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14 ‘자해’하는 사람들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이 30도 밖에 안 되는 선선한 날씨였다. 일요일이지만 오늘도 도서관에 갈 예정이었다. 내일부터 도서관이 일주일 휴관에 들어가기 때문에 오늘 가서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빌리려고 했다. 그러나, 도서관 가는 걸 쉬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싶었다. 쌀을 씻고 잡곡을 넣어서 밥솥에 세트를 했다. 평소에 밥을 잘 안 먹어서 반찬이 별로 없다. 밥냄새가 맛있게 느껴졌다. 여주를 볶고 계란 프라이에 오이도 잘라서 먹었다. 아침을 먹고 청소를 했다. 오늘은 날씨가 서늘해서 청소하기에 좋은 날씨다. 지난 주는 청소를 건너뛴 탓에 집이 엉망이다. 지난 주에 손님이 두 명 와서 이틀 밤을 자고 갔다. 손님이 오면 오기 전에 준비하고 온 동안에 안내하고 식사를 준비한다. 손님이 가고 난 후에 뒷정리하느라고 신경이 쓰인다. 너무 더웠던 걸 핑계로 청소를 건너뛴 것이다. 작은 집이라도 청소를 하면 한 시간은 걸린다.
오늘 청소는 대충모드로 해서 도서관에 안 가고 쉬기로 했다. 일요일이니까.
요새 신문은 올림픽으로 뒤덮여 있다. 오늘은 스마프가 해산한다는 뉴스가 가장 큰 뉴스다. 올림픽에도 관심이 없고 스마프가 해산하는 것도 그냥 뉴스일 뿐이다.
며칠 전에 읽은 ‘자상하는 사람들’에 관한 책 내용을 소개한다. ‘자해’하는 사람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한다. 남자들도 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것이 ‘자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여자들의 ‘자해’는 리스트컷이라고 칼로 팔을 긋거나 직접적으로 자신의 몸에 폭력을 가한다. 남자들은 주먹으로 벽을 치거나, 벽을 머리로 들이 받거나, 가구에 몸을 부딪친다. ‘자해’하는 사람 96%는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한다. ‘자해’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아서 10대 청소년 10%는 적어도 1회 이상 ‘자해’를 하며 그 10%의 60%는 10회 이상 ‘자해’한다. ‘자해’를 하는 사람들은 빈부에 차가 없다고 한다. ‘자상’ 그 자체는 ‘자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10대에 ‘자해’을 했던 사람들은 10년 이내에 ‘자살’할 확률이 400-700배 높다고 한다. 그리고, ‘자해’하는 청소년은 일찍 음주나 흡연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자해’라는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행위는 ‘자신이 어쩔 수가 없는 불쾌한 감정에 대한 고독한 대처법’이다. ‘자상’은 ‘학대’나 ‘이지메’, 가족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를 ‘몸의 상처’로 전환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자해’로 눈에 보이는 상처로 만들어 인식하는 것이다. ‘자해’는 다른 문제에 대한 대처법이기에 적극적인 측면이 있다. ‘자해’하는 행위로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 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해’가 상처에 대한 치료는 아니다. 대부분은 자신만을 위한 ‘자해’지만, 20%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들다는 걸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자해’한다는 말을 들으면, ‘놀란다’거나, ‘화를 낸다’, ‘지나치게 친절하다’, ‘모르는 척한다’고 한다. 그런 것은 ‘자해’를 말하는 사람에게 좋은 대처법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섣불리 ‘이해한다’고 해서도 안된다. 그냥,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말을 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자해’가 잘 못 된 것이거나, 다시는 하지 말라는 충고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란다.
정신과에 다니면 약을 남용해서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약을 많이 주는 의사를 좋아해 다른 문제를 만든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들이 ‘자해’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실태란다. ‘자해’는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한다. 1.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 2. 지배당하는 관계, 3.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관계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성이라고 한다.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이 가족문제로 ‘자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버지의 폭력’이나, ‘알콜중독’, ‘성폭행’ 등이 알려지면 '이지메' 당할까, 자신이 부끄럽고 가족이 붕괴될까 두려워 ‘자해’를 한다고 한다. 나는 '자해'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일본에 사는 외국인이라고 느껴져 기가 막혔다.
학생들을 접하는 직업이라, 학생들이 의견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매일 죽을 것만 생각하는데 좋은 방법이 있겠냐’고 감상문으로 질문을 받았다. 수업에서 소개하면서 ‘나에게는 좋은 대답이 없다’고 한다. 그런 질문을 받고 무시하지 않고 성실하게 ‘대답’한다. 그게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모른다. 적어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학생은 엄마에게 ‘학대’ 받는다면서, 결석했는 데 아팠다고 했다. 그 표현을 ‘황천길 갈 뻔했다’고 해서, 내가 특별한 반응을 안 했더니, 다음 주에 다시 한번 말한다. ‘그래, 지난번에 말했잖아, 죽을 뻔했다고’ 한다. 그 학생은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나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힘든 학생은 민감한 촉으로 내가 받아줄 것이라는 걸 안다. 사실, 걱정스럽지만,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른다. 섣불리 동정심을 내보일 수도 없다. 학생에게 바람직한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스럽다. 단지, 나는 기억하고 걱정하며 옆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볼 따름이다. 많은 젊은이가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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