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일 제주도 사람들/'파친코'와 재일 제주도 사람들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역사,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제주도 -3

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비가 오고 최고기온이 15도까지 내려간 추운 날씨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지난밤에 방영된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일을 아주 조금 했다. 친구가 대학본부에서 회의가 있다고 회의가 끝나서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친구가 와서 큰 역 가까이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었다. 

 

요즘 내 주변 사람들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는 케이스가 꽤 있다. 친구 남편도 고향인 히로시마에 내려갔다가 현지에서 뇌수술을 받고 병원에 일주일 입원했다고 한다. 다행히 수술 후 경과가 좋다고 한다. 그래도 병원에서 퇴원해서 바로 농사일을 하고 술도 마시려고 해서 친구가 화를 냈다고 한다. 나도 당분간 얌전하게 있으라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도 가족이 면회를 갈 수도 없기에 친구는 황금연휴 동안 남편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고 고사리를 꺾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지금 산에는 꽃도 많이 피고 산나물도 많아서 힐링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 고사리를 넣은 영양밥과 조림을 만들고 삶은 고사리도 가져왔다. 고사리가 꽤 통통해서 맛있게 생겼다. 저녁은 친구가 가져온 고사리 영양밥과 조림에 미역국 등으로 먹었다. 친구는 오늘도 남편이 농사지은 블루베리로 만든 잼이며 지난번에 맛있다고 한 녹차에 여러 가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나는 친구에게 줄 것이 없어서 친구가 집 근처에 오면 점심값을 내기로 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춥고 비가 와서 산책을 쉬었다. 최고기온이 15 도면 동경에서는 겨울 날씨와 같은 기온이다. 올봄은 유난히 날씨가 춥다가 덥다가를 반복하는 것 같다. 내일은 20도까지 올라간다니 다행이다. 날씨가 장마철에 들어간 것처럼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대부분이다. 

 

 

 

2절 일본의 어업 침략과 제주도

3.    일본 어업 침략에 대한 제주도인의 저항-3

 

제주도에 대한 통어 금지 해제는 명치 24(1891)년 5 31일 이후였지만 그 이전 명치 23년에 일본 어민에 의한 제주도인 살상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해제는 5개월 늦어진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제주목사의 기록에서 보면 “제주도 배령리(현재 금릉리)에 일본 어선이 상륙해서 마을에 난입, 칼을 빼들고 포구 관리자인 양종신을 살해한 다음 배로 도망쳤다. 섬주민은 일본인의 진출로 인해 실업상태에 빠졌다. 일본인은 마을에 침입해서 가축을 훔치고 여자를 범하고, 바로 칼을 뽑아 사람을 베는 등 그 비참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117). 이와 같이 합법적으로 제주도에 대한 출어 금지가 해제되기 이전에 일본 어민을 무력을 행사해서 원하는 대로 제주도를 침략했다.

 

일찍부터 제주도에 출어했던 일본 어민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도에 통어하는 우리 어민 중에는 흉폭한 행동을 하면서 야채나 가축을 훔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섬주민과 갈등을 일으킨다 -중략- 吉村는 나중에 와서 섬주민을 위협하려고 200명이나 되는 어부에게 총칼을 휴대해서 대열을 만들어 상륙했다 -중략- 대정현에 도착해 현감을 잡아서 총칼을 목에 들이대 담판을 지어 당현감으로부터 사죄장을 쓰게 해서 받고”라는 걸 보면 무력을 행사하는 어민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일본 어민이 제주도인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118). 먼저 쓴 배령리 양 씨 살해 후에 “제주도민 백여 명이 상경해서 일본인 통어를 금지할 것을 청원했다”고 나온다(119). 당시 제주도인의 주장은 “제주도 전복 채취는 예부터 왕실에 바치는 것인데 일본인 통어로 인해 주민의 채취를 방해하며 공헌할 수가 없다. 제주 해안 주민은 어업을 생업으로 하며, 특히 전복 채취는 여자가 전문이나 일본인 통어로 인한 방해로 생활이 곤란할 지경에 이르렀다. 제주도민의 전복 채취는 해저에 잠수하여 채취하나, 일본인은 기계를 사용하여 한 번에 수백천 개 전복을 포획함으로 수년 내에 전복이 씨가 말라 멸종, 결국은 섬주민이 수입원을 잃을 것이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120). 지금 읽어도 너무나 타당한 이유이다.

