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09 뿌리깊은나무의 기억 2
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우울하게 어둡고 추운 날씨다. 봄이 금방이라도 올 것처럼 맑고 따뜻했던 날씨도 한 3일 비가 오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면 봄은 아직 먼 것 같다.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지난 번 학생의 성적을 매듭지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정해진 규정으로 사실과는 다른 이유를 기재해야 된단다. 사실과는 달리 내가 미스를 한 것으로 처리한다.
뿌리깊은나무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작년 세월호 사고로 인한 것이었다. 작년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새벽에 꿈을 꾸었다. 진도 근해에서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물에 빠지고 난리가 나서 진도 근해가 뜨거워진 것이었다. 나는 생뚱맞은 꿈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도와 나는 무관했으니까. 진도가 지리적으로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도 잘 모른다. 아마도 가장 친근감이 있는 것이 있다면, 진돗개 정도다. 그 날도 집에서 호주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한국에서 여객선이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들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확실해진 것은 세월호 사고는 국가권력에 의한 죄 없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학살’한 사건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그럴리가 없다고 혼자서 자문자답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 데, 그런 걸 공공연히 할 수가 있다는 건가? 돌아가는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뉴스를 접하면서 내가 봉인했던 트라우마의 기억이 하나 열리고 말았다.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일어난 일, 서울에 있었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목포출신 친구가 광주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단편적인 말을 하면서 미쳐가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도무지 현실감을 못 느꼈다. 당시, 나는 서울 명동에 있는 회사에 다녔었고, 그 친구가 근무하는 곳은 시청 앞이었다. 시청 앞에서, 서울역에서, 명동에서 큰 데모가 있었어도 이튿날 신문을 보면 아주 작게 실리거나, 아예 기사가 없었다. 군사독재정권하에 성장해서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지만, 너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력감이 들었다.
그 전 해에 내가 살던 집에서 보던 신문에 기사가 일부 지워져서 배달되었다. 일부가 지워졌으니 알고 싶었다. 원래 거기에는 어떤 말이 있었는지? 어떤 말이 있었는지 알아냈다. 그러나 그 말이 국가권력에 의해 지워야 할 정도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권력에 의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국민들에게 ‘공포’를 조성하는 것으로 알았다.
1980년, 나는 뿌리깊은나무 정기구독자였다. 내가 돈을 낸 것이 아니라, 아는 친구를 취직시켜줬더니 고맙다고 정기구독을 신청해줘서 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책을 더 이상 보낼 수 없다는 엽서가 날아왔다. 잡지사의 사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서 강제로 폐간이 된다는 걸 알았다. 속이 확 뒤집어졌다. 고등학생 때부터 내가 읽었던 뿌리깊은나무가 얼마나 ‘불온한’ 서적인지 몰랐다. 거꾸로 강제로 폐간될 정도로 ‘불온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알겠는가, 겨우 스무살 남짓한 별 볼 일 없는 소시민… 그런 소시민이 읽는 잡지 마저도 국가가 없앤다는 것은 ‘도둑질’보다 더 나쁜 일이었다. 작은 숨구멍 마저도 틀어막는 일이었다.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된다는 것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런 나라에 살기가 싫다고 생각했다. 내 주위에는 데모를 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도망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계층의 젊은이도 당시 한국 상황에 넌덜머리가 나서 싫었던 것이다. 군부에 의해 시민이 학살당하는 나라에서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었을까? 나도 은밀히 도망가고 싶었다.
83년에 일본에 오기 전, 여권을 신청해서 소양교육을 받을 때, 일본에 가는 사람은 조총련을 조심하라고 했다. 간첩으로 포섭될지도 모른다고…조총련이 뭔지도 잘 몰랐지만, 어쨌든 ‘위험’ 하니까 조심해야 한다. 어느 날, 전철에서 조선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을 봤다. 흰색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있어서 한눈에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 조총련으로 알았다. 나는 무서워서 머릿속에서는 별별 상상을 다했다. 조총련은 한국사람을 알아보고 간첩으로 포섭하려고 다가올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여학생은 청초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국민학교 때부터 받아온 ‘반공교육’으로는 ‘공산당’은 사람도 인간도 아니었다. 머리에 뿔달린 ‘괴물’이었다. 어른들, 선생들은 ‘공산당’도 머리에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었고 인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가르치지 않았다. 국민교육은 ‘반공’하면서, 같은 ‘민족’들이 사는 북한을 적시하면서 ‘민족’을 사랑하라고, 아주 모순된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민족적인 자부심’을 가지라고도 했다. ‘민족적인 자부심’을 가질 내용을 몰랐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로 ‘민족적인 자부심’을 갖는 것은 무리였다. 국민교육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적합할지 몰라도 정상적인 ‘인간’조차 못된다는 걸 알았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라는 이유로 ‘괴물’로 인식하게 한 상상력을 주입했던 국민교육과 선생들을 부정하고 싶었다.
뿌리깊은나무는 자신들의 뿌리를, 관심이 적었던 자신들의 뿌리와 전통이라는 것을 상상하고 눈을 뜨게 하려고 했다. 부끄럽게 생각했던 전통적인 삶이 얼마나 지혜롭게 영위되었는지를 멋있게 보여주었다. 얼마나 ‘불온한’ 책이었던가. 자신들의 뿌리와 전통을 알아간다는 것은 국민교육으로 행해지는 획일화된 국가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태어나서 자란 땅(자연)과 사람들의 삶에 관한 것이다. 나의 연구는 자신들의 뿌리와 전통을 알아가는 작업으로 재일 제주도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작년 세월호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의 4.3이, 광주의 5.18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내가 봉인했던 뿌리깊은나무의 트라우마도 함께 되살아났다. 직감적으로 이민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을 예감했다. 자신의 소중한 것들과 떨어지는 삶을 택해서 외국으로 ‘망명’하게 하는 정치는 무엇인가? 지금은 군사독재정권이 아니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죄없는 국민을 ‘학살’하는 권력, 젊은이를 ‘절망’하게 ‘무기력화’하는 정치. 그야말로 ‘탐관오리’라는 말이 적절한 형용사가 될 것 같은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는 ‘현실’이다.
아무리 ‘역사’가 비참하다고 해도 ‘현실의 참담함’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내가 젊었을 때, 절망한 것은 ‘역사’가 아니었고 ‘현실’이었다. ‘식민지 지배’를 한 옆나라 사람들의 잔인함보다 같은 ‘민족’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학살’이 훨씬 피비린내가 났고 아프게 했으며 '절망'하게 한다. ‘식민지 지배’는 ‘역사’이지만, 독립 후에 일어난 ‘학살’이나, ‘전쟁’은 사랑해야 할 같은 ‘민족’ 사이에 일어난 일이며 ‘현실’이었다.
그립다, 뿌리깊은나무가. 뿌리깊은나무가 보여줬던 기개가… 한편으로 아주 슬프다. 지금도 뿌리깊은나무를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트라우마에 관해 두서없이 써봤다. 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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