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7 미투는 '횃불'이다
오늘 동경은 대체로 맑고 따뜻한 날씨였다. 오전에는 맑고 햇살이 비쳤지만 바람이 불어서 체감온도는 약간 추웠다. 오전에 학교 일을 마치고 집청소를 간단히 했다. 날씨가 따뜻해서 오후에 산책겸 야채와 과자를 사러 나갔다. 농가 마당에는 쇼고인 무우와 감자가 있었지만 사지 않았다. 야채 무인판매에 가서 야콘과 기쿠이모라는 감자와 닮은 야채를 샀다. 시금치가 많이 나와 있었지만 사지 않았다. 잔돈이 모자라서 200엔 외상을 했다. 외상은 메모지에 써놓고 다음에 돈을 넣으면 외상 쓴 것을 지운다. 마트에 가서 과자와 봄나물을 좀 사왔다. 요새는 야채가 별로 없는 계절이다. 요새 봄나물을 사다가 먹는다. 봄나물은 맛있다기 보다 계절의 향기를 느끼고 싶어서 사는 것이라, 계절이 되면 한 번쯤 먹는 것으로 족하다. 머위와 두릅을 먹었고 오늘 산 것은 쓴 맛이 없는 나물이었다. 봄나물은 특별히 향기가 좋은 것 같다.
요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MeToo)를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는 '횃불'이 아닐까 싶다.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가 서로 자극을 받아 용기를 내서 마치 '봉화'처럼 연달아 '횃불'이 오르고 있다. 미투를 하는 여성들 자신이 얼굴을 드러내면서 '성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으로 자신이 '횃불'이 되어 타고 있다. '횃불'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를 것이다. 참고 살았던 세월이 길기에 '횃불'이 쉽게 꺼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촛불'과 '횃불'은 전혀 다르다. 물론, '촛불'이 큰 불로 발전하는 씨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촛불'은 은은하게 타오른다. 컨트롤이 가능하고 끄기도 쉽다. 그래서 '촛불'은 많이 모여야 한다. 한국은 작은 '촛불'이 지속적으로 모여서 '촛불혁명'을 일으켰다.
'횃불'이 된 여성들은 일차적으로 미투로 고발한다는 것, 자신의 피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는 '피해자'의 말에 성실히 귀를 귀울여야 한다. 비판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자신이 당한 일로 기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었던 범죄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상처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다. 상처가 사건이 있었던 당시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성폭력'이 그다지 심각한 범죄가 아닐 것이다. '성폭력'에 의한 상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신적인 상처로 변해 상처가 더욱 깊어간다. '피해자' 본인이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상처가 '피해자'를 공격한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 '치유'를 향한 첫걸음이기에 미투로 고발할 수 있다는 것이 시작이다. 미투를 하고 있는 '피해자'들은 '성폭력'을 당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거기에 고발 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성폭력'으로 인해 '영혼의 살해'를 당해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 것이다. 거기에 미투로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자신이 '횃불'이 되어 타오르고 있다.
지금 타오르는 미투의 '횃불'이 활활 타서 '혁명'이 되길 바란다. '촛불혁명'을 일으킨 나라에서 '횃불혁명'을 못할 것도 없다. 우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촛불혁명'이라는 성공사례를 가지고 있다. 미투로 '횃불'이 되어 자신을 태우는 여성들이 타서 재가 되는 것으로 끝나면 정말로 한국이 끝장난다. '성폭력'에 대해 미투를 하는 여성들이 자신들에게도 소중한 여성들이라는 것을 남성들이 잘 알았으면 좋겠다.
'횃불'이 타는 것은 '치유와 재생'을 위한 것이다. '횃불'에 '성폭력'을 범한 '범죄자'가 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범죄자'도 '성폭력'이 불에 데이는 '범죄'라는 걸 확실히 알아야 한다. '패해자'는 '횃불'로 유해한 병충을 태우고 '피해자'를 포함한 사회가 건전하게 '재생'하기 위한 밑거름을 만들고 있다.
한국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미투를 보면서 한국여성들이 용감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한국에 봄이 와서 '성폭력'을 당한 것을 여성이 얼굴을 들고 고발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런 '범죄'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일어나는 걸 보면 알겠지만 쌓이고 쌓였고 '범죄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던 썩은 사회였던 것이다. '범죄자'들이 오히려 큰소리 치면서 떵떵거리고 살았던 것이다.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면 '성폭력'을 행한 자가 미투로 인해 드러나면 '공소시효'가 지나서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걸 무신경하게 쓰고 있다. 마치 다른 '가해자'들에게 '공소시효'가 지났으니까,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 같다. 법적으로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과거에 '성폭력'을 했다는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윤리적, 도덕적으로 얼마든지 징벌할 수있다.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은 단지 법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성폭력'에 대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은 전혀 다르다. '가해자'는 자신의 권력을 배경으로 절대적인 약자에게 가하는 범행이라서 자신이 좋을대로 인식하고 쉽게 잊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양심에 가책도 없다.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한다. 거꾸로 여성이 원한다고, 여성을 위해서 그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여긴다. '피해자'에 대해 나에게 선택된 것을 '영광'으로 알고 고맙게 여기라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피해자'가 미투로 고발을 해도 '네까짓게 나를 고발해'하는 심리라, '피해자'를 괴씸하게 여기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가 어렵다. 한편으로 '피해자'는 사람들이 보기에 경미한 비일비재하다고 여기는 '성폭력'도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극도로 긴장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아무리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미투를 고발하는 여성들, '횃불'이 된 여성들은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 중 극소수이고 피해 내용을 축소해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자신들 인생을 걸고 미투로 '횃불'이 된 여성들이 '봉화'를 올리고 있다. 미투의 '횃불'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 방방곡곡의 해충을 불태울 것이다. '피해자'의 '치유'와 건강하고 풍요로운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서 '횃불혁명'이 성공하길 바란다. 바다건너에서 연대하는 마음으로 '횃불'에 기름을 부으며 지켜보고 있다. '횃불혁명'이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사회의 건전한 미래를 여는 지름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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