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최고기온이 19도로 오전부터 촉촉하게 봄비가 오고 있다. 어제와 그저께 최고기온이 26-7도까지 올라가서 갑자기 날씨가 더웠다. 오늘은 비가 오지만 내일을 다시 최고기온 27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변화무쌍한 기후에 인간이 적응해야 한다. 일교차가 심한 날씨는 쉽게 피로를 느낀다. 어제도 쌀을 사러 가느라고 왕복 1시간 정도 걸렸다. 오후 늦게 따로 산책을 나가서 3시간 이상 걷고 왔다. 어제는 모렐 버섯을 오전과 오후에 나눠서 아주 많이 따서 25개나 땄다. 오후에 산책을 나가는데 아는 사람이 죽순이 있다고 캐서 가져가라고 해서 큰 죽순을 하나 캤다. 거쳐서 가는 공원에서 모렐 버섯도 많이 땄다. 부추를 베려고 작은 나이프를 가지고 갔는데 손에 수확물이 많아서 부추는 다음 기회로 미뤘다. 어젯밤에는 느긋하게 목욕을 오래 하고 잤더니 오늘 아침에 9시 가까이 돼서 깼다. 평소에는 6 시대에 깨는데 정신없이 잔 모양이다. 오전에 언니와 형부가 많은 식량을 싣고 왔다. 항암치료를 못 받았다고 해서 걱정이 된 모양이다. 오늘도 언니가 가져온 맛있는 걸로 풍성하게 먹는 날이다.
'파친코' 원작을 아직 읽지 않았고 다른 편도 유튜브를 통해서 요약을 봤다. 7화는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 남자 주인공이 고한수라고 했을 때, 제주도 사람이라는 설정인가? 했다. 왜냐하면 제주도는 고량부라는 삼성이 땅에서 솟았다는 삼성혈이 있는 신화가 있을 정도로 고량부 성의 기원이 제주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한수가 제주도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거나 암시하는 신은 없었던 것 같다. 고한수가 나에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친코' 예고편에서 그가 흰색 정장에 모자까지 갖춰쓰고 구름다리 위에 서있는 장면이 있다. 그 구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나는 예고편을 보고 내가 아는 삼춘이 밀항할 때 어머니가 흰색 정장에 백구두까지 갖춰준 이미지와 완전히 겹쳐졌다(https://huiya-kohui.tistory.com/1035?category=759980). 그 삼춘도 옛날 사람으로는 큰 키에 체격이 좋고 인물도 잘 생겼다. 공부도 했지만 예술적인 소양도 뛰어나서 자식들은 다 예술 분야에서 일을 한다.
그동안 '파친코'의 주무대가 된 것이 한국에서는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이 부산, 영도였다. 영도도 옛날부터 제주도 사람들이 이주해서 사는 대표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선자가 어렸을 때 물질을 하고 주위에 해녀가 있는 설정에서 제주도 해녀 문화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기도 했다. '파친코'에는 제주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도처에 제주도 코드가 감춰진 것으로 보였다.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는 곳도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대표적인 제주도 사람 동네로 현재 이쿠노구(生野区), 옛날 행정구역 상으로 히가시나리구(東成区)에 속했다. 현재 이쿠노보다 이전 지역 명칭인 대판 이카이노가 재일 제주도 사람 1세들에게는 친숙한 지명이다. 이카이노(猪飼野)는 한자로 멧돼지를 기르는 들판이라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돼지를 통칭 멧돼지라고도 하기에 글자 그대로 멧돼지라는 의미가 아닌 돼지를 키우는 들판이라는 뜻일 것이다. 더 오랜 옛날에는 멧돼지가 출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한국에서 돼지띠가 일본에서는 멧돼지 띠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거주환경으로서는 매우 열악한 지역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도 재일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보면 거주환경이 매우 열악하지만 재일동포가 많이 산다는 이유로 도시계획에서도 배제되어 재개발도 하지 않고 인프라도 열악한 상태로 방치된 곳이 많다.
'파친코' 7화에서는 고한수 편이었다. 나는 배우 이민호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없다. '파친코'에 관심을 갖고 보니까, 이민호가 남자 주인공으로서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봤다. 지금까지 다른 드라마를 본 인상으로도 잘 생긴 인물이 돋보이기는 해도 연기를 잘하는 인상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본 '파친코'에서도 연기를 잘하는 걸로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이번 7화에서는 그의 인상이 매우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잘 생긴 인물이 돋보였다면 이번 화에서는 극 중 인물이 된 것 같았다. 잘 생긴 인물로 가려졌던 연기력이 벽을 뚫고 나온 것처럼, 잘 생긴 인물이 아니라, 인간 고한수가 보였다. 배우로서 이민호가 이번 '파친코'로 크게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7화는 고한수의 성장과 좌절, 뿌리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회차였다고 할 수 있다. 고한수가 관동대지진에서 살아남은 1923년 요코하마에도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다. 드라마에도 나왔듯이 관동대지진에서 요코하마에서도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있었다. 나중에 자세히 보기로 하자.
