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최고기온 27도까지 올라간 따뜻한 날씨였다. 어젯밤에 블로그를 올리고 자느라고 늦게 자서 아침에 깨는 것도 늦었다. 흑미와 검은콩을 넣은 현미밥을 안치고 간단하게 요가를 했다. 아침을 차려서 먹고 어젯밤에 쓴 글을 약간 수정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청소를 후다닥 했다. 어제 청소기를 돌렸는데 이틀 전부터 갑자기 머리가 많이 빠지기 시작해서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오늘은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해서 널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일을 하면 왠지 시간을 벌어서 하루가 길어진 느낌이 든다. 어제 쓴 글을 보면서 오늘 쓸 걸 생각하고 필요한 책을 찾아냈다. 그러는 사이에 오전이 쏜살같이 지나고 말았다. 오후에는 오늘 쓸 글에 필요한 책을 찾아서 다시 읽었다.
친구가 대학 본교에 회의가 있다고 회의가 끝나면 온다고 한다. 평일 점심에만 영업하는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친구 회의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서 나는 도보로 가고 친구는 차로 와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가보니 만석이라 친구가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자리가 나서 둘이 야키 카레라는 같은 메뉴를 주문해서 먹었다. 집에서 만들기 귀찮은 메뉴다. 점심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나왔다. 같이 붙은 가게에서 고구마를 많이 사서 집으로 왔다. 친구가 어머니랑 교토에 여행을 가서 기념품을 이것저것 사고 당근 케이크를 굽고 과자에 차도 두 종류, 비싼 영양제도 두 종류에 당근주스까지 바리바리 많은 걸 들고 왔다. 내가 아픈 것 때문에 친구는 충격을 받아서 우울한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아픈 본인도 그렇게 우울하지 않으니까, 주위 사람들이 우울해하지 말라고 했다. 친구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만날 수 있을 때 많이 만나 두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나도 냉장고에서 언니가 가져다준 맛있는 음식 중에 친구가 좋아하는 걸 하나씩 챙겨서 줬다. 친구는 자기가 선물을 가져왔는데 오히려 더 많이 받고 간다고 좋아했다.
친구가 많이 가지고 간 건 사실이다. 음식도 친구가 좋아하는 걸로 보통 사기가 어렵다. 나에게는 한 사이즈 커서 입기가 애매했던 독일제 명품 코트를 입혀보고 맞아서 가져가라고 했다. 신발도 여름 샌들과 겨울 눈 올 때 신는 스니커 두 켤레 줬다. 다음에 오면 내가 좋아해서 많이 모아둔 스카프를 같이 보고 친구가 쓸 수 있는 건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 친구가 오늘 가지러 온 건 내 박사논문이다. 논문을 가져가 비서를 시켜서 디지털화한다고 했다. 내 박사논문이 여섯 권이 한 세트로 부피도 만만치 않다. 석사논문 한 권에 다른 책도 세 권 넣었으니 짐이 무겁다. 나도 가벼운 걸 하나 들고 친구 차까지 가서 배웅했다. 야, 박사논문 제출할 때 세 세트를 도저히 들 수가 없어서 카트에 싣고 같잖아, 논문을 접수하는 사람들도 당황하더라, 참 무식하게 일을 했다니까, 하면서 웃었다.
