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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도 사람들/일본사회와 제주도 사람들

제주 4.3 항쟁 74주년 추도 행사 도우미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이 29도로 저녁에는 비가 온다고 한다. 습도가 높아서 고온다습한 장마철 특유의 날씨다. 오늘은 그래도 30도 이하여서 다행이다. 

 

어제는 최고기온이 31도였다. 아침부터 기온 상승이 가팔랐는데 올해 들어 처음으로 전철을 타고 도심으로 나갔다. 제주 4.3 항쟁 74주년 추도 기념 강연과 콘서트가 있어서 도우미로 간 것이다. 4.3 항쟁 추모 행사를 재작년에는 코로나로 취소하고 작년에는 온라인으로 했다. 올해는 기념행사를 하기는 하지만 코로나로 사람이 몰리면 곤란하니까 대대적으로 알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는 항상 접수를 담당하기에 거기 왕언니가 연락을 한다. 메일로 연락이 와서 집행위원이 모이기도 하지만 나는 행사가 있는 당일날 가서 접수를 돕는 도우미를 할 뿐이라, 집행위원이 모이는 곳이나 뒤풀이에도 거의 간 적이 없다. 그래서 거기서 모이는 사람들을 알기는 알지만 정말로 얼굴만 알 정도로 개인적으로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다. 

 

 

동경에서 열리는 4.3 항쟁 추도 기념행사에 가는 일도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아 접수를 담당하는 4명, 나를 빼면 3명에게 주려고 매실잼도 만들어서 냉동해서 지퍼백에 넣었다. 접수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살이 빠졌다고 한다. 적어도 10킬로가 빠졌으니 살이 빠져 보이는 건 당연하다. 가장 친한 사람은 왕언니라서 내가 올해로 동경에서 4.3 항쟁 추도 기념행사에 오는 일도 마지막일 것 같다고 해도 농담으로 아는 모양이다. 나는 나름 심각하게 작은 이별을 준비하느라고 매실잼도 만들어 갔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스치는 바람처럼 상관이 없는 일이다. 

 

코로나로 사람들이 모이는 4.3 항쟁 추도 기념행사도 3년 만에 열린 것이라서 1년에 한 번 거기서만 만나는 사람들과도 오랜만이다.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살짝 들뜬 분위기도 있다. 나는 코로나 이후 어제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장시간 있는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은 손과 발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고립된 생활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람이 많은 곳에 갔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옆에 있는 사람도 사람이 많아서 멀미를 한다고 했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꼈으니 다른 사람이 봐도 이상했을 것 같다. 솔직히,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처음으로 장시간 외출에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서 나도 긴장했다.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중에 제주도 4.3 평화재단에서 제주 4.3 항쟁 추가 진상조사, 재일 제주인 피해 실태조사에 관한 말을 들었다. 나도 거기에 작은 힘을 보태게 될지도 모르겠다. 제주도청에서도 4.3 항쟁 희생자 및 유족 추가 신고를 받는다는 설명도 있었다. 개장시간이 가까워 오니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서둘러 도시락을 먹고 접수 카운터로 돌아갔다. 

 

접수 카운터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벌써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 나는 옆에서 확인하고 넘겨주는 일만 해도 되었다. 관객 입장을 200명 정도로 예상하고 자료를 250부 준비했는데 실제 관객은 300명 정도 입장했다고 한다. 준비한 자료가 부족해서 강연이 시작된 다음에 편의점에 가서 자료를 50부 추가로 카피해서 보충했다. 4.3 항쟁 추도 기념행사가 열리는 닛포리 서니 홀에 다니는 것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는데 어리바리해서 항상 헤맨다. 어제도 전철에서 내리기 직전에 니시 닛포리와 헷갈려서 검색하고 말았다.

 

홀에서는 강연을 하지만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사실 나처럼 밖에 있으면 안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어제 강연 내용도 자료를 챙긴 줄 알았더니 가방에 없었다. 결국, 어제 강연 내용은 전혀 모른다. 강연이 끝나고 2부에는 콘서트가 있는데 2부가 시작되기 전에 주일대사 강창일 씨가 도착했다. 그가 지팡이를 짚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지팡이를 짚을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젊었을 때 고문받은 후유증 때문이라고 한다. 동경에서 4.3 항쟁 추도 행사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강창일 씨가 유학생이었을 때 제주도 출신 유학생 몇 명이 모이고 재일동포와 김석범 선생님 등이 중심이 되어서다. 1988년 간다 YMCA에서 처음 행사를 주최했던 중심인물이 나중에 34년 지나 주일 일본대사가 되어 추도 행사에 참석했다. 나도 34년 전 동경에서 4.3 항쟁 추도 행사를 준비할 때부터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어제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드라마였다면 강창일 대사가 도착하면서 최종적으로 클라이맥스를 맞아 끝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사실, 내가 수다를 떨었던 편집자에게 당시 한국에서는 군사독재 정권이라서 할 수가 없었던 4.3 항쟁 추모 행사를 동경에서 시작했던 인물이 34년이 지나 주일대사가 되어 오는 일이 일본에서 일어날 수 있겠냐고 했더니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한다. 나도 그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진전된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했다고 했다. 당시 한국에서 보면 일본의 민주주의가 부러웠다고 일본 시민사회가 한국 시민사회를 응원했던 일을 기억한다고도 했다. 지금 동경에서 보면 일본이나 한국이 다 지나간 옛날이야기처럼 지난날이 퇴색되어 보인다. 그 편집자가 "일본에는 희망이 없다"라고 슬프게 말한다. 나는 못 들은 척해서 그가 혼잣말한 것으로 했다. 나도 같은 느낌이 들지만 동의하기에는 너무 슬프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김석범 선생님이 고령으로 몸이 약해져서 잘 걷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택에서 행사장으로 택시 타서 오는데 행사에는 참석할 수가 없고 강창일 대사와 만나고 제주도에서 오신 손님들과 뒤풀이하는 장소에 참석한다고 한다. 나도 김석범 선생님을 뵙지 않은지 꽤 오래되어, 어쩌면 김석범 선생님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에 택시가 도착한다는 시간에 맞춰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도착하지 않아서 알게 된 것은 호텔에 오지 않고 뒤풀이 장소로 직행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석범 선생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행사했던 장소에 돌아왔더니 다 끝나 정리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도 거진 돌아가고 없는 곳에 내 가방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기에 인사를 할 필요도 없이 늦은 시간 가방을 메고 집을 향했다. 집에 도착했더니 밤 11시가 넘었다. 피곤해서 저녁도 건너뛰고 목욕만 하고 잤다. 이렇게 나의 34년에 걸친 동경에서 4.3 항쟁 추모 기념행사 도우미로 참가했던 활동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막을 내렸다. 학부 학생이었던 나는 박사를 마치고 대학에서 일을 하다가 올해는 대학에서 하는 일도 마쳤다. 34년이라는 게 짧은 기간은 아니었던 것 모양이다. 

 

박보 씨가 콘서트 준비를 하는 장면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