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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셔니스타?

당근 귀신이 된 사연

오늘 동경은 아주 더운 날씨였다. 지금 최고기온을 확인했더니 34도였다고 한다. 날씨가 미쳤구만. 5월인데, 34도라니. 월요일은 도서관에 가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다 보니 시간이 걸렸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봤을 때는 최고기온이 32도라, 어제보다 1도 낮구나 싶어서 다행으로 여겼다. 바깥은 아침부터 주변에 제초작업을 하는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더운 날에 이런 기계소리는 더위와 짜증을 유발한다. 집에서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가장 더운 시간대에 집을 나서게 되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더니 완전 여름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지난주에 소매가 긴 겨울 잠옷에서 반소매 잠옷으로 바꿨는데, 반소매도 더워서 한여름에 입는 민소매로 아침에 바꿨다. 집을 나서서 공원에 가는 길에 봤더니 까마귀 세 마리가 더워서 그런지 나란히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꺼내는 사이에 두 마리는 가까운 나무로 날아갔고 한 마리만 남은 걸 찍었다. 수국도 볕이 잘 드는 곳에 있는 것은 살짝 피기 시작했다.

 

 

지난주 금요일에 입었던 옷 사진을 올린다. 학생이 "선생님은 선명한 색상이 잘 어울려요. 저희를 위해서 선명한 색상 옷을 입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나에게는 학생들이 이런 요청도 한다. 수업 중에 옷을 벗어 달라면 곤란하지만, 옷을 입어 달라는 요청은 들어줄 수 있다. 그래서 큰 맘먹고 지난주 금요일에 이렇게 옷을 입고 갔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화사한 색상의 옷을 입으면 변태나 치한을 만나는 확률이 높다. '치한이 된 남자'라는 책을 보면 화사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사람들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에 치한 행위를 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타깃으로 본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 치한도 있는 모양이다. 가장 곤란한 점은 화사한 옷을 입으면 같이 일하는 동료 중에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자신을 (성적으로) 꼬시는 걸로 착각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상한 남자를 꼬시지도 않고 꼬실 생각도 전혀 없다. 왜 하필이면 이상한 남자를 꼬시냐, 정신 차려라! 지금 시대, 특히 동경에는 어디에나 '이상한 사람'이 있다. 내가 일하는 대학이라는 세계에도 꼭 있어서 매일 본다. 그것도 내 주변이라는 게 참 마음에 안 들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그래서, 기분이 꿀꿀하다고 화사한 색감의 옷을 입기도 어렵다. 하지만, 학생의 요청이라, 오랜만에 용기를 내서 선명한 색상의 옷을 입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를 향하는 버스를 타서 자리에 앉았더니, 내 눈 앞에 약간 이상한(멘탈이 아픈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쩔 줄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갈등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떻게 하다니, 나를 만지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럴 용기는 없는 것 같다. 망설이다가 뒤쪽으로 갔다. 바로 옆에 앉은 남자도 멘탈이 아픈 회사원으로 보인다. 그 앞에 내가 아는 여학생들이 서있는데, 긴장한 표정으로 연신 얼굴을 긁고 쓰다듬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여학생은 그런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서 내 앞으로 오라고 했다. 만약에 여학생에게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하면 내가 나서야 하기 때문에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예상한대로 도중에 회사 앞에서 내려서 다행이다 싶었다. 

 

오전에 다른 선생이 나를 보더니, "오늘은 아주 화사한 옷을 입으셨네요" 인사한다. 나는 "저희가 서비스업이잖아요. 학생이 손님인데, 손님이 요청하면 들어줘야죠. 학생이 요청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맛이 살짝 간 것이 아닌가"하는 표정이 읽힌다.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보통은 학생들이 선생에게 구체적으로 이런 옷을 입어달라는 요청 자체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 주변 학생들을 보면 보통 상식과는 다른 행동이 많아서 익숙하기에 그 선생의 느낌은 이해한다. 

 

2교시에 학생이 놀라는 것 같아 설명을 했다. 3교시 학생들이 요청한 것이다. 선생이 학생들 요청을 들어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입었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인지 몰라도 학생들은 이상한 요청도 한다. 그랬더니, 학생이 하는 말, 아마, 선생님이라서 그런 요청을 했을 거예요. 학생들도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뻣는다고 자신들 말을 들어줄 사람을 골라서 하는 모양이다. 내가 리카짱 인형도 아니고 말이야.

 

3교시는 점심시간 이후다. 금요일도 더워서 아이들이 지친 상태였다. 교실에 들어갔더니, 학생들이 난리가 나고 말았다. 실은 학생이 요청으로 이렇게 옷을 입었다. 학생이 쓴 글을 읽어 줬다. 나에게는 옷을 이렇게 입으면 치한이나 변태를 만나는 확률이 높아서 위험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작은 사건들을 말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옷을 이렇게 입었다. 학생들이 재미있어 죽겠다고 정말 흥분했다. 나의 슬픈 이야기를 재미있다니 기가 막히다. 변태나 치한을 만난 날에는 복장에 문제가 있었나 싶어서 증거로 사진을 찍어 둔다. 블로그에도 올려서 변태나 치한을 자극할 복장이었는지 독자에게 의견을 묻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보여서 검증을 받는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의 어떤 복장을 하겠나? 이상한 사람 중에는 내가 자신을 유혹한다고 행동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나로서는 왜 그렇게 되는지 이해가 불가하다. 그런 사람과는 말을 섞은 적도 없는데.

 

수업이 끝날 때, 항상 감상문을 받는다. 학생들이 열심히 감상문을 써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감상문을 받고 어의가 없었다. 단 한 명도 교과에 대한 내용은 없고 온통 내 패션과 개인적인 관심사로 채워져 있었다. "선생님, 다음에는 초록색을 입어 주세요", "핑크색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파란색을 입은 걸 보고 싶어요", "선생님, 하고 있는 액세서리가 독특한데, 몇 개나 갖고 있나요?", "강한 색상을 소화해내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학생들이 존경하는 포인트가 내 패션이었구나. 확실히 안 것은 학생들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끝이 없겠다는 것이다. 학생들 요구대로 했다가는 다른 선생들이 보기에 '살짝' 맛이 간 줄 알았던 사람이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데, 실은 내가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는 걸 몰랐다.

 

수업이 끝나고 오후에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학생들이 길게 줄 서 있는 앞을 지날 때, 학생들이 나를 보고 움직임이 일시 정지했다. 나를 보고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모르는 학생에, 그중에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자신들이 보고 있는 걸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도 있었다. 학생들이 충격을 받은 걸 보고 내가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객관적으로 내 모습을 보면 '당근 귀신'이라는 형용이 맞지 않을까? 세상에 그런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백주 대낮에 듣도 보도 못한 '당근 귀신'을 봤으니 학생들 넋이 나갈만하다. 이러니까, 학생들 말을 들었다가 큰일이 나는 것이다. 내가 미쳤다.

 

정말로 본의 아니게 '당근 귀신'이 되고 말았다. 지난주 금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 나비가 되는 도중에 있는 걸 찍은 사진도 올린다. 나머지는 오늘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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