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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도 사람들/'파친코'와 재일 제주도 사람들

'파친코'에서 제주도 사람 고한수의 배경-3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 23도로 기온이 높지 않지만 습도가 높고 바람이 쌩쌩부는 이상한 날씨였다. 그래도 아침에 빨래해서 널었더니 바람이 불어서 빨리 말랐다. 오후에 들어서 중요한 일과인 산책을 나갔다. 산책을 나가면 최소 한 시간 이상 걷는다. 날씨가 꾸물거려서 산책 도중에 비가 올까 싶었지만 가까운 곳이라서 비가 오기 시작하면 바로 집으로 올 생각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바로 비가 오고 태풍급 강풍이 불기 시작해서 산책을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 마쳤다. 산책을 마치는 길에서 산초잎을 좀 땄다. 전에는 잘 몰라서 산초 순을 땄더니 다른 잎이 나오지 않아 이제는 자란 잎만 따고 있다. 산초잎을 물에 적신 키친 페퍼에 싸고 다시 랩에 싸서 냉장고에 두면 꽤 오래간다. 요새 죽순을 많이 먹고 미역 생채나 오징어 회무침도 자주 먹어서 산초를 넣는다. 다른 반찬에도 마지막에 산초잎을 넣으면 괜히 고급이 된 느낌이 든다. 제주도에서 회무침이나 횟국을 할 때 꼭 넣은 향신료가 산초이기도 하다. 어릴 때는 이상한 향기가 아주 거슬렸는데 나이가 들면서 이상했던 향기를 즐기게 된 것 같다.

 

어제 친구가 가져온 교토 유명한 찻집에서 샀다는 녹차/ 이슬방울을 마셨다. 나는 녹차를 잘 마시지 않는다. 녹차를 마신다면 현미차를 마신다. 왜냐하면 맛이 괜찮은 녹차는 너무 비싸기 때문에 사서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거기에 적당한 온도를 신경 써서 차를 넣어야 한다. 녹차만이 아니라, 우롱차도 맛있는 건 너무 비싸서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금액이다. 그래서 아예 그런 것에 신경을 끊고 하나씩 포장해서 나오는 여러 종류의 티백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그래도 정말로 오랜만에 맛있는 녹차를 마셔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어쩌다가 녹차를 마신다고 언니가 준 도라야 요캉도 하나 잘라서 곁들였다. 일본 과자는 기본적으로 녹차와 어울리게 맛이 설정되었다고 본다. 맛있는 녹차나 도라야 요캉도 맛을 음미하면서 여유 있게 즐긴 적이 기억에 없는 것 같다. 암환자가 되어 시간이 넉넉하니 이런 걸 즐길 수 있는 좋은 점도 있구나.

 

어제와 그저께는 '파친코' 7화 고한수의 배경에 대한 글을 쓰고 올리느라고 매우 늦은 시간에 잤다. 그래서 아침에도 늦게 일어나 낮에도 피곤했다. 모레는 항암치료를 받으러 아침 일찍부터 병원에 가야 하니까, 오늘은 조금이라도 빨리 글을 올리고 일찍 자야지. 늦게 자는 건 글을 늦게까지 써서라기보다 글을 올리고 나서 한숨 돌리느라고 다른 걸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나는 지금 암환자니까,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된다. 

 

 

 

'파친코'에서 고한수의 배경이라고 했지만 오늘 쓸 것은 직접적인 배경이 아닌 간접적인 배경으로 대정 말기(1920년대 초)부터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가는 수단이었던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던 연락선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의 근대화, 산업부흥은 그들이 일으켰던 전쟁과 더불어 발전했다.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던 정기항로를 운영하던 회사도 마찬가지로 러일전쟁에서 도약의 계기를 잡아서 발전했지만 마지막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폭격을 맞아 배가 침몰하면서 막을 내렸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매우 호전적인 나라로 전쟁을 광분할 정도로 좋아한다. 그들은 제국주의 팽창으로 근린국가, 아시아를 침략해서 얻었던 '영광'만을 기억하고 전쟁으로 잃은 것, 망한 걸 망각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근린국가나 아시아에 대해 막대한 피해를 끼친 '파렴치한' 역사를 기억할 리가 없을 것 같다. 

