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최고기온 19도 습도는 50%대로 흐렸지만 지내기가 쾌적한 날씨였다. 어제 목욕을 해서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아침에는 쌀쌀해서 아침부터 파스타를 만들어서 먹었다. 스파게티를 삶고 마지막에 부추와 버섯도 같이 데쳐서 놓고 고추참치에 비비면 간단한 파스타가 된다. 아침이 너무 늦어서 점심은 망고를 하나 먹고 치웠다.
병원에 갈 때 입었던 옷, 약국에 갔던 옷, 링거를 맞는 동안 입던 옷, 베개닛 등을 다 빨아서 널었다. 빨래를 늦게 해서 날씨가 흐리니까, 마르는 게 걱정이었다. 내일은 다시 비가 온다고 해서 미룰 수가 없었다. 다행히 바람이 있어서 저녁까지 말리면 마를 것 같다. 오늘은 일을 하지 않고 편히 지내기로 했다. 오후에 친한 이웃에게 전화해서 산책을 가자고 했더니 아들이 와서 외출했다고 30분 후에는 집에 도착하니까, 전화한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겨우내 실내에서 지냈던 화분에 물을 주고 베란다에 내놨다. 비 오는 날 신었던 운동화 밑창도 털어내고 더러워진 부분만 살짝 빨았다.
친한 이웃과 만나서 거리가 좀 있는 업무 슈퍼라는 마트에 가서 쌀식초 한 병과 미린 한 병, 오이 한 봉지, 스파게티 한 봉지를 샀다. 산책을 겸해서 간 것이라, 좀 멀어도 괜찮다.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서 아무것도 사지 않았는데 돈이 휙휙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기본적인 양념은 괜찮은 걸 써야 한다. 친한 이웃과 산책을 마치고 단지 내에 있는 산초잎을 따고 왔더니 밖에서 2시간이나 놀아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오늘은 걸어도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춥거나 덥지도 않은 날씨였다. 저녁에는 요전 날 만들어서 남은 오징어 회무침을 소면과 비벼서 먹었다.
친한 이웃 아들이 오늘이 어머니 날이라고 오기 전에 뭘 사가는 게 좋으냐고 물었단다. 보통은 카네이션 화분을 들고 오는데 오늘은 스시를 먹고 싶다고 해서 스시를 사고 아들은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사다 같이 먹은 모양이다. 친한 이웃도 나이가 80세가 넘어서 요새 자꾸 물건 이름도 잊고 좋아하는 식물 이름도 잊는다고 속상해한다. 내가 보기에도 좀 그런 것 같다. 2년 전에 같이 살던 강아지와 이별한 후부터 잠을 잘 자지 못한다고 한다. 강아지가 마지막 6개월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곤 했다. 그러면 수면제를 먹이고 재워도 한 시간밖에 못 자고 다시 울곤 했다고 한다. 결국, 강아지와 이별하고 나서는 밥도 못 먹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강아지와 15년 가까이 둘이서만 살고 아침저녁으로 몇 시간이나 산책하면서 쌓은 정이 얼만데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강아지와 이별한 후는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할 의욕도 없어지고 마당을 가꾸는 것도 이전처럼 열심히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매일 하루에 10,000보 이상 걸으면서 건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오늘 근처에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를 지나면서 여기는 어떨까 해서 봤더니 남자들만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남자들만 있는 곳은 골치가 아프니까, 다른 곳 여러 군데를 다녀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몇 군데 정해 놓고 나중에 아들에게 말을 해두라고 했다. 가까운 곳이면 그래도 다른 이웃과 가끔 만나고 산책도 같이 할 수 있으니까, 가까운 곳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친한 이웃이 나중이 걱정되는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제2절 일본의 어업 침략과 제주도
3. 일본 어업 침략에 대한 제주도인의 저항-2
그간 일본 어민이 제주도 어업 침략을 할 때 쓰시마, 또는 가까운 섬을 거점으로 출어했지만 제주도인의 저항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양국 정부 사이에서는, 조약이 체결된 명치 16(1883)년 이후에도 제주도는 통어 금지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일본인 잠수기 업자가 제주도에 상륙해서 저항하는 제주도인에게 무력을 행사해서 살인까지 저지르는 문제를 일으켰다. 즉 “對馬人 古谷利渉 -중략- 해당 지역에서 제주인은 우리 어민을 거부하여, 벌써 사상자까지 발생”, 일본 어민의 저항하는 제주도인에게 무력을 행사해 사상자가 발생했다(108). 그에 대해 일본 정부는 “우리 어민은 섬주민에게 다소 놀라고 화낼 일을 했으나, 이것으로 분쟁이 생겼다고 할 수 없다”라고 (제멋대로) 납득하고 일본인의 피해를 우려해서 제주도 감시를 겸한 군함을 회항시키기에 이르렀다(109).
불법에 자원을 남획하는 기계를 동원, 거기에 무력을 동반한 일본 어민의 침략에 의해 제주도인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데 일본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서 제주도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간의 약속 따위는 개나 준 국가차원의 폭거다. 거기에 일본 어민이 “항상 가파도에 상륙해서 동네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며 부녀자를 폭행하고 가축을 죽이며, 칼을 빼들어 섬주민을 위협함으로, 이에 놀라서 공포를 느낀 섬주민 300여 가구가 섬을 비우고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다(110). 즉, 일본 어민이 무력으로 가파도를 점령했기 때문에 그 섬주민은 자신들이 살던 집을 떠나 제주도 본 섬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인의 무력적인 침략은 가파도 만 봐도 거듭해서 갖은 폭행을 행사해서 주민을 내쫓고 점령해서 어업기지로 삼았다. 어업 침략에 동반해서 가파도 만이 아니라, 우도, 비양도 등이 일본 어민의 거점이 되어 갔다.
