제주도민이 학살을 당한 상처는 너무나 크고 아파서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한국의 정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제주도에서 자란 나도 부모도 끌려갔다가 도망쳤다고 아주 단편적으로 들었을 뿐 어떤 일인지도 몰랐다. 제주도 사람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차별을 받았는지 모른다. 연좌제도 아닌데 제주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라는 주홍글씨였고 연좌제였다. 아니,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에 많이 살고 있다는 자체도 몰랐다. 한국의 인구에 비해 재일동포에 차지하는 제주도 사람이 너무 많은 것에 놀라서 재일 제주도 사람들을 연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4.3 항쟁에 대한 추도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 당시 제주도 출신 유학생과 화산도를 쓴 김석범 선생을 비롯해서 재일 제주도 사람 몇 명이 모여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은 막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서 한국에서 추도식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하던 시대였다. 당시 강연을 했던 선생님도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실려서 출국이 어려운 걸 교회의 힘을 빌려서 성사시킬 수가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일본에서 매해, 지금은 동경과 오사카에서 추도식을 행하고 있다. 나는 첫회부터 참가해서 지금까지 동행하고 있다. 그 후 한국의 민주화와 더불어 4.3 항쟁에 대한 진상규명과 보호법 등, 4.3 항쟁 기념일이 정해지고 대통령이 공식으로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다. 일본에서 처음 추도식을 시작할 때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거기에는 다름 아닌 제주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상처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도 사람을 연구한 사람인 내가 보기에는 그런 일련의 활동과 성과도 다름 아닌 제주도 사람들의 자주성에 관한 것이다. 자주성의 회복이라고 할까, 그렇다. 

 

 

제1절 제주도의 문화적 배경

2)    제주도인의 국가관 (1)

 

제주도인의 국가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제주도는 먼저 쓴 것처럼 독립된 나라(탐라국)였다. 제주도가 독립국이었던 것은 제주도인의 국가관 형성에 중요한 요소로 한반도에 편입되기 이전 독립국(삼국시대의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이었던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4세기 고려말, 제주도는 고려 정부가 통치 관할할 수 있는 섬은 아니었다. 원나라 직할 목장이라는 전사를 가진 이 섬은 원나라의 쇠퇴 상황에서 몽골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도민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 정부가 지배하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23). 그로 인해 “나중에 조선 정부에 의한 제주도의 복속화 또는 조선화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정치과제였다”(24). 조선왕조는 제주도의 조선화를 제주도인 관료를 통해 행했다. 그 제주도인 관료는 “도내 최대의 전통적인 세력에 속해” 있던 인물로 그의 “활동 모두가 제주도와 관계가 있고 -중략- 제주도 출신 관료라기보다 오히려 조선의 관료제에 들어간 제주도의 대표였다”(25). 조선왕조가 제주도의 조선화를 제주도인 관료를 통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제주도인 관료 주도로 조선화가 이루어진 제주도는 제주도의 제반 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에 제주도의 자주성은 지켜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그 제주도인 관료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당상관까지 승진하면서도 조선의 관료가 되지 못하고, 끝끝내 세종에게 충실한 탐라인이었다”(26). 제주도인 관료는 제주도와 조선 정부 사이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했고, 그가 한 일은 제주도의 조선화 과정에서 제주도의 자주성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지만 제주도의 향직을 제주도인이 독점하고 있어서 민중 레벨까지 조선화가 침투해서, 국가관 형성은 불가능했다고 본다. 먼저 쓴 것처럼 조선왕조는 제주도를 조선화 시키면서도 제주도인을 중앙으로 진출시키지 않는 차별로 인해 제주도는 고립(지리적, 문화적)되었다. 제주도인 양반과 유생이라는 중심세력에 있던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정치 이념이었던 유교사상을 받아들였지만, 현실적으로 중앙 진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국가관은 현실적인 일체감을 동반하지 않는 관념적인 것에 머물렀다. 그런 경향은 양반과 유생이라는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 제주도인에게도 영향을 미쳐, 제주도인에게 국가(한반도)에 대한 귀속의식을 갖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제주도는 정치적으로 한반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탐라(나라)인이라는 정체성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제주도에서 조선왕조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제주도의 자주성을 지키는 정치체제가 계속되어 왔다. 결국,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지배자는 제주도인 향직을 통해 제주도를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인(탐라)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지배자(조선왕조)에게 고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제주도의 전통 세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왕조가 제주도의 조선화 관정에서 제주도의 전통적인 세력을 매우 경계하는 정책을 전개했던 걸 고려하면 제주도는 조선왕조 지배하에서도 실질적으로는 전통적인 세력과 연대해서 자주성을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가 제주도의 조선화 과정에서 제주도의 전통적 세력에 대한 정책은 다음과 같다. 전통적 세력의 회유(1394년, 1409년)를 위해 자제를 수도로 불러들여 궁정에서 일하는 지위 등을 부여하고, 거기에 전통적 세력인 제주도인과의 역사적 관계 단절과 약체화를 노려서 국가기구에 편입(1404, 1408, 1428)했다(27). 조선왕조는 지배제도에 지방행정과 세제를 한반도와 동일한 원리를 적용해 형식적인 조선화를 관철했다. 결국, 조선왕조에 의해 제주도의 조선화는 “뿌리 깊은 전통 세력에 대처하는 것을 중심으로 했다”(28). 그러나 조선왕조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전통 세력은 “제주도에서 떠난 이후에도 조선의 관료제도와는 별도로 중앙에서 제주도에 영향을 미쳤다”(29). 조선왕조가 제주도의 전통 세력에 대한 견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와 그 전통 세력과의 연대를 단절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제주도는 조선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한 제주도의 자주성을 침범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선왕조가 아닌 전통 세력과 제주도민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전통 세력을 약체화시키고, 그들과 제주도를 단절시킴으로써 제주도의 조선화를 보다 완전하게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의 제주도 조선화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자주성은 현지 제주도인과 중앙에 있던 전통적 세력으로 대표하는 제주도인의 연대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이다. 제주도인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조선왕조(가장 가까운 강대국)에 종속되었지만, 제주도의 자주성을 지키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제주도가 불이익을 받거나 자주성을 침해받는 일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하는 독자적인 정치행동을 했다.

