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어제보다 최고기온이 2도 오른 17도였다. 하늘은 잔뜩 흐려서 어두웠지만, 그래도 비가 오지 않아서 날씨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부터 20도 이상으로 올라간다니까, 조금 따뜻해질 것 같다.
요새 아침에 일어나는 게 좀 늦어지고 있다. 날씨가 추운 탓도 있지만 늦게 일어나면 오전이 금방 지나고 만다. 정신이 맑은 오전에 할 일을 좀 해두고 싶은데 늦게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을 챙겨 먹다 보면 금방 점심시간이 되고 만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낮에 일을 좀 하고 오후 늦게 산책을 나갔다. 어제도 춥고 비가 온다고 산책을 쉬어서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든다. 밖에 나갔을 때는 비가 오는 듯 마는 듯할 정도로 비가 왔는데 막상 걷기 시작했더니 비가 오는 줄 몰랐다. 오늘 산책 코스는 죽순을 따고 부추를 베는 공원에 가기로 했다. 부추를 베다가 먹는데 내가 부추를 베는 장소를 잘못 잡고 있는 것 같아서 확인해 둘 작정으로 봐 두기로 했다.
요새 꽃이 많이 펴서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꽃향기가 많이 난다. 비가 오는 날에는 공기가 무거워서인지 꽃향기가 더 짙게 나는 것 같다. 오늘 먼 공원에 가는 도중에 운이 좋게도 예쁜 장미가 아주 많이 핀 정원을 몇 군데 발견했다. 남의 집 정원이라 가까이서 사진을 찍는 정도지만 정말 행운이다. 올봄에는 날씨가 워낙 들쑥날쑥해서 꽃들이 활짝 폈는데 갑자기 겨울 기온으로 내려가면 꽃이 한꺼번에 녹아 버리는 일도 있었다. 장미도 정말로 며칠 가지 않는 걸 보곤 한다. 어제 올린 사진 장미는 비가 오는 날 찍은 거라서 이틀 지나서 비가 오지 않는 날 다시 찍으러 갔더니 불쌍할 정도로 몰골이 상했다. 이틀 전에 본 꽃은 어디로 갔나? 내가 환상을 본건가? 할 정도의 변화였다. 꽃을 관찰하고 있으면 변화가 심해서 하루 이틀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만다.
장미꽃 사진을 찍고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부추가 좋은 포인트를 확인했다. 죽순을 캘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오기 섭섭해서 대나무 숲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서 죽순을 3개 발로 꺾어서 껍질을 벗겼다. 돌아오는 길에 봤더니 수국이 벌써 피기 시작했다. 올해는 수국도 아주 일찍 피는 것 같다. 집에 와서 죽순을 삶고 저녁은 생선조림에 상추쌈을 중심으로 먹었다. 냉장고에는 삶은 죽순과 고사리가 있는데 어떻게 먹는 게 잘 먹는 건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다른 걸 쓰려고 했는데 쓰기 시작하는 시간이 늦어서 쓰면 너무 늦게 끝날 것 같아 내일 쓰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새 대통령이 취임해서 딱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하루하루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다. 처음부터 최고 권력자가 파괴하기로 작정하고 나오는데 당해낼 수가 없다. 취임하기 전부터 피로감을 느꼈는데 일주일 동안 일어나는 일을 보면 정말로 가관이다. 한국에서는 정치를 혐오하는 사람이 많이 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제어하지 않으면 정말로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고 만다. 나는 그런 구렁텅이에 빠진 일본에 살고 있기에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안다.
사진은 화사하게 오늘 찍은 장미다. 기분이 꿀꿀한 날에는 화사한 꽃을 보고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좋다.
제2절 일본의 어업 침략과 제주도
1. 제주도인과 일본인 어민의 교류
일본인 어민에 의한 제주도 어업 침략이 무력 행사로 살인사건을 일으켜 국제문제가 되었지만 모든 일본인 어민이 무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앞에 쓴 것은 무력을 행사해서 현지민의 생활에 막심한 피해를 줬기 때문에 현지민의 반발로 충돌한 결과 외교문제로 발전한 사건이다. 그런 한편, 일본인 어민이 불법적인 어업 침략을 했다고 해도 무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문제시되지 않았던 점이 중요하다. 결국, 일본의 어업 침략은 제주도인 전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지만 마을 사람 차원에서는 일본인이 무력행사 또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한 제주도인 쪽에서 일본인과 충돌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표착했던 선박에 대해 융숭하게 대접했던 일을 관례 시 되었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일본 ‘외교문서’에 등장하는 제주도인은 어떻든지 미개한 지역이고, 투쟁적인 사람들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 제주도인은 매우 인정이 풍부하고 집성촌, 동족 부락이 많기 때문에 내부규제가 작용하는 곳으로 외부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지역이다(123).