석사논문은 각본가 선생님과 친구가 워드로 입력하고 오자 탈자를 최종 확인했다. 400자 원고지로 1,000장까지는 가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달리 띄어쓰기가 없다. 나는 친구 석사논문을 최종 확인했다. 우수한 일본인 친구가 쓴 논문에도 틀린 일본어가 있어서 일본인도 일본어를 틀린다는 걸 알고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 내 석사논문은 그대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출판사에서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갔더니 책으로 나온 것이다. 그 걸 지방 국립대학에 취직한 후에 다른 교수에게 말했더니 욕을 먹었다. 아주 정색을 하고 사기도 적당히 치라고 했다. 우리처럼 중견인 사람들도 책을 낼 수가 없어서 몇 명이 모여서 돈을 모아 책을 겨우 한 권 냅니다. 석사논문? 당신 같은 외국인 초짜가?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사기꾼 취급을 받았다. 사실, 석사논문이 그대로 책이 된다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라서 상상하기가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는 몰랐다. 학부논문도 간추려서 잡지에 실었는데, 그것도 출판사에서 가져오라니까, 가져갔더니 잡지에 실렸다. 그런 일이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몰랐다. 오늘 친구가 와서 내가 한 일을 모아논 상자를 보였더니, 좀 질린 얼굴을 한다. 상자에 넣지 못한 것도 아주 많은데, 아무래도 나는 일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이다. 이렇게 쓰면 내가 대단히 우수한 사람인 줄 오해하면 안 되니까, 사실을 밝힌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간단히 쉽게 한다. 그리고 쉬지 않고 계속한다. 그런 게 모이면 아주 많아진다. 꽤 단순한 일이다.
작년 연말에 복막염으로 긴급 수술을 했을 때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 나도 죽는 줄 알았다.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에 살아생전에 경험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했던 일이 영화처럼 스쳐갔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에 내가 했던 일들이 크레디트가 되어 올라왔는데 너무 길어 크레디트가 끝나질 않아 화가 나서 '미친년'이라고 소리쳤다. 그때 내가 '미친년'처럼 일을 했다는 걸 알았다. 크레디트가 끝까지 올라가서 영화가 끝났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파친코' 이야기로 돌아가자. 1931년에 선자가 도착한 대판 이카이노, 오사카 이쿠노의 옛날 지명으로 재일 제주도 사람 1세는 오사카를 한자로 대판이라고 읽었다. 이카이노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많아서 옛날에는 일본국 이카이노 김 아무개 하면 편지가 배달되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제주도 사람들은 끼리끼리 잘 알고 있어서 주소가 정확하지 않아도 본인에게 전달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건 전설이 아닌 사실로 봐도 된다.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에서 주로 살고 동경과 오사카를 왕복해도 동경 제주도 사람 동네와 오사카 제주도 사람 동네를 왕복한다는 의미였다. 예를 들어 밀항을 하는 사람들이 밀항 비용을 외상으로 해서 밀항한 후 다달이 갚아간다. 지금처럼 신용카드 할부도 아닌데,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도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에 어디에 있는지 다 알 수 있어서 외상이나 할부가 성립했다. 제주도 사람들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측면이다. 지금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한 다리 건너면 다 알 수 있다고 인식한다. 그렇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고 나쁜 일을 해도 주위에 다 알려지게 된다는 걸 안다.
1931년 선자가 이카이노에 도착하기 전, 오사카에 조선인이 얼마나 살고 있었는지 1998년 스기하라 도오루의 '월경하는 백성-근대 오사카의 조선인사 연구'라는 책에서 보기로 하자. 54페이지에 실린 표를 보면 1910년부터 통계가 있다. 1910년 206명, 전체 조선인 중 9.2%에서 출발해서 점차 늘다가 1917년 2,235명, 15.4%로 는다. 오사카와 제주도를 잇는 연락선이 개설된 1923년에는 1922년 13,337명에서 갑자기 1만 명 이상 늘어난 23,635명으로 늘고 일본에 있는 조선인 전체 중 오사카에는 29.5%를 차지할 정도로 급격히 늘었다. 1924년에는 전해보다 1만 3천 명 이상 는 37,046명으로 전체 재일 조선인의 31.3%이다. 1928년에는 55,209명으로 늘었지만 23.2%로 재일 조선인 전체가 늘어간다. 선자가 일본에 도착한 1931년에는 85,567명으로 오사카의 조선인은 재일 조선인의 27.5%를 차지했다. 이듬해는 85,567명으로 늘고 27.5%가 된다. 1932년에는 118,466명으로 30.3%가 된다. 1935년 202,311명, 32.3%이다. 1940년 312,269명, 26.2%로 일본에 체류하는 조선인 전체가 많이 늘었다.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42년 412,748명으로 재일 조선인의 25.4%가 오사카에 있었다. 참고로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격해서 태평양 전쟁의 피크를 향해서 폭주한다.