 

나중에 명치시대 일본인이 제주도에 어업 침략(그 과정은 나중에 상세하게 전개하지만 여기서는 제주도인의 정치적인 저항 행동만 다루는 것에 그친다)에 대한 제주도인의 저항하는 정치적 행동에 제주도인의 국가관이 표명된다.

 

일본인의 어업 침략에 반대하는 제주도인은 “본 섬은 어업을 생업으로 하며 특히 어업종사자는 주로 부녀자이므로 외국인이 오는 것을 싫어하며 금지해 줄 것을 섬 주민이 관에 탄원했다. 그래서 목사가 제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섬주민 수십 명이 상경하여 그 사정을 정부에 직소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의 불이익에 대해 제주도 목사라는 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통제하는데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30). 거기에 “원래 (조선 정부가) 어업을 허락한 연안은 전라 경상 강원 함경 4도로서 제주라는 글자(내용)가 없으며 본 섬은 어느 도에도 속하지 않음으로”라는 김옥균(개화파의 중심인물로 친일파, 나중에 일본에 망명)의 발언이 남아 있다(31). 이것은 제주도 문제에 대해 일본 공사와 주고받는 과정에서 김옥균이 발언한 것으로 당시 제주도가 전라도에 속해 있는 걸 김옥균이나 조선 정부가 모를 리가 없다. 여기에서 제주도가 전라도에 속한 걸 부정하는 것은 제주도가 조선에 속하지 않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조선에 속하지 않은 제주도를 위해 김옥균이나 조선 정부가 일본의 어업 침략을 중지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이 이런 발언을 해서 일본의 어업 침략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 배경에는 다름 아닌 제주도인의 정치적인 활동이 있었다. 이때 제주도인이 김옥균이라는 당시 일본 정부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영향력이 있는 인물에게 접근해서 자신들을 대변하게 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제주도인은 당시의 정치정세를 파악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적확한 정치적 행동을 하고 있다. 제주도인의 정치적 행동에서 당시 서울에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 김옥균이라는 인물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어쩌면 서울에 있는 제주도인과 제주도에서 상경한 제주도인의 연대해서 행동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한다. 앞서 쓴 조선왕조의 제주도 조선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주 29 참조) 것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시길 바란다. 동시에 여기에서 제주도인의 국가관을 볼 수 있다. 결국, 제주도는 (조선의) 어느 도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에서 제주도인이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보다 제주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했다는 걸 볼 수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제주도인은 제주도인이지 조선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걸 보면 제주도인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 보여 주는 것 같다.

