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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도 사람들/'파친코'와 재일 제주도 사람들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해인문화 이동하는 사람들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 22도였지만 아침부터 쾌청하게 맑은 날씨였다. 이불을 널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느라고 할 일이 많은 하루였다. 어젯밤에 문재인 대통령의 마지막 퇴근길이자 퇴임식을 보고 기분이 좋은 한편 싱숭생숭해서 머리를 짧게 밀었다. 머리가 짧지만 막상 머리를 밀면 꽤 많이 잘려 나와 놀란다. 오전에 뉴스를 체크하느라고 야후 재팬을 클릭했더니 한국 대통령 취임식이 생중계되어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봤는데 소리 없이 봤다. 일본 뉴스는 친절하지 않아서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근데, 넥타이 색상이 뭐지? 빛이 반사해서 그런지 거의 흰색으로 보여서 넥타이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보니 그림이 너무 이상하다. 의상을 코디하는 사람이 그런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가? 전혀 지지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국 대통령이니 창피스러운 그림은 보이지 않길 바란다. 영상만 보는 것도 참기가 힘들어서 금방 끄고 말았다. 헤어스타일도 볼륨을 이상하게 올려서 코미디언도 아니고 이상한 걸 강조하는 것 같다. 이런 걸 제대로 조언하는 사람이 없는 건가? 아니면 MB스타일을 따라 하는 건가? 

 

문재인 대통령이 사저로 가시는 걸 찾아서 봤다. 중계를 틀어놓고 중간에 청소도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서 문재인을 연호하는 걸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서울역에 도착하는 걸 YTN에서 봤는데 "문재인을 감옥으로"와 "문재인을 깜빵으로"가 아주 크게 계속 들렸다. YTN이라는 방송국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걸 잘 들리게 위치 선정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걸 들으면서 저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로서 문재인 대통령 내외를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끝날 것 같아서 아예 자리 잡고 앉아서 좋은 녹차를 달이고 맛있는 도라야 요캉을 썰어서 보기 시작했다. 좋은 걸 볼 때는 곁들이는 것도 좋은 걸로 하고 싶다. 생애 첫 투표가 문재인 대통령을 찍은 것이었다. 지지자로서 대통령직을 무사히 훌륭하게 마치고 귀가하는 길을 배웅하는 심정으로 보면서 오후를 보냈다. 양산 사저에 도착해서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봤다. 양산 사저 계단이 가파르게 보여서 나이를 먹으면 저런 계단이 힘들 텐데, 설계하는 사람은 나이 든 부모님 집을 설계하는 마음으로 했을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 계단이 아닌 길이 있겠지 하고 상상했다. 별게 다 눈에 띄고 걱정을 하고 만다. 김정숙 여사의 한복이 참 잘 어울리고 돋보였다. 같은 옷을 미국 방문 때도 입었던 것 같다. 오늘 오후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를 아주 오래 많이 볼 수 있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좋은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로서 문재인 대통령의 시대에 막을 내리는 송별식이었다. 송별식이어도 서운하지 않은 잔잔한 여운이 오래 남아 상쾌하고 행복했다. 

 

부록으로 탁도비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가방을 던지면서 좋아하는 사진이 걸작이었다. 그렇게 몸으로 유쾌한 표현을 하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1 제주도의 문화적 배경

4)  해인문화(海人文化)-이동하는 사람들

 

앞에서 쓴 것처럼 제주도 사람들의 생활에서 해인문화의 영향을 뺀 제주도 문화는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며 이동성이 풍부한 생활을 보냈던 중세의 제주도인에 초점을 맞춰 현재도 활발히 이동하는 사람들인 제주도인을 고찰하기 위한 재료로 삼으려 한다.

 

제주도는 한반도, 일본, 중국과 교역하는 해로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이 이루어져 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주도인은 제주도를 거점으로 외부로 이동하면서 생활하고, 한편 태풍의 영향 등으로 각지에서 사람들이 표착했던 곳이 제주도였다. 결국, 제주도는 해로를 매개로 한 주변국 사람들이 유입하고, 현지 제주도인이 외부로 유출했던 지역이었다. 지금 말로 하면 국제교류가 활발했던 열린 지역이었다. 