오사카 재류 조선인 | 재일 조선인/오사카 조선인 비율 | |
1910년 | 206 | 9.2% |
1917년 | 2,235 | 15.4% |
1922년 | 13,337 | 22.3% |
1923년 | 23,635 | 29.5% |
1924년 | 37,046 | 31.3% |
1928년 | 55,209 | 23.2% |
1931년 | 85,567 | 27.5% |
1932년 | 118,466 | 30.3% |
1935년 | 202,311 | 32.3% |
1940년 | 312,269 | 26.2% |
1942년 | 412,748 | 25.4% |
다음은 재일 조선인과 오사카 재류 조선인의 출신지를 보기로 하자. 제주도는 전라남도의 통계에 속해있어 전라남도의 대부분은 제주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스기하라의 책 54-5페이지를 보기로 하자. 오사카시 사회부 조사를 보면 1928년 6월 현재 오사카시에 사는 조선인 4만 5천 명의 출신지는 전라남도 48%, 경상남도 22.4%, 전라북도 9.3%, 경상북도 8.1%로 합치면 87.8%를 차지한다. 1935년 말 현재 내무성 통계에 따르면 재일 조선인 62만 6천 명 중 출신지 별로 보면 경상남도 37.1%로 가장 많고 다음이 전라남도 22.7%, 경상북도 22.2%, 전라북도 5.1%의 순으로 합치면 87.1%를 차지한다. 하지만, 같은 통계에서 오사카부 재류자 20만 2천 명의 출신지를 보면 위에 소개한 4개도 출신이 86.9%로 전국적 경향과 딱 들어맞지만, 내역을 보면 전라남도 41.6%, 경상남도 26.7%, 경상북도 12.5%, 전라북도 6.1%로 1928년 오사카 통계와 비슷하다. 일본 전국에서 봐도 오사카는 특이한 비율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제주도 출신이 오사카에 집중적으로 거주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남도청 직할에 있어서 전라남도로 통계가 잡혔다. 1935년 제주도청 통계를 보면 제주 인구 19만 8천 명에 일본 거주 제주도 출신자는 4만 8천 명이었다. 일본에 온 약 75%의 제주도 사람은 오사카부 내에 살고 있었으며 3만 6천 명에 달했다. 오사카 거주 조선인에 제주도 출신은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다. 1925년 오사카 조선인의 약 40%, 1931년에는 35%가 제주도 출신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일본에 체류하는 조선인 전체가 늘면서 제주도 출신 비율은 감소하지만 오사카 조선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오사카시에서도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살던 쓰루하시 주변이 속한 히가시나리구의 조선인 인구비율을 위에 소개한 스기하라의 책에서 보면 60-1페이지에 상세한 통계가 있다. 여기서는 간단히 비율을 보면 1928년 28.5%에서 1934년 22.5%로 줄지만 사람은 3배 이상 늘었다. 비율이 약간 늘었다가 줄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람은 계속 늘어간다. 가장 많았을 때가 1941년 92,444명으로 30.2%를 차지했다. 이쿠노가 속한 히가시나리구 조선인을 대부분 제주도 사람들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이쿠노에 제주도 사람이 모여 살기에 제주도에서 오는 사람들도 이쿠노를 향했다.