제주도인의 저항이 국제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에 대해 “상호 간 권리 교환의 좋은 방법을 택해 조선 정부에 대해 제주 통어권 대신 광산 채굴 특허를” 요구하고 제주도 어업 침략을 포기하는 대신 교환조건을 제시했다(111). 제주도 문제를 놓고 정부 간 교섭이 계속해서 진행 중에 일본인 어민이 제주도 침략에 따르는 문제도 더욱 심각해졌다. 먼저 쓴 對馬人 古谷利渉이 거느리는 일본 어민이 제주도인을 살해한 것 이외에 제주도인 다수에게 상해를 입히고 가축까지 약탈했다. 당시 가축은 가족의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일본 어민의 무력침략에 대한 저항을 강하게 했다(112).
이 사건에 대해 “가파도에서 전복을 채취하는 일본 어선 6척이 매일 본 부두에 들어와 함부로 상륙해서 민가에 침입해 제멋대로 기르고 있는 가축을 약탈하거나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닭을 훔쳐, 그 주인인 농민 이만송은 -중략- 경과를 듣고 귀가해서 (일본 어민에게) 폭행을 제지해 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화를 냈다. 다음날 일본 어민 일동은 다시 상륙해서 일본도를 빼서 휘두르며 폭행을 가했다” 고 제주 목사로부터 자세한 보고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112). 일본의 제주도에 어업 침략만이 아니라, 조선 연해를 침략할 때도 무장한 어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걸 기억해 내시기 바란다. 일본 어민의 무장은 표면적으로 해적으로부터 방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현지 주민의 생명과 생활을 위협하는 폭행을 위한 것이었다. “명치 러일전쟁 후에 -중략- 결국,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켜 고기를 잡고, 그래서 (저항하는) 조선인과 싸우는 거지. 해적 같은 폭행을 했지”라는 일본 어민의 증언을 보면, 당시 어업 침략이 어떠했는지 알려준다(113).
조선에 어업 침략은 일본 어민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꽉 막힌 일본 어업에서 조선을 침략해서 노다지를 캐려는 사람들이 앞장섰다. 거기에는 일본 정부의 비호라는 믿음직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기에 일본 어민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과 제주도 침략의 선발대였다. 그중에는 “구룡포는 별천지였다고 해 -중략- 전과자만 몇 천 몇 백 명이 왔다는 곳이야. 일본 전국에서 왔다고 -중략- 매일 아침마다 다섯 명, 세 명, 길가에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어”라는 증언에 볼 수 있듯이 성질이 거칠다는 어민이 봐도 놀랄 정도의 사람들이 많았던 걸 알 수 있다(114). 일본 정부에서 어떤 사람들을 먼저 조선에 보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한편, 먼저 쓴 통어 금지 기간 중에 일본 어민에 의한 제주도인 살상 사건을 일으켜서 통어 금지가 한층 엄격해지지만, 제주도인을 살해한 일본인은 통어 금지에 따른 손해배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거기에 일본 정부는 “명치 17(1884)년 이후 조선 정부에 대해 호의적으로 우리 어민을 설득해서 제주도 통어를 하지 않도록 했지만 5년이나 경과했으니 우리는 조선 정부에 대해 충분히 유예기간을 줬다”라고 한다(115). 일본 정부와 조선 정부 레벨에서는 이상과 같은 일을 진행하는 중에도 통어 금지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어민의 정부 간 약속을 무시하고 제주도 어업 침략을 금지는커녕 불법에 무력침략으로 저항하는 제주도인을 살상하는 사건까지 일으켰다. 거기에 제주도 주변 섬을 무력으로 점령해서 섬주민을 내쫓고 어업 기지화 한 사실은 일본 정부의 견해와 전혀 반대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일본 어민의 침략행위는 밀어에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든 정부 레벨에서는 조선 정부의 요청을 일본 정부가 들어줘서 5년 유예기간을 준 모양새라서 제주도 통어 금지를 해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 어민의 무력적 행위에 대해 일본 정부는 “우리 어민에게 잘 말해서 흉폭한 거동 -중략- 우리 어민 중에는 빈번히 연안 각지에 상륙해서 야채나 가축을 훔쳐서 주민과 분쟁을 일으켜 -중략- 원래 말이 안 통해서 생기는 문제”라는 견해를 보인다(116).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남의 야채나 가축을 훔치고 부녀자를 폭행하다니 말도 안 된다. 일본 어민이 일본에서 불법으로 할 수 없는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거나 잠수기를 사용한 어업을 제주도에서 행했다는 어민의 증언에 비해, 일본 정부는 사실을 왜곡해서 해석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제주도인 입장에서 보면 생업과 어장을 뺏기고 집과 가축이라는 재산에 부녀자가 폭행을 당하며 인명까지 탈취당했다.
각주
108)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巻 300p
109)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巻 302p
110)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巻 304p
111-2)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巻 308-9p
113)久場 전게서 128p
114) 久場 전게서 172-3p
115)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三巻 263p
116)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三巻 2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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