극 중에서 고한수 아버지를 보면 제주도에서 서당을 다녔고 적어도 중등교육을 받아서 제주도에서 학교 선생님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격투 도박장에서 주산을 잘 다루고 회계를 본다면 부기에 대한 개념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남의 돈을 잘 벌어준다는 그는 경영학적 소양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가 어부였다지만 배경을 가만히 보면 양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한수의 아버지는 당시 제주도에 있어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별다른 활로를 찾을 수가 없다는 판단하에 일본에 와서 자존심을 버리고 야쿠자 오야붕 밑에서 일을 한 걸 보면 제주도보다 발전한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을까 한다. 거기에 잠재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물로 보인다. 아들 한수에게는 일본에서 차별받고 멸시받는 식민지 백성, 조선인으로 살아야 하는 굴욕적인 삶이 아닌 실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미국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가서 돌아오지 말라고까지 한다. 그는 제주도나 일본에서 자신의 삶을 벗어나고 싶은 '통시'라고 했다. '통시'는 제주말로 '돼지우리'로 예전에 제주도에서는 집집마다 돼지를 키웠는데 재래식 변소에서 사람들이 배출한 똥을 받아먹는 '똥돼지'였다. '돼지우리'의 '돼지'는 '똥돼지'를 의미한다. '똥돼지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살기에 쾌적한 곳이 될 수가 없다.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다. 지금은 제주도 '흑돼지'가 맛있다고 비싸도 먹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그 '흑돼지'의 조상이 아마 이전 '똥돼지'가 아니었을까? '돼지'는 어느 쪽이 더 좋았을까?
'파친코'가 선자를 중심으로 한 '모정'이 전편에 깔리는 여성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엮어진다면 7화에서는 고한수와 그의 아버지, 남자들의 이야기, 아버지의 절절한 '부정'을 보여줬다. 선자의 '모정'에서는 아버지의 부재가 있다. 고한수 아버지의 '부정'에서는 어머니의 부재가 있었다. 하지만 선자의 '모정'과 고한수 아버지의 '부정'의 공통점은 자신들을 희생해서라도 자식들이 잘 살길 바라는 희생정신이다. 그 부모들이 산 시대와 상황이 자신들을 희생해서라도 다음 세대가 잘 사는 것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재일동포가 많이 사는 곳으로 대표적으로 알려진 곳이 몇 군데 있지만, 실은 제주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에서도 대도시에 모여 사는 경향이 강하다. 예전에는 오사카 이쿠노가 일본에서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근래는 동경 신오쿠보가 유명하지만, 신오쿠보는 재일동포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에 와서 정착한 '한국인'이 많이 들어온 곳이다. 이전부터 재일동포들도 살았고 제주도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는 동경 아라카와구 미카와시마(三河島)로 여기도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우에노도 미카와시마에서 가깝다. 동경과 오사카 일본의 대표적인 대도시에서 재일동포가 많이 사는 곳이라고 알려진 곳은 실은 제주도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재일 동포 1세가 일본에 건너올 무렵 제주도와 다른 지역은 다른 나라라도 해도 될 만큼 언어나 문화적으로 달랐다. 대부분의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시(현재 행정구역상 제주시가 아닌, 옛날 성내)라는 제주도내의 도시에 간 적도 없는 사람들이 살던 마을에서 일본으로 오는 정기 연락선이 서는 포구에 걸어와서 배를 타고 바로 대도시 오사카로 직행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제주말이다. 제주말도 지역이나 세대에 따라 다르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고 보니 '파친코'에 나오는 제주도 사람 고한수나 그의 아버지의 일본어 발음은 제주도 1세 발음보다 거칠다. 제주도 사람이라기보다 육지사람 억양의 일본어 발음이다. 제주도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오사카에 있는 제주도 사람들 동네로 직행했기 때문에 제주말 밖에 모르고 제주도 사람들 세상에서 살아간다. 당시 제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만날 가능성도 적고 말이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제주도와 경상도는 문화적으로도 매우 달랐을 걸로 본다. 그렇기에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을 곧 '재일동포'가 많이 사는 곳으로 대표되어 왔지만, 사실은 제주도 사람들로 '재일동포'를 대표한다면 바이어스가 크다. 이쿠노구나 미카와시마로 대표되는 '재일동포'가 많이 사는 지역은 '재일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한국의 총인구에 제주도 인구 비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재일동포에 차지하는 제주도 사람들이 많다. 