 

일본의 어업 침략에 대해 제주도인의 거부와 저항은 강경한 것으로 “제주 건에 관해 제반 사정을 귀 정부, 귀국 어부가 제주에서 어업을 함으로 인해 제주민은 생업을 잃어 기아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그 일로 섬주민 수십 명이 계속 상경하여 직소하고 있으므로 좋은 방법을 찾아 주시요”라고 재삼 김옥균이 요청하고 있다(32). 여기서 “제주도민 수십 명이 계속 상경”한 제주도민은 앞서 쓴 “제주도민은 정부에 직소하려고 상경하여, 요즘 수십 명이 서울에 올라와”와 동일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먼저 쓴 것이 명치 17(1884)년 7월 12일부로 이번이 8 20일이었던 것을 보면 제주도인이 상경은 계속되었다고 본다. 일본의 제주도에 대한 어업 침략이 국가 간에서 일시 정지되거나 재개되고 있어 그에 대응하는 제주도인의 저항과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제주도 현지에서의 반대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한 항의행동도 계속되어 “제주도민 15명이 상경해서 일본 어민 도래를 섬주민이 목숨 걸고 반대해 ”라는 기록이, 이것은 명치 20(1887) 5월 22일 부이다(33). 그리고 명치 23(1890)년에 이르러서도 “(일본인에 의한) 제주도인 살인에 관해 들은 바에 의하면 요즘 섬주민 백여 명이 상경하여 일본인 출어를 금지하여 줄 것을 재삼 청원함으로” 제주도인의 저항의 투쟁은 계속되었다(34).

 

먼저 쓴 일본의 어업 침략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상경하여 정부에 항의 활동을 하는 제주도인의 반대는 유생을 포함한 민간인에 의한 것이고, 현지에서의 활동(각지에서 일본인의 무력행사에 대항)하는 한편 조선 정부를 (제주도인이 상경해서 요청) 설득해서 조선 정부가 일본 정부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을 통해서 일본 정부에 어업 침략 중지를 촉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쓴 것처럼 일본의 어업 침략에 대해 몇 년이나 지속해서 저항하는 투쟁을 하는 제주도인의 행동은 자주성을 지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수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행정적으로 조선 정부의 지배하에 있던 제주도인이 조선 정부가 결정한 일에 저항하며 지키려 했던 것은 제주도의 자주성(제주도인의 불이익에 대한 거부) 임에 틀림없다. 그때까지 조선 정부의 지배하에서 지켜졌던 제주도의 자주성이 일본 어업 침략으로 침해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인은 조선 정부에 저항하며 일본인, 일본 정부에도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각주

23-4) 高橋公明「州島出身の官僚高得宗について」『島』41991a 耽羅 41p

25)高橋전게서 a  41,44페이지

26) 高橋전게서 a  57페이지

27-9) 高橋公明「朝鮮外交秩序と東アジア海域の外交」『世界史認識における学研報告刷 1987b 68p

30-31) 日本外務省編纂『日本外交文書』第十七 日本際連合 1963379p

32) 日本外務省 전게서 381페이지

33) 日本外務省編纂『日本外交文書』第二十 日本際連合 1963300p

34) 日本外務省編纂『日本外交文書』第二十三 日本際連合 196328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