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상쾌하게 맑았는데 오후에 들어서 습도가 높아졌다. 어젯밤에 늦게 자서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다. 언니가 택배를 보냈다고 해서 오전에는 택배를 기다리면 지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빨래와 청소를 하고 싶었는데 빨랫감이 없어서 빨래를 못하고 청소도 못하고 말았다.
언니가 택배에 맛있는 걸 꼭꼭 담아서 보내준다. 지난주는 택배가 없어서 냉장고가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 받은 것에는 제주도에서 생성이라고 부르는 옥돔과 한치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지역에 따라 옥돔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지만 보통 아마다이라고 하며 서일본 지역에서 나는 고급어에 속한다. 동경에서는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생선이 아니다. 사실, 나도 가까운 마트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 반가워서 있는 걸 몽땅 사고 말았을 정도다. 언니가 보낸 생성은 형부가 어디선가 발견해서 한 마리에 3,000엔이나 주고 사 왔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아주 비싼 가격이다. 그래서 나에게 보낸다고 해서 언니가 화가 나서 나도 입이 있다고 했단다. 그래서 언니네가 반을 먹고 반을 보냈다. 생성이 아주 커서 반마리라도 충분히 많다. 일본에서 옥돔이 널리 유통되지 않는 것은 단가가 너무 비싸서 일반적인 수요가 적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옥돔은 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생선이라서 아무리 콜드체인 시스템이 발달해도 널리 유통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오늘 친한 이웃과 산책하면서 옥돔 이야기를 했더니 옥돔을 모른다고 한다. 가격을 듣더니 왜 그렇게 비싸냐고 놀란다. 이전에 고급 요정에서나 맛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옥돔을 아주 귀하게 여긴다. 제사상에 꼭 올리는 생선이기도 하고 중요한 행사에는 빠지지 않는 생선이다. 귀한 옥돔을 어떻게 먹으면 잘 먹을까 해서 국을 끓였다. 미역과 죽순을 넣고 국을 끓여서 두 번 먹고 나머지는 수제비를 해서 먹을 작정이다. 남은 4분 1은 냉동했다가 꺼내서 말리고 있다. 옥돔과 잘 맞는 건 깔끔한 흰쌀밥이다. 나는 흰쌀을 먹지 않아 현미에 흑미와 콩을 넣고 밥을 짓고 있어서 옥돔의 섬세한 맛과 잘 맞지 않지만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옥돔처럼 귀한 걸 먹으면 옛날 추억과 함께 먹는 것 같아 특별한 음식이 되어 마음의 영양을 채워주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일본에서 먹은 옥돔은 예전에 제주도에서 먹었던 옥돔 맛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래도 서일본에서 잡은 생선을 동경까지 가져온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제주도에 가면 반건조나 냉동해서 파는 옥돔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예전에 먹었던 제주도 근해에서 잡은 옥돔 맛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반건조가 아니라, 더 말렸고 냉동도 하지 않아서 지금보다 훨씬 더 신선했다. 어쩌면 예전에 먹었던 옥돔은 앞으로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일본의 어업 침략과 제주도, 제주도 해녀와 일본 어민, 해녀와 해남이 같은 어장에서 작업하는 경쟁적 관계에서 일본인의 지배를 받아 제주도 해녀는 높은 작업 능력에 싼 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 간다는 내용이다.
제2절 일본의 어업 침략과 제주도
1. 경쟁에서 지배로
일본인의 어업 침략 초기부터 일본인 어민이 한반도 및 제주도를 침략했기 때문에 현지 어민과는 대립하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일본인은 근대화한 어업장비와 무장한 어민이 일체가 되어 한반도 및 제주도를 침략했던 것이다. 일본인의 어업 침략이 제주도인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에 대해 제주도 해녀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기로 한다. 해녀는 제주도 여성의 상징이고 제주도의 어업을 담당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제주도 어장은 앞에 썼듯이 15-6세기부터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연안까지 제주도인의 어장이고 제주도 해녀의 어장이었다. 한반도 연안까지 제주도인의 어장이었던 이유로 해녀는 제주도에만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130). 실제로 제주도 해녀는 “대정 4(1915)년, 조선 어업령을 제정할 때 제주해녀 어업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모든 연안의 바닷가에 입어 관행 보전 등기를 하고 조합에서 입어권을 획득했다”라는 기술에서 볼 수 있듯이 한반도 연안도 제주도 해녀의 독점적인 어장이었다(131).