 

제주도인의 요구조건과 상경한 사람 수에서 보면 당시 제주도인의 일본 어민에 대한 저항이 대단히 높았던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일본인 어부에 의해 살해당한 양 씨가 제주도 시조 자손의 한 사람이며 마을 관리였던 것과 배령리(금능리)가 양 씨와 고 씨, 이 씨의 집성촌으로 동족 부락이었던 것에서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상경하게 된 걸로 본다. 당시 제주도인의 조선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상경한다는 것은 생업을 중단하는 것이며, 당시 교통수단과 여비 등을 고려하면 제주도 현지에서의 항의행동에 비할 수 없는 노력과 비용이 들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는 양반이 여비가 없어 상경할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제주도인이 백여 명이나 상경해서 항의하는 배경에는 그만큼 필사적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항의행동을 계기로 제주도에서는 일본의 출어 지역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제주도인과 일본인 어민 간의 갈등과 대립은 정점을 맞게 된다.

 

명치 24(1891)년 6월에 건입포 임순백이 살해당하고, 7월에는 김녕리 이달겸이 살해당했으며 그 외 17명이 살상되었다. 이러한 일본인 어민에 의한 폭행은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계속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일본인 어민이 일으킨 사건을 조사할 때, 일본 정부는 군함을 파견해서 조사했는데, 명치 24(1891)6월 사건에도 대해서도 똑 같이 대응했다. 이런 일본 정부의 행동은 제주도인에게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직후에는 일본 측의 강압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주도 출어금지가 해제되고, 지금까지 비합법적인 어업 침략과 달리 앞으로는 합법적인 어업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제주도인과 일본인 어민의 대립은 계속되었지만, 총과 일본도와 같은 무기를 구사하는 일본인의 무력 침략에 대해 제주도인은 막대기와 돌로 대항할 수밖에 없어 일본인에게 살해당하는 것은 항상 제주도인이었다.

 

출어 금지 해제 이후, 합법적 침략이 가능해진 다음에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 어민의 무력 침략은 더욱 늘어났다. 명치 25(1892)년 4어민 小柳 山口라는 자가 144명의 어민을 통솔하여 제주도 성산포에 가옥을 세운 것에 대해 섬주민 다수(제주 유학 채 씨 등 26)가 상경해서 철거할 것을 통리처에 요구해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제주도인이 요구대로 가옥이 (일시적으로) 철거되었다(121). 이 사건의 진상은 일본인 어민이 대량으로 쳐들어온 것뿐만 아니라, 제주도인 여성을 강간하고 마을 사람 오 씨를 사살했다(122). 제주도인의 저항운동 배경에는 제주도 지식인이 관여하는 것이 분명했고, 지금까지 제주도인의 정치적 활동에도 유생을 비롯한 제주도 지식인이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어민의 무력침략은 더욱 활발해져서 같은 해(1892) 4월 화북포 김 씨와 고씨를 살해하고, 6월에 두모리 고씨 두 명을 살해했다. 7월에는 서귀포에 일본 선박 43척으로 일본 어민이 상륙해서 주민을 폭행했다. 이와 같이 명치 25(1892)년에는 무장한 일본인 어민이 대량 진출해서 제주도인에게 폭행을 행사하고, 가축을 훔치고, 여성을 강간하며,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일본인 어민의 폭행을 하는 동안 일본 군함은 제주도 부근을 회항했다.

 

지금까지 일본의 어업 침략에 따른 제주도인과 일본인의 대립이 외교문제로 발전된 사건에 초점을 두고 명치 17(1884)년에서 명치 25(1892)년까지 약 10년간의 경과를 살펴봤다. 당시 조선 정부가 무력했던 것에 더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제주도인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어장은 일본인 어민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제주도인에게 어장은 제주도 근해뿐만 아니라 한반도 연해도 제주도인이 출어하는 어장이었다. 그래서 일본인 어민의 어업 침략으로 제주도인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연해 어장까지 모두 잃어버렸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은 반농반어(농업은 자급자족의 식량만)로 계절마다 다른 지방에 출가는 생활형태를 갖고 있는 제주도인에게 일본의 어업 침략에 대한 저항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결국, 제주도인이 예상한 것처럼 일본인 어민의 남획으로 자원이 고갈된 것은 먼저 쓴 그대로다. 그 영향 또한 예상대로 장기간에 걸친 제주도 어민의 실업으로 이어졌다. 제주도 어민의 실업이 제주도 경제에 영향을 미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각주

117) 김 전게서 161p

118)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三 284p

119-20)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三 285p

121) 日本外務省 전게서 第二十五 1952年 371p

122 김 전게서 16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