 

글을 쓰기 위해 며칠 전부터 필요한 자료를 꺼내서 다시 읽고 확인했다. 같은 자료에서도 뭘 활용하고 강조할지에 따라 자료의 쓰임새가 달라진다. 사실, 일본에서 제주도와 재일 제주도 사람에 관한 연구는 일찍부터 시작되었으며 연구 축척이 대단히 많은 편이다. 왜냐하면, 오사카/ 이쿠노에 제주도 사람이 집중적으로 모여 동네를 이루고 산다는 현상, 제주도 사람들만을 운반하기 위한 제주도와 오사카가 직항으로 정기항로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특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을 왕복하는 정기 연락선의 대표격은 역시 관부연락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잇는 관부연락선과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판제 연락선은 승선객의 구성을 보면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관부연락선은 기본적으로 일본인의 조선 진출을 원활히 하기 위한 이동수단이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에 온 조선인이 강조되지만 실은 그보다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이 항상 많았다.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배 권력에 의해 우대받는 입장이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은 각종 우대를 배경으로 조선에서 막대한 부를 축척하기에 유리했던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은 일본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는 것이 당연했다. 민족차별적 임금에 일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 이런 입장도 극명하게 대조적이었다. 참고로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과 일본에 온 조선인 통계를 확인하고 가자.

 

어제 소개한 스기하라의 책, '월경하는 백성-근대 오사카의 조선인사 연구' 224페이지에서 인용하면 "일본인의 세력권 우선 조선에 이주가 있다. 1900년 1만 6천 명이었던 조선 재류 일본인은 1910년에는 17만 명을 넘어 1920년에는 35만 명, 1930년에는 53만 명에 달했다-중략-그들은 상업이나 공무의 비중이 높은 직업 구성이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재류 일본인은 1935년까지 재일 조선인보다 훨씬 많았다. 제국주의는, 동경에 있는 정부나 군, 관청의 정책에 따라서만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상층이 아닌 일본인 입식자에 의해 사회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들은 군과 행정의 비호를 받으면서 때로는 그런 공적기관과 마찰을 빚으면서 현지 사회에서 '생활 중의 권력자'로서 나타나, 조선이나 중국 민중에 대해 차별과 공포감이 뒤섞인 관념을 고정화했다." 일본인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조선으로 진출했다. 

 

그와 반대로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노동자를 운반하기 위한 항로를 보기로 하자.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제주도 사람들을 운반한 정기 연락선 중에 가장 오래 운항한 대표적인 배가 아마가사키 기선부의 '기미가요마루(군대환)'이었다. 일본 국가가 '기미가요'이다. 국가와 같은 선명으로 재일 제주도 사람 1세들의 애환이 담긴 선명이다. 생활사를 들을 때 '군대환'에 탔던 선명한 기억을 많이 들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군대환'이라고 불리던 '기미가요마루'에 대해 자세한 연구를 한 스기하라가 자신의 책 말미(217페이지)에 와서 솔직히 썼다. '기미가요마루'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노예선'이라고 말이다. 성실한 조사와 조사 대상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가지고 쓴 양심적인 일본인 학자의 글이다. 나는 이제야 이런 글을 인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까지 '노예선'이라는 표현을 애써 외면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인용한다. 그렇다고 그가 재일 제주도 사람들을 단지 '노예'로 보는 것은 아니다. 뒤따르는 글에 "한편으로 잘 되면 흰쌀밥과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수단이었으며, '문명'을 습득한 사람으로 귀향하는 꿈을 보여준 '동경하는 배'이기도 했다. 또 '기미가요마루'는 민족독립/ 계급해방투쟁의 공공연한(혹은 숨겨진) 현장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이라는) 적의 존재, 적의 제도, 적의 기술을 '활용'하면서 그걸 넘어서 극복해야 할 상징이었다. 거꾸로 아마가사키 기선부에서 보면 (기미가요마루가) 대기업 조선우선이나 민족적인 협동조합인 동아 통항 조합, 그 외 약소 선박회사를 구축하고 독점적인 경영 항로를 운영할 수 있었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결국, 아마가사키 기선부는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황금노선'을 독점할 수 있었다.