 

제주도를 거점으로 외부로 이동하며 생활했던 제주도인에 대해 高橋公明의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그는 해인의 이동성에 대해 “해인은 어로, 교역, 해적활동 등을 주된 생업으로 했기 때문에 이동은 그들의 활동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한다(52). 그래서 “해인이 활동하는 공간은 넓고 이문화와 접하는 기회도 많다”(53). 해인은 그 활동에 따라 이동했던 현지의 문화를 흡수하고, 자신의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도 수행했던 걸로 추측된다. 그런 “해인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을 해역 세계라 부른다”(54). 거기에 “동아시아에서는 동남아시아와 달리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영역 국가가 성립해 왔다. 그래서 공권력은 사회의 세세한 부분까지 침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이고 전근대의 국가권력을 과대하게 평가할 것은 아니다라며,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로서 해인과 해역 세계가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55). 제주도 해인도 역시 조선왕조라는 국가 공권력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해역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던 사람들이었다고 보고 있다.

 

“사천, 고성, 진주 등에 ‘州豆禿也只’라 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중략- 의복은 倭人의 것도 섞이고, 언어는 倭語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니다. 배는 왜선에 비해 더 튼튼하고 속도도 빠르다. 언제나 釣漁, 해초 채취를 생업으로 하고” 조선왕조에서 본 제주도 해인에 대한 인식이다. 豆禿也只’라는 제주도 해인은 “좋은 어장을 찾아서 각지에서 모여 이동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은 ‘以船’로 표현된 倭人 과 같은 생활형태라고 할 수 있다”(57). 제주도 해인은 이동성이 풍부한 생활양식을 갖고 있던 것과 언어가 한반도와 상당히 달랐던 걸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거기에 그런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은 “豆禿也只라 자칭하는 제주도인 수천 명이 처자를 데리고 전라, 경상도 연해를 이동하고 있다”(58). 참고로 세종시대(1418-1450)의 제주도 인구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합쳐서 2,569호이고 인구 18,897명이었던 것에서 보면 제주도인 중 해인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59). 인용한 내용만으로는 인구수를 특정하기 어렵고 세종시대 인구조사와 정확하게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연해를 이동하며 생활하던 제주도 해인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상상하는 단서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 연해를 이동하며 생활하는 제주도 해인을 “倭人言語의복을 걸치고 海島를 왕래하여라는 내용을 보면 倭人과의 교류가 밀접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제주도 해인에게는 먼저 쓴 ‘豆禿也只’라는 사람들과 똑같이 “해안에 임시로 살거나, 배를 타고 이동하는 등” 鮑作人(전복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61). 豆禿也只과‘鮑作人 모두 국가에서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鮑作人의 경우는 헌상물인 전복을 잡기 때문에 “귀중한 해산물을 공급하기 때문에 鮑作干(鮑作人)을 보호하고 있으며, 만약 鮑作干을 부역에 편성해서 통제하려고 하면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는 사람들이었다. 먼저 쓴 내용에 따르면 제주도 해인은 “이동생활과 잠수어업을 특징으로 하는 생활형태를 갖고 전술한 倭人 해인과 공통의 문화를 갖고 있다”(62). 거기에 양쪽 모두 국가 공권력으로 통제하는 것이 곤란한 존재였다.

 