오랜만에 석사논문을 쓸 당시 한국 인구와 제주도 인구, 재일동포 중에 제주도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을 봤다. 여기서 살짝 인용하기로 한다. 서론 맨 처음, 연구 배경에 나온다. "1988년 12월 말 현재 재일 조선/한국인 677,140명 중 제주도 출신은 117,687명으로 (재일동포) 전체의 17.3%를 차지한다. 한국의 1990년 현재 인구가 43,520,200명 중 제주도 인구는 514,600명으로 한국 인구의 1.2%를 차지하는데 불과하다." 역사적으로도 제주도의 인구는 전체의 1% 내외라고 보면 될 정도다. 근래 제주도에 유입하는 인구가 늘어서 제주도 인구가 불어난 상태이지만 크게 보면 1%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당시 재일동포의 출신지를 보면 경상남도 본적이 234,184명으로 가장 많고 두 번째가 경상북도 본적 165,084명이며 세 번째가 제주도 본적이 많아서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를 합치면 재일동포의 76%나 되었다. 한반도 남쪽 지역 출신이 재일동포의 99%를 차지했다." 북쪽에서는 일본이 아니라, 중국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990년 현재로 봐도 제주도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사람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한 집에 4명 가족 중 1명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1936년에 이미 제주도 인구의 30% 이상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걸 보면 당시 제주도 사람들에게 일본 대도시와의 왕래가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 일본과 제주도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석사논문을 조금 더 인용하면 "제주도 마을에 상주하는 인구가 약 500명인데, 동경에 살고 있는 마을 출신자가 1,400명이나 되는 곳도 있었다." 논문에서 다른 논문을 인용해서 마을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아마, 4.3 항쟁에서 피해가 컸던 마을이 아니었나 한다. 제주도에서 성장해도 가족 중에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일본에 대한, 재일 제주도 사람들에 대한 거리감이 다르다. 나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족 중에 일본에 사는 사람이 없어서 일본은 가까운 외국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가 몰라서 그렇지 제주도와 일본(재일 제주도 사람 커뮤니티)은 보이지 않는 수맥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중에 오사카에서 연구할 때 인터뷰를 통해서 알았지만 내가 나온 중고등학교도 재일 제주도 사람들의 기부로 지어진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졸업생 대부분이 그런 사실을 몰랐다. 나도 제주도 사람들을 연구한 덕분에 알게 되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에 많은 것에는 다름 아닌 일본과 제주도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성'에 기인한다. 나중에 다른 기회에 '특수한 역사적 관계성'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단도직입적으로 제주도 사람이 일본에 많은 것은 1923년에 개설된 오사카와 제주도를 잇는 정기항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과 일본을 잇는 대표적인 항로는 1905년에 개설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운항하는 관부연락선이었다. 일제 강점기 관부연락선은 사실상 일본인의 조선 진출을 원활하게 하는 여객선으로 조선인의 승선 비율을 다른 논문에서 인용하기로 한다. 1986년 스기하라 도오루의 '재판 조선인의 도항 과정-조선/제주도와 관련해서'를 보면 "대정 후기(1920년대)와 소화 초기(1930년대)에 걸쳐 관부연락선 승객 중 조선인의 비율은 시모노세키행이 30-40%, 부산행이 30%인 것에 비해 판제 항로는 승객의 압도적으로 조선인(제주도인)이 차지하고 있었다-중략- 1934년 8월 1일 오사카 치코 산바시에서 제주도로 출발한 기미가요마루(군대환)에는 563명의 승객이 탔는데 그중 일본인은 2명뿐이었다. 그 외에 이동 경찰관으로 오사카부 경찰서 사상계 1명과 오사카 치코 수상서 1명이 사복으로 근무하고 있었다"라고 한다. 오사카와 제주도를 잇는 연락선은 사실상 제주도 사람이라는 노동력을 오사카로 운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관부연락선이 일본인의 조선 진출을 원활하게 했던 것과는 반대로 1923년부터 운행된 오사카와 제주도를 잇는 정기항로 연락선은 조선인/제주도 사람들을 일본 대도시로 이동시키는 대표적인 항로였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다음 편에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에 얼마나 많았는지, 선자가 오사카 이쿠노에 도착한 1931년 전후를 중심으로 이쿠노의 제주도 사람에 대해서 집착해서 쓰기로 한다. 더불어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요코하마의 외국인, 제주도 사람들과 관계를 쓰기로 하겠다.
2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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