 

스기하라가 '노예선'이라고 한 것은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반은 제주도 사람 입장을 해설한 것으로 깊은 통찰력에 뛰어난 분석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제주도 사람들이 '군대환'을 타고 일본으로 출가하기까지 그야말로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제주도와 서울에서 오랜 기간 일본과 한국 정부를 상대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피나는 저항의 투쟁'을 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사람들이 피나는 투쟁을 벌였지만 패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제주도가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런 걸로 봐서 제주도 사람들은 결코 자발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개개인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식민지 지배라는 구조에서 그들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런 문맥에서 제주도 젊은이들은 '군대환'을 타고 오사카 이카이노, 동경이라는 일본 대도시를 향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해 명치시대(1868년 이후)가 열리면서 시작된 일본의 '왜구적 침략'에 대해 오래 저항해 왔다. 제주도 근해에 일본 군함이 순찰을 돌고 일본 어민이 근대적인 무기를 들고 쳐들어 왔을 때 제주도민은 돌과 몽둥이를 들고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제주도민은 단체로 서울에 올라가 시위를 하면서 정부에 사정하는 로비활동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해 제주도처럼 철처히 저항한 곳은 없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글을 쓰는 오늘, 대한민국의 다음 정부에서는 '정책 협의단'을 파견해서 기시다 총리와 만났다. 부끄러움 따위는 개나 준 '파렴치한' 다음 정부는 2019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적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을 일본에 바친다고, 다시 '자발적 노예'가 되겠다는 충성을 맹세하러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고 싶은 모양이다. 적어도 반 이상의 한국 국민에게 자존심을 짓밟히는 '굴욕'을 선사하면서 낮은 '자존감'을 자랑하는 그들은 제주말로 하면 귀신들린 '귀껏들'이다. 어쩌면 일본 극우, 일본과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나 한다. 아니, 일본 극우보다 더 이상하다. 적어도 일본 극우는 자국민에 대해 공공연히 '파렴치한' 행위를 자랑스러워 하지는 않는다. 일본 극우의 피를 받아 더 진화했나?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출가는 제주도 여성의 상징인 '잠수'나 '잠녀'로 불리는 해녀로부터 시작되었다. 동경에 속한 미야케섬에 1903년 김녕 선두 김병선 씨가 수명의 해녀를 데리고 출가했다는 걸로 시작된다. 제주도 해녀가 일본으로 출가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 어선의 조선 근해와 제주도 근해 침략으로 인해 그들의 독점적이었던 '어장'과 '시장'이라는 판로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제주도 남성의 출가는 비슷한 시기에 일본 어선에 선원으로 승선 1907년 이후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1910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11년에는 오사카 방적 업계에서 모집을 갔다. 제주도에서는 일찍이 남녀를 불문하고 일본에 출가가 시작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해녀가 '어장'을 뺏긴 것처럼 제주도가 실질적인 일본 지배하에 놓였다는 전제가 있다. 당시에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오는 방법은 부산으로 와서 관부연락선을 타는 방법도 있지만, 제주도에서 일본 어선을 타기도 했다. 제주도와 오사카 항로가 개설되기 이전부터 제주도 사람들의 일본을 왕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923년 요코하마에서 관동대지진을 겪는 고한수 부자는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복한 '노예선'이 아닌 관부 연락선을 타거나 일본 어선을 타서 일본에 왔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도와 오사카 항로에는 여객선이 몇 척이나 운항하고 있었지만 2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운항한 것은 아마가사키 기선부의 '기미가요마루'였다. '기미가요마루'는 1923년 3월에 개설해서 취항 개시부터 운항했던 것이 1925년에 좌초로 두 번째 '기미가요마루'가 탄생하게 된다. 제2 '기미가요마루'가 장기 운항을 했기에 제주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군대환'이라고 할 수 있다. '군대환'은 소련 정부로부터 사들인 구식 러시아 포함, '군함'이었다. 제주도 사람을 오사카로 운반한 여객선이 사실 '군함'이었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 팽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도 크다. 당시 제주도에서 볼 때 '군대환'은 존재 자체가 위협적인 것으로 제주도와 일본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군대환'은 승객 정원이 365명이었지만, 실제로 출가하는 승객 정원으로 658명까지 승선이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노예선'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조선인/ 제주도 사람을 태우면 정원이 두 배 가까이 늘어도 된다니 여객선이 고무줄로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을 조선인이라고 개돼지로 취급한 것이 아닐까?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한 현해탄을 건너는데 사람들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있어야 할 때도 많았던 모양이다. 

