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흐리고 최고기온이 21도였다. 오전에는 요새 올리고 있는 글을 옮기다가 점심을 먹고 작업을 계속했다. 이번 주에 항암치료를 가니까, 항암 치료하는 동안에도 계속 글을 올리고 싶어서 일을 미리 해둘 생각이다. 요즘 생활이 항암치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정작 항암치료를 할 수가 없으니 좀 갑갑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할 수 있는 걸 우선해서 한다. 요새 머리가 너무 많이 빠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베개를 보면 놀랄 정도로 머리가 빠졌다. 아침에 머리를 많이 털어서 빠질 머리가 빠지도 록하는데 머리가 한도 끝도 없이 빠진다. 이러다가 대머리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머리숱이 많은 편이라서 머리가 빠지는 게 그렇게 싫지는 않은데 머리가 많이 빠지니 집이 아주 지저분해진다. 검은 머리는 보여서 치울 수라도 있지만 흰머리는 보이지 않아서 치우기도 어렵다. 이런 어려움이 있는 줄 몰랐다. 눈과 입 주위와 코밑 피부가 벗겨지고 주름이 자글자글했던 것은 좀 괜찮아졌다. 선크림을 바르라고 해서 샀는데 선크림을 바르고 클렌징으로 씻어내니 더 자극을 주는 것 같아 선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대신에 클렌징이나 비누를 쓰지 않고 세수한다. 피부가 햇볕에 타기 쉬운 모양으로 밖에 노출되는 부분 얼굴이나 손이 많이 타서 까맣다. 그렇다고 햇볕이 나는 곳을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닌데 타는 모양이다.
요새 제주도에서 촬영했다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있다. 언니가 넷플릭스에서 보고 우리 동네에서 촬영한 게 나온다고 해서다. 정겨운 제주도 말을 듣고 싶기도 하다. 요전에 몰아서 보다가 드라마 속 제주도 말이 거칠고 시끄럽게만 들려서 나도 모르게 끄고 말았다. 끄고 난 다음에 깜짝 놀랐다. 얼마나 귀 듣기 싫었으면 듣고 싶었던 걸 끄고 말았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정겨운 제주도 말은 포기하고 우리 동네에서 촬영했다는 것과 제주도 동네를 보고 싶어서 영상위 주로 보기로 했다. 제주도 동네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동네에서 촬영했다는 걸 나는 찾지 못했지만 어제 9화에서 좀 본 것 같다. 언니가 말한 건 꽤 되었으니 이전부터 나왔을 것이다. 영상이 예쁜 것 같다.
나는 유튜브를 보지만 워낙 구독하는 채널이 적다. 구독하는 것은 정말로 작심해서 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의 안내로 보게 된 채널 중에 제주도 청년이 하는 '뭐랭하맨'을 보고 구독했다. 그가 말하는 제주도 말은 제주시에 사는 젊은 세대가 하는 제주말인 것 같다. 그가 하는 제주도 말은 아주 듣기가 좋고 귀엽다. 제주도 말에 조예도 깊어 보인다. 재능도 있고 똑똑한 친구인 것 같다. 제주도 사람 정신도 똑바로 박힌 것처럼 보여서 안심이 된다. 그가 말할 때 상대방에게 항상 '삼춘'이라는 걸 보면 어른들을 상대하는 걸로 보인다. 마지막에 '가쿠다양'하고 인사할 때 억양이 매우 정답다. 제주도 말은 제주도의 자연과 닮은 이미지다. 보통은 바닷가 돌맹이가 오랜 시간 파도에 닳아서 동글동글해진 것 같이 말한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에 거친 바람도 불기에 그런 바람과 같은 제주도 말도 있다. 그래도 발음이 바닷가 돌맹이처럼 동글동글한 느낌을 준다. 거기에 제주도 말로 의사소통을 할 때는 단순한 것 같지만 아주 문맥에 의존하기에 쉽지 않다. 하이 콘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문맥을 아는 사람끼리는 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렵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유추해야 알 수 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제주도인의 국가관'을 소개한다.
제1절 제주도의 문화적 배경
2) 제주도인의 국가관 (2)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제주도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앞에 쓴 조선시대 초기 제주도 조선화를 위해 조선왕조에 고용되었던 제주도인 관료를 떠 올리자. 그는 당시 국왕에게 대단한 신임을 받아 제주도인 관료로서는 가장 출세하고 중요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다(35). 그 관료에 대해 그를 신임했던 국왕의 견해는 한반도 출신 관료의 견해와 같은 “해외의 사람”이라는 인식이었다. 거기에 당시 조선왕조 입장에서 보면 제주도인은 “倭人・野人(여진족) 비교할倭人・野人(여진족) 수 있는 대상이었다”(36). 결국 제주도인은 조선왕조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명치시대 일본이 제주도 어업 침략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제주는 조선(반도)과 풍속이 다르며 인민이 강경하여 정부에 복종하지 않으며 ”라는 일본 정부의 견해가 있었다(37). 그것은 조선 정부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조선 정부도 “제주 인민은 본토에 비해 강경함으로 설득하기 어려우며”라고 표명하고 있다(38). 거기에 “우리나라 제주도 어업 반대에 관해서는 그 섬이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으며 미개하여 주민은 거칠고, 조정의 명령에도 굴복하지 않음으로 여러 차례 설득을 하고 있으나 ”에서는 “我國”로 표현하고 있지만 제주도에 대해 이해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조선시대 초기 제주도인에 대한 견해는 500년이 지난 조선시대 말기까지 일관된 것이었다.