제주도 해인이 생활하는 해역 세계는 한반도 연안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의 요동반도 근처까지 미치고 있었다. 평안도와 명나라의 영역인 요동반도의 경계 연장선상에 있는 海浪國”에도 “제주민 20여 가구가 새로 와서 여기에 거주한다”고 되어 있어, 제주도 해인이 광범위하게 이동하고, 이동한 곳에서 적응(공존)하는 생활을 해왔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63). 그 섬은 “명나라의 영역에서 온 해인과 제주도 등 조선 영역에서 온 해인이 만나 교역하는 장소였다”고, 하지만 이 교역은 “밀무역이었다”(64). 한반도 연안 해인이 국가 공권력으로 통제가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면 이들도 같은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동하는 해역 세계를 통해 교류하는 해인 생활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다음에는 외부로 표류했던 제주도인의 사례로부터 제주도 해인의 활동범위를 살펴보기로 하자. 제주도인이 “표류했던 지역은 五島列島, 도카라 열도, 琉球列島, 중국 연안 각지를 비롯하여 상당히 넓은 범위에 분포하고 있다”(65). 이들 대부분은 송환되었기에 실제 표류했던 사례는 이보다 훨씬 많고 그 범위도 넓다고 보고 있다(66). 高橋논문에서 논하는 것을 보면 제주도 해인은 해역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왔던 사람들이고, 이동한 곳에서 유연하게 생활에 적응해 왔던 것을 고려하면 그 활동범위는 일본, 중국, 조선에 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해역 세계에서 만나 교류했던 해인들끼리는 해인문화에 의거해 영역 국가라는 틀에 구애받지 않고 신뢰관계를 구축했던 일도 있었다. 예를 들면 琉球(현 오키나와)에 표류했던 제주도인이 류큐인의 친절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보다 해인으로서 연대의식을 우선하는 자세라는 것이다”(67). 먼저 쓴 제주도인의 국가관과 부합하는 내용이며 제주도인의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제주도를 거점으로 외부로 나갔던 제주도인을 살펴봤는데, 이제부터 제주도에 표착했던 외국 선박에 대해서 제주도에서는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제주도에 표착했던 외국 선박에 관한 (1848-1884) 고창석의 논문을 중심으로 보기로 한다(68). 그의 논문에서 다뤄진 사례는 16건인데 일본 선박이 10, 청나라 선박이 6건이었다. 일본 선박의 출발지를 보면 佐賀 1, 鹿 4, 薩摩城下(鹿兒島)2, 山口 2, 山口 阿武郡 1건이었다. 청나라 선박의 출발지는 광동성 1, 강남성 3, 산동성 1, 절강성 1건이었다. 이들 선박들은 어선을 비롯해서 교역을 하던 상선, 항해 중 해적활동을 했던 선박, 실종자 수색이나 조세를 운반하는 官船이 있는데, 그중 교역을 위한 상선이 가장 많았다. 선박에 타고 있던 사람을 보면 일본 선박에는 일본인과 류큐인, 청나라 선박에는 중국인과 프랑스인, 러시아인이 타고 있었다. 프랑스인과 러시아인은 각각 교역을 목적으로 중국 선박에 중국인과 함께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에서 해역 세계의 넓이와 해인들이 다양하게 교류하는 일면을 볼 수 있다(그림 1.1 참조).

 

 

 

제주도는 표착한 선박에 대해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고 있다. 거기에 표착 선박 사람들에게 식량, 의료, 연료 등을 지급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국선박이 표착한 경우 보고를 받아 지방 관료가 그 경위를 조사하러 나갔는데, 외국인과 만날 때는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며 식량 등 필요한 것은 새롭고 깨끗한 것을 주도록 정해져 있었다. 특히 외국인이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 배경에는 외국인이 자기 나라로 귀국한 후에 나쁜 인상을 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제주도인이 그들의 지역에 표착했을 때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앞에 쓴 제주도에 표착한 외국선박은 어느 일정기간 동안 표착한 선박들 중 일부라고 추측된다(69). 표착하지 않았던 선박의 왕래를 생각하면 당시 해역 세계에서 교역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에 표착한 선박에 대해 대처방식이 정해져 있던 것과 지방 관료와 訳学, 通事(통역을 뜻함)와 함께 외국선박을 만나는 것 등으로 보면 이전부터 제주도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선박이 표착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제주도는 제주도인이 외부 이동이 빈번했다는 것과 동시에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던 열려 있는 지역이었다.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함에 따라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는 제주도인의 문화와 어우러졌다. , 제주도는 다양한 문화가 교류하면서 어우러졌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

52-54)高橋公明「中世の海域世界と州島」網野善彦他著『島シナ海と西海文化』海と列島文化 第4 館 1992c 169 p

55)高橋c 전게서 171p

56-8) 高橋c 전게서 177p

59)朝鮮府『朝鮮の人口現象』調査資料二十二集 1927年 40p

60-2)高橋c 전게서 177p

63-4) 高橋c 전게서 185-6p

65-6)高橋c 전게서 178-181p

67) 高橋c 전게서 193p

68) 고창석 ‘<재주계록>에서 볼 수 있는 제주도에 표착한 그들의 실태’ 탐라문화 제13호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3

69기록에 마지막이 1848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일본의 어업 침략이 빈번했다고 추측이 된다. 표착선으로 보고된 외국 선박은 왕래하던 선박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