 

'근대환'을 경영한 아마가사키 기선부에서 보면 1904년 러일전쟁이 획기적인 기회가 되었다. 러일전쟁에 소유 선박 3척이 어용선으로 징발되었지만 전쟁에 이겼기 때문에 경영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어 같은 해에 신사옥을 건축하고 고베와 나가사키에 지점을 개설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와 민간 기업이 전쟁에 협력해서 상부상조해서 발전하는 모습이 보인다. '군대환'이 제주도와 오사카 정기항로를 개설한 것은 1923년 3월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922년부터 부정기적으로 운항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도와 오사카 정기항로에는 '군대환' 이외에도 다른 여객선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돈이 되는 '황금노선'이었으니까. 조선 총독부가 보조금을 주고 조선우선에서 운영하는 1924년부터 함경환, 그 후에 경성환으로 교체되었다. 조선 총독부가 경영하는 조선우선이 흔들리는 것은 제주도민들이 자주적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정기 여객선을 운항한 동아 통항 조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배경에는 1927년 일본에 재류하는 제주도 출신이 3만 명을 넘었다. 제주도민은 조선우선과 아마가사키 기선부에 대해 승선요금 인하를 요구했다. 그에 대해 "새가 아닌 이상 날아서 갈 수가 없고 물고기가 아닌 이상 헤엄쳐서 갈 수도 없다"라고 조롱을 받고 거절당했다. 그런 반응을 보고 화가 난 제주도민은 제주도민 대회를 열고 당시 12엔 50전 승선요금 인하와 승객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교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제주도민은 '우리의 배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기 여객선 운항을 목적으로 모금하고 협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했다. 11월에는 계룡환을 빌려서 편도 6엔 50전이라는 파격적인 요금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그에 대해 조선우선, 아마가사키 기선부, 가고시마 우선 3사는 요금을 같은 가격으로 인하했다가 다시 3엔으로 인하해서 대항했다. 하지만 제주도민의 계룡환에 대한 지지가 컸다. 일본 관헌은 제주도민의 협동조합 활동을 방해했지만, 계룡환 다음에 복목환을 획득할 수 있었다. 복목환은 제주도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취항했지만, 그에 대한 탄압은 대단했다. 관헌에 의해 조합원을 체포하거나 징역형에 처했다. 출항할 때마다 검사를 통해 탄압했다. 일본 자본과 경찰의 친밀한 관계에 의한 것이었다. 복목환은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경성환'과 '군대환'이 한 달에 3회 운항인데 비해 복목환은 2회 운항이었지만 다른 여객선과 비슷하게 승객을 운반했다는 걸 보면 제주도민의 지지가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제주도민의 자주적으로 여객선을 취항했지만 안정된 운영이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1920년대 후반에는 오직 제주도 사람을 오사카로 운반하기 위해 제주도와 오사카 정기항로에 4사가 운항하는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도 제주도와 오사카 항로가 그야말로 돈이 되는 '황금노선'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제주도민에 의해 자주적으로 설립 운항했던 복목환은 1933년 12월에 취항 정지에 이른다. 조선총독부나 아마가사키 기선부의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요금 인하 경쟁에서 적자가 쌓인 것이다. 그래도 잘 버텼다고 본다. 제주도와 오사카 정기항로에 제주도민이 자주적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도민을 위한 요금체계로 운항했다는 건 제주도 사람 기질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걸 기억해주시길 바란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에서 보면 '노예'와 같은 처지인지 몰라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들의 길을 개척하는 '개척자'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제주도 사람들이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과 투쟁의 기록을 보면 눈물이 난다. 왜냐하면, 제주도 사람들은 정말로 옛날부터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외롭게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제주도 사람을 연구했던 사람으로서 미국 드라마에서 제주도 사람들이 제주말을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 그 배경에 있는 제주도 사람들의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비록 암환자가 되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아서 다행이다. 

 

당시 제주도에서 보면 많을 때는 하루나 이틀에 한 번 꼴로 오사카로 갈 수 있는 정기 연락선이 있었다. 승객은 다 제주도 사람이었다. 원래 제주도 사람이라는 식민지 노동력을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한 항로이기 때문이다. '군대환'은 제주도내 10여 포구에 차례대로 들러서 승객을 내리고 태웠다. 제주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춰 포구에 와서 승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살던 마을과 오사카가 직행으로 연결되어 이동이 원활했던 점이 다른 지역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런 '특수성'이 오사카와 동경이라는 일본 대도시에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 정부가 식민지 조선, 제주도에서 사람들을 정책적으로 데려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에서는 왜 제주도를 선택했을까에 대해서는 다른 '서사'가 있다. 다른 기회에 '서사'에 해당하는 '특수한 역사적 관계성'에 대해 쓰기로 하겠다. 오늘도 쓰다 보니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