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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생활

현실과 현실도피

오늘 동경은 비가 그치고 기온이 좀 올라갔다. 어제보다 10도 정도 올라갔다. 햇볕이 났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는 건 오후에 들어서다. 바깥은 햇볕이 나고 기온이 올라가서 따뜻해도 집안은 여전히 춥다. 며칠 동안 비가 와서 빨래를 못해 빨래가 밀렸다. 아침에 비가 그쳐도 땅이 마르지 않아 빨래를 해도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빨래를 하는 것이 좋다. 오전에 빨래를 두 번해서 널었다. 며칠 비가 오면 단지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기분이 든다.

 

 

비가 그치고 날씨가 따뜻해질 시간을 기다리려니 시간이 아까워서 조바심이 난다. 우선, 바깥공기를 맡고 싶고 마트에도 가야 한다. 벚꽃도 아직 볼만한 시기라서 할 일이 많다. 빨래를 두 번해서 널고 베란다 청소를 간단히 하고 11시 넘어서 나갔다. 마트에 먼저 들러서 과일을 사서 배낭에 넣고 벚꽃을 보기 위해 걷기로 했다. 

 

역에서 가까운 강가에는 벚꽃이 많이 폈는데 걷고 있으면 한 시간 이상 걸어도 벚꽃이 계속되니까, 적당하게 거리를 조절해야 한다. 사실 몇 년이나 벚꽃을 보고 있지만 끝까지 간 적이 없다. 보통은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를 걷는다. 오늘 벚꽃을 봤더니 반이상 벚꽃이 져서 주위에 꽃잎이 눈처럼 내렸다. 벚꽃이 질 때도 예쁜데 오늘 아침까지 비가 왔으니 꽃잎도 많이 젖었다. 

 

마트에서 산 과일을 벚꽃 아래 앉아서 손을 소독하고 두 개 까서 먹었다. 오늘은 평일에 아직 기온이 낮아서 점심시간에도 강가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강가를 걷기 시작해서 길을 건너고 다시 건너서 한 시간 반 정도 걸었다. 앞으로 동경에서 벚꽃 구경할 일이 없을지도 모르기에 마지막으로 알고 많이 봐 둘 생각으로 걸었지만, 근래 강가 벚꽃도 군데군데 잘려서 이가 빠진 것 같아 이전과는 사뭇 풍경이 달라졌다.  

 

내가 사는 단지를 봐도 예전에는 벚꽃이 만발했는데 지금은 벚꽃나무가 있지만 벚꽃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베란다에도 벚꽃이 손에 닿을 듯 화려하게 폈지만 지금은 그런 흔적조차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벚꽃이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을 쓰고 베란다를 열고 확인했다. 처음에 이사 왔을 때 마치 화려한 병풍처럼 벚꽃이 넘치게 폈는데 그런 기억이 내 착각이거나 망상이라도 되는 것 같은 변화다. 지금 내 주변은 벚꽃나무만이 아니라, 가로수나 가장 가까운 거목 느티나무도 무참할 정도로 잘려서 경관도 아주 보기가 흉해졌다. 이건 내 베란다에서 보는 것만이 아닌 주변 경관을 보면 매우 좋았던 환경이 점점 피폐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경관만이 아닌 흔적도 없어진 벚꽃이 환상적으로 폈던 시절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기억도 가끔 떠오른다. 거기에는 현재 피폐해진 주변 풍경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리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갈수록 피폐해지는 풍경으로 변하고 있다. 

 

아침에 요가를 하면서 문득 이사 올 때 주변 풍경을 떠올리고 베란다에 벚꽃이 만발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화려했던 그 시절이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다. 이건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각이 있다. 일본의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기에 현재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가난해진 일본의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기 싫어서 애써 외면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현실 도피하고 싶다. 실은 많은 일본에는 자신들이 최고로 좋았던 버블경기 시대를 사는 것 같은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기억과 현실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간은 그 시간을 지낸 사람만 알 수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주위 환경이나 일본 경제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예전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가난하고 피폐해진 현실은 현실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도 벚꽃 구경하느라고 산책을 많이 했더니 날씨도 따뜻해져서 땀이 났다. 다시 여기서 벚꽃구경을 못해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걸었다. 집에 오는 길에 달래가 난 곳에서 달래를 뽑아서 한 손에 잡았다. 개두릅이 있는 것도 좀 땄다. 이런 자연환경이 남아 있는 건 다행인지도 모른다. 

 

저녁에는 검은콩과 흑미를 넣은 현미밥에 산나물을 무치고 달래장으로 비벼서 게를 넣은 뭇국으로 먹었다. 내 가까이에 벚꽃나무는 있지만 벚꽃이 피지 않는 비현실적인 풍경에서도 건강한 식사를 하는 현실을 살고 싶다. 

 

작년에 찍은 벚꽃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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