명치시대 어업 침략이 초기에는 한반도에 일본인 해녀가 진출했고 제주도에도 일본인 해남이 진출했다고 추측된다. 제주도에 대한 어업 침략에서 쟁점이 되었던 전복 채취를 위해 일본인 잠수부가 진출했다. 일본인 해남이 제주도에 진출한 것은 “그 수가 매년 4-5척에 15-6명이 승선해서 -중략- 잠수기선에 비하면 거두어들이는 이익이 오히려 커서”라는 기록을 보면 앞에서 쓴 일본인 어민의 증언에 따르면 나잠업자와 동행해서 일본인 해녀와 해남이 제주도에 진출했던 것이다(132). 한반도 및 제주도에 진출한 일본인 어민과 제주도 어민이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제주도에 진출한 잠수기 업자와 나잠으로 전복을 채취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과 제주도 해녀가 한반도에서 경쟁관계를 일본인 어민의 증언에 따르면 “황해도 근처는 제주도 해녀가 여자지만 우리들과 같이 조업을 하며 일본 이세 해인, 그리고 오우라 해인, 여기는 여자. 거기에 시코쿠 해인, 사가노세키 해인은 남자입니다. 그러면 고토 해인, 오쿠시마 해인이나 오지카 해인은 남자거든. 또 쓰시마 마가리 해인은 여자거든”이라고 한다(133). 이걸 보면 같은 어장에서 일본 각지에서 온 해녀와 해남이 제주도 해녀와 같이 일하는 모습이 잘 전해지는 증언이다. 그리고 한반도에도 일본인 해녀가 진출했다. 하지만 “이전 경상도 방어진, 울산군 포항 등에서는 50년 전부터 이세 해녀가 진출하는 어장이었지만, 명치 28(1895)년 제주도 해녀가 진출한 이래 거의 그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134). 제주도 해녀는 일본인 해녀보다 임금이 싸고 작업능률이 높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 해녀를 구축해서 소화 초기가 되면 한반도에서 일본인 해녀를 볼 수 없게 된다(135). 그 후, 제주도 해녀는 한반도 연안뿐만 아니라, 제주도 어장이 일본인 어민의 남획에 의해 자원이 고갈된 것으로 일본까지 출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제주도인의 일본에 출가하기 시작한 것은 명치 36(1903)년 제주도 해녀 수명이 동경에 속한 미야케지마에 온 것으로 시작된다고 한다(136). 1910년 한일병합 이전부터 제주도 해녀는 일본인 업자에 고용되어 한반도와 일본 등지에 출가하게 된 것이다. 제주도 해녀가 한반도에 출가하는 것에도 일본에 출가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 일본인 어민의 어업 침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제주도 해녀가 일본으로 출가하게 되는 것은 일본인 어민의 한반도 및 제주도에 침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제주도 해녀의 어장이었던 한반도 연안 및 제주도에 일본인 어민이 침략해서 무력과 잠수기 등을 이용해서 남획한 결과 현지 제주도 해녀의 나잠어업이 일본인과의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해녀가 일본인 어민과 경쟁관계라는 것은 제주도인이 조선 정부에 탄원하고 일본 어업 침략에 저항을 계속할 때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그리고 일본인의 어업 침략은 불법인 근대적인 설비로 남획한 결과 자원이 고갈되어 제주도인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사태가 된다는 예상이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정부는 제주도인이 반대하고 저항하는 일본인 어업 침략을 허용한 결과,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 전역의 수산자원을 한일병합 이전에 일본인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일본인의 제주도 어업 침략은 자원의 남획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인은 제주도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을 구입해 일본에 수출해서 자급자족의 제주도에 일본 상품을 수출 판매해 제주도 경제를 장악해 간다. 즉, 제주도 해녀와 일본인 어민의 경쟁에서 제주도 해녀가 패배하고 경쟁관계에서 서서히 일본인에 의해 제주도 해녀가 지배당하는 관계가 되어 갔다. 일부 제주도 해녀는 일본인 업자에 고용되어 현지 채용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 한반도, 일본 각지, 중국 연안까지 출가하게 된다. 제주도 해녀와 일본인의 어업 침략 과정과 그 관계를 보면 제주도 어민에게도 같은 일이 전개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음은 제주도 어민과 일본인의 관계를 보기로 하자.
각주
130) 升田一二『地域社会の発展とまちづくり』シード・プラニング 1986年 67p
131) 升田 전게서 83p
132) 朝鮮総督府商工部水産局編纂 『韓国水産誌』第一集 朝鮮総督府印刷局 1910年 428p
133) 久場 전게서 205p
134-5) 升田 전게서 82p
136) 升田 전게서 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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