1992년 12월 현재 일본 외국인 등록에 의하면 재일 한국/조선인은 688,144명으로 대부분 한반도 남쪽 출신이다. 그 중 제주도 본적은 117,110명으로 17%를 차지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 대도시에 모여 사는 경향이 뚜렷해서 동경은 미카와시마 주변, 오사카는 이쿠노가 그 중심이다. 제주도 사람들이 대도시에 모여 사는 경향은 처음부터 일관된 것으로 대도시를 지향하는 이동이라고 볼 수 있다. 1959년 재일 제주도 사람 85,036명 중 17%가 동경에 살고 64%가 오사카에 살아서 82%가 대도시에 거주했다. 이런 경향은 1992년에도 큰 변화 없이 재일 제주도 사람 117,110명 중 18%가 동경에 거주하고 60%가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대도시에서도 특히 좁은 범위에 모여사는 경향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이후 더욱 더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쿠노구는 일본 최대의 재일동포 커뮤니티로 알려졌지만 그 내용은 재일 제주도 사람들이었다. 이쿠노구 인구의 24%가 재일동포로 일본에서 재일동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 재일동포의 내역을 1989년 김덕환이 쓴 글에서 보면 "지금 이카이노는 85% 이상이 제주도 출신자의 동네가 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재일동포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주로 제주도 사람들이 사는 동네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재일동포는 어디까지나 외국인 등록이 된 사람들을 뜻한다. 외국인 등록을 못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면 제주도 사람들 비율은 더 높아진다. 이걸로 '파친코'에서 선자가 도착해서 사는 이쿠노, 이카이노가 역사적으로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선자는 제주도 사람 동네에 들어간 경상도 사람이 된다. 거기에 평양 출신과 결혼한 케이스는 정말로 희귀하다고 볼 수 있는 확률이다. 오사카에서 경상도 사람과 제주도 사람의 관계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 만나는 것처럼 거리가 있다. 제주도 사람이 제주도 이외 지역 사람과 결혼, 특히 경상도와 제주도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양가에서 반대하는 국제결혼 이상으로 거리가 있었다.
고한수가 '파친코' 7화에서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을 겪는 요코하마에 대해서 조금 쓰기로 한다. 관동대지진으로 사망 및 행방불명은 142,807명이며 전부 파괴되거나 화재로 불탄 주택은 575,394호라고 한다(역사학연구회 편, 일본사 연표). 제주도 서쪽 사람들이 1910년 이전부터 일본에 건너와서 주로 동경과 요코하마 등에 있었다. 고한수가 나오는 걸 보면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로 현재 요코하마 나카구이다. 나도 나카구에 대해서 좀 아는 편으로 언니네가 사는 곳이 나카구이기도 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간나이에서 야마시타초에 회사가 있었고 야마테에 주택지가 있었다. 지금도 요코하마의 중요한 관광자원이기도 하지만 현재도 '외국인 거류지'의 여운이 충분히 남았다. '외국인 거류지'는 주로 서양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바로 옆에 '중화가'라는 차이나타운이 인접해 있다. '중화가'와 인접한 또 하나의 지역은 고토부키초라는 일용노동자가 많이 사는 지역이다. 야마테와 '중화가'와 고토부키초는 엄청난 격차가 있는데 바로 인접해서 서로 다른 점을 극명하게 부각한다. 참고로 나는 제주도 사람들 연구 목적으로 80년대 말부터 20년 이상 고토부키초를 들락거리면서 필드웍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재일 제주도 사람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고한수는 제주도 어느 지역 출신이며 어떤 계층인지 알고 싶을 정도다. 제주도 사람들끼리는 누구네 집 몇 번째 아들이라는 식으로 개인정보가 다 드러난다. 실증적인 면에서 보면 수산업자라는 걸 포함해서 고한수는 제주도 서쪽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한편, 그가 수산업자로 장사를 크게 하는 걸 보면 동쪽의 문화를 느낀다. 왜냐하면 제주도에서 주로 상업을 하는 사람들은 동쪽이 많다. 옛날부터 조선 전역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오사카의 쓰루하시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제주도 동쪽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 서쪽 사람들은 소규모 제조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경향이다. 서쪽은 옛날 양반에 속하는 '유생' 비율이 높은 곳으로 교육정도가 높은 편에 속했다. 제주도 전체가 평균적으로 조선에서는 교육 레벨이 높은 곳이었다. 