한반도(국가)가 제주도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이 된 현대까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정부의 제주도에 대한 시각이 선명하게 표출된 것은 이른바 4.3 항쟁이다(40).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전도에 가솔린을 뿌려 30만 도민을 일거에 모두 죽여 버리자”라는 미군정 치안 담당자의 발언에서 한국 정부에서 제주도를 보는 시선이 명확히 드러난다(41).
4.3 항쟁에 대해서는 (1995년)(1995년) 현재 진상규명과 관련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본 논문의 시각에서 보면 제주도인에 의한 제주도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4.3 항쟁뿐만 아니라, 제주도인의 투쟁 역사는 제주도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제주도인의 정치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3 항쟁으로 인해 최대 당시 제주도인 3분 1이 사망하게 되었을 정도로 현대 한국 정부에 의한 제주도 및 제주도인 말살정책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25 이후 한국에서는 미국의 영향으로 반공과 때때로 반일을 표방했던 군사독재정권이 오래 지속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6.25 이후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과 “재일 제주도인”이 많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제주도인의 중앙 진출은 불리했다. 제주도인이 한반도 국가에 통합되어 있으면서도 배제되었던 것은 조선시대 이후 현대까지 계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인의 자주성을 지키는 정치행동의 관점에서 보면 제주도인이 한반도에 통합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제주도인의 자주성을 지키는 행동은 한반도(정부)에서 보면 반체제적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제주도인과 한반도(정부)의 결정적인 차이를 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제주도가 독립된 국가가 되기에는 약소했기 때문에 한반도에 행정적으로 종속되는 형태를 빌려 제주도인의 자주성을 지킨다는 실리를 추구했던 걸 들 수 있다. 행정적으로 종속되어 있어도 제주도인의 자주성을 침해당하게 되면, 그때 그들은 저항했던 것이다. 제주도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존재는 역사적으로 보면 한반도만이 아니었다. 중국, 한반도, 일본, 미국에 대해 제주도인은 저항하고 투쟁했다. 제주도인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한반도(정부)에 의해 반체제적인 행동으로 보였던 것이다.
제주도인은 4.3항쟁을 계기로 외부에 대해 제주도인의 정체성을 감추게 되었다. 그에 더해 한국 군사정권의 중앙집권과 급속하게 추진했던 근대화 과정에서 제주도 문화를 잃어가고 문화적으로도 한반도에 통합되는 것을 막기가 힘든 한국화(반공정책에 기반한 국가관의 강제)되어 갔다. 교육과 미디어의 발달, 경제발전, 징병제도, 교통의 편리성으로 한반도에서 잦은 왕래와 더불어 제주도인의 사회적 이동과 함께 제주도인의 한국화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최근 한국의 지방자치화로 제주도의 행정과 미디어, 연구자 들에게서 잃어가는 제주도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제주도의 동향은 강제적으로 한국화 된 제주도인의 정체성을 다시 뒤돌아보게 하고 있다.
제주도인의 국가관을 보면 제주도는 하나의 나라(Country)였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가 하나의 나라로, 한국은 하나의 국가(State)가 되지만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은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고 외국에 가까운 것으로 나라에 대한 귀속의식과는 현실적으로 일치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제주도인의 국가관은 나라(제주도)와 국가(한국, 한반도)라는 이중구조를 갖게 된다. 제주도인은 상황에 따라서 나라와 국가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결국, 제주도인끼리의 관계에서는 나라이고, 한반도 출신자와의 관계에서는 국가이다. 제주도인 국가관의 이중구조는 6.25 이후 한국화에 의해 형성되었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기 전에 일본에 간 재일 제주도인의 국가관은 제주도라는 나라에 대한 강한 귀속의식에 비해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은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재일 제주도인의 국가관 형성을 보면 태평양전쟁 이후 한국이 독립하고 난 뒤에 조총련과 거류민단이라는 민족단체, 북한과 한국에 의해 ‘재일 한국/조선인’으로 분류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인데도 불구하고 강제고 '일본인'에 편입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외부에 의해 제멋대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재일 제주도인이 한국(제주도가 속한)이라는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은 제주도인보다 더욱 관념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재일 제주도인이 인식하는 ‘한국'은 제주도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전개했던 제주도인의 국가관을 정리하면 제주도인이 지닌 한국이라는 국가관은 6.25 이후에 심어진 것이다. 그에 비해 제주도(나라)인이라는 의식은 역사적으로 자주성을 지켜왔던 것에서 보인 것처럼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제주도인의 제주도(나라)인 의식이 국가 개념(한국)보다 항상 우선시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제주도(나라)인 의식과 관련해 제주도인의 이동은 지연 관계 내에서 이동이고, 거기에 이동한 외지에서 일하고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지연 관계에 의지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동한 곳에서 제주도인끼리 모여 제주도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현상 또한 제주도(나라)인의 정체성 유지와 제주도(나라)의 재현으로 볼 수 있다. 그와 같이 제주도인의 제주도(나라)인 의식은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 제주도인에게 내재된 것이 행동 차원에서 표출된다.
제주도인의 국가관은 제주도(나라)인이라는 의식이 강한 것에 비해 국가라는 개념이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각주
35)高橋 전게서 a 40p
36) 高橋 전게서 a 55p
37)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巻 301p
38)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十七巻 376p
39)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三巻 267p
40) 1948년 4월 3일 제주도인이 한국의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민중이 봉기하였다. 초기는 제주도인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한국 군대와 경찰, 미군과 민간인을 투입했다. 제주도에 대한 몰이해를 전제로 한 외부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항쟁은 격화되어 갔다. 이로 인해 6.25 이후 한국 정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낙인을 찍었다.
41) 鄭賀恩 「顧みる『四・三事件』の過去と現在」済州島四・三事件40周年追悼記念講演集刊行委員会編『済州島四・三事件とは何か』新幹社 1988年 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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