앞에서 쓴 배령리 양종신 살해사건을 일본 정부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長崎市의 竹内源吉의 증언에서 사건화하지 않은 제주도인과 일본인 어민의 교류를 살펴보자. 竹内源吉는 명치 7,8(1874,5)년이라는 아주 일찍부터 전복 채취를 전문으로 제주도에서 불법어업을 했던 일본인 어민의 한 사람이었다. 증언의 전반은 양종신 살해 건에 대해 일본인 어민(吉村)의 폭행에 관한 내용으로 후반은 제주도인과 일본인 어민에 관한 것이다. “제주도 통어는 지난 명치 20(1887)년까지도 어려웠으나 계속 통어하는 자는 섬주민과 교제해서 그 후는 사고 없이 익숙해서 표면상으로는 물이나 연료를 받는 일이 어려우나 밤에는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한다고 들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124). 표면상이라는 것은 제주도 측의 단속에 의한 것으로 ‘지방관리’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제주도에서 어로 행위를 목적으로 살해사건 등 나쁜 짓을 하는 “吉村와 같은 교활한 자가 있으면 안 되며 -중략- 살인과 같은 사건을 저지르는 그런 일당의 행동은 인심을 사납게 해 -중략- 섬주민과 교류할 때에는 주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125). 이것은 일본인 어민끼리 역학관계도 있지만 현지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업을 계속하고 싶은 측의 의견이라고 본다.
명치 25(1892)년 성산포에서 살해사건으로 인한 가옥 철거와 서귀포에서 폭행사건으로 인해 제주도 측에서 가옥 건설 반대에 대해 일본 정부가 조사했다. 일본인 어민의 증언에서 현장 차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제주도 관리가 가옥 철거를 엄중하게 시달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들은 ‘가파도’에서 있었지만 항상 때가 되면 철거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吉川幸次郎는 그때 서귀포에 있을 때 관리가 가옥을 철거하도록 했으나 엄중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대로 있다”고 한다(126). 이 증언 내용은 다른 어민도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 다른 어민의 증언을 보면 일본인 어민에 의한 폭행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던 시기에도 “서귀포와 비양도, 백사장과 우도에 있었다. 평온히 거둔 것은 城山浦뿐이다. 다른 곳은 일단 거두지만 관리가 돌아가면 다시 가옥을 세워 지금도 가옥을 세운 채로 있다(비양도는 지금 해제했다). 또는 철거해야 하는 장소에는 보통 15일에 한 번 철거 재촉하러 온다”는 식으로 제주도 측의 대응은 결코 강경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127). 그리고 땔감과 물 제공을 제주도인이 거절했다는 일본인 어민의 진정이 있었다는 일본 정부의 질문에 “섬주민에게 직접 사거나 마을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관리에게 청구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고 가령 제주도인이 일본인에 대해 절도 등 범죄를 저지를 경우 관리에게 말하면 당국에서 처벌한다”라는 일본인 어민의 증언으로 그 실제를 알 수 있다(128). 마지막으로 “섬주민은 폭력으로 우리들을 내쫓으려 하지 않느냐”라는 일본 정부의 질문에 대해 어민은 “결코 그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라고 확실히 부정하고 있다"(129).
결국 제주도에서 일본인 어민과 제주도인의 충돌은 일본인 어민의 폭력행사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증언은 모두 일본 정부의 조사에 의한 것으로 제주도에서 조업을 하는 일본인 어민의 증언이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당시 제주도 각지에서 일본인 어민에 의한 폭행으로 일본인과 제주도인의 충돌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폭행이 없었다면 제주도인이 일본인에게 맞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 어민은 제주도 당국에서 가옥 철거를 요구받아도 요령 있게 대처해서 조업에 지장이 있었다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일본인이 제주도에 어업 침략이 매우 폭력적이고 제주도인의 어장을 탈취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인 개인차원에서는 일본인과 빈번하게 접하게 되었다. 일본인 중에는 폭력적인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어업 침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 쓴 땔감과 물 제공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인이 일본인에게 관대하게 대해줬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인 어민의 장기 지속적인 어업 침략을 통해 현지에 장기적으로 체류하게 되어 일본인과 제주도인의 민중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각주
123) 일본 정부의 제주도에 대한 견해는 조선 정부의 견해에 일본 정부의 편견이 더해져 조장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본 정부의 견해는 일본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제주도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했다.
제주도가 인정이 많았다는 것은 제주도에 거지가 없었다는 걸로 예를 들 수 있다. 재일 제주도인 앙케트 조사에서 ‘제주도의 우수성’에서도 ‘인정이 많다’를 예로 들고 있다. 외부 사람들에게 관대했다는 것은 예부터 바다와 관련이 깊은 생활을 보냈던 지역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표착했던 것과 관계가 있다. 실제 내가 봤던 일이지만 태풍으로 어느 나라에서 온지도 모르는 배와 사람이 표착해서 오는 일은 흔한 일로 그때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어른들은 경위 조사와 수습을 잘 분담해서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줬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 시체가 표착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도 마을 어른들이 급하게 모여서 그 일을 처리(어린이는 데리고 가지 않고 말을 해주지 않아 상세히 모르지만)하고 그 혼을 위로해 줬다. 그런 것은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해인) 사이에서는 살아있는 생활의 일부로 재차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24-5)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三巻 284p
126)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五巻 390p
127-9)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五巻 39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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