그래서 남성의 경우 서당에 다녀서 일본에 와도 일본어를 못해도 우선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적응을 빨리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제주도에서 일본 초등교육을 받고 오는 사람들은 일본어 습득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파친코' 7화에서 고한수가 등장하는 1923년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의 활기를 볼 수가 있었다. 그 활기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이라는 영광스러운 시대를 의미하지만, 조선인/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절망을 의미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한수와 그의 아버지는 매우 유리한 틈새를 공략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국인 거류지'는 '치외법권'적이며 국제적인 구역이기도 했기 때문에 식민지 백성으로서 핸디캡이 가장 적은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중국인도 있었다. 관동 대지진에서는 국적을 막론하고 평등하게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엄청난 피해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불안이 정부를 향하는 걸 막기 위해 조선인이라는 제물을 성난 군중을 향해 인신공양 하듯 내던졌다. 조선인이 탈옥을 해서 약탈하고 범죄를 저지른다/ 일본인에게 복수한다거나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는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흘려진 것이었다. 이런 경향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일본 정치가, 아베와 같은 총리에 의해 재일동포와 북한, 한국을 혐오하는 선동을 볼 수가 있다. '혐한'의 원형을 매우 잘 보존해서 다시 부활시켜 활활 태워 먹었다. 지금도 자연재해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조선인이 범인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진다. 한국인이 도둑질을 하고 여자를 강간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트윗으로 퍼진다. 이쯤 되면 조선인이나 한국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들의 암묵적인 '관습'으로 묵인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허긴 정부가 솔선해서 권장하는 모양새이니 국가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조선과 조선인에게 해온 만행이 있기 때문에 자격지심에서 이런 날조를 하는 건 아닐까?
조선인을 학살한 사람들은 '자경단'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혐한'을 하는 사람과 같이 보통 사람들이었다. 어제 형부에게 '파친코' 얘기를 하면서 관동 대지진 때 요코하마에서도 조선인 학살이 있었지요? 했더니 바로 지명이 나온다. 응, 나카무라에서 있었지. 나카무라도 '외국인 거류지'와 인접한 곳으로 옛날부터 일용노동자의 숙소가 있던 지역이다. 고토부키초가 미군부대가 철수한 다음, 태평양 전쟁 이후에 생긴 곳이라면 나카무라는 옛날부터 있었던 곳으로 성격도 고토부키 초가 개방적인 것에 비해 매우 폐쇄적이다.
조선인 학살에 앞장섰던 '자경단'에는 1894년 청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도 있어서 일본이 승리해서 일본의 제국주의가 팽창해가는 시기로 일본은 경기가 좋았다. '자경단'에 속한 청일전쟁에 갔던 사람들에게는 중국인을 많이 죽이는 것이 '훌륭한' 일이었다. 관동대지진에서도 그들은 조선인을 많이 죽이는 것이 '훌륭한'일인 줄 알았다. 나중에 조선인을 학살한 사람들에게 출두하라고 했더니 그들은 '훌륭한'일을 했다고 나라에서 포상을 하는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나섰다고 한다. 그들에게 중국인이나, 조선인은 무조건 죽여도 되는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전쟁이든 아니든 말이다. '혐한'을 보면 그런 의식이 지금도 수맥처럼 흐르는 걸 볼 수가 있다. 스스로 '친절하다'는 '친절한' 일본인의 이면에는 중국이나 조선, 침략전쟁을 했던 아시아 사람들에 대해 '잔인한' 얼굴로 잔혹행위를 자랑스럽게 해온 역사가 있다. 그런 이면을 감추기 위해 자신들을 '친절한' 일본인이라고 포장을 하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고 중요한 부분이 빠진 걸 알았다.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던 정기항로와 연락선에 관한 내용이다. 오늘도 길게 썼기에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2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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