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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생활

죽순과 택배를 받았다

오늘 동경은 비가 오다가 그쳤다가 저녁이 되면서 비가 많이 오고 최고기온 16도로 쌀쌀한 날씨다. 원래는 내일과 모레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내일은 맑았다가 흐려지는 모양이다. 창밖에는 나무에서 새순이 올라와 연두색으로 세상이 물들고 봄비가 와서 좋은데 추웠다. 오늘 아침에 친한 이웃이 전화를 했다. 내가 죽순을 캐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같이 죽순을 캐러 가자는 전화였다. 마침 비가 오고 청소도 할 예정이라, 내일 오전 날씨가 맑다니까, 내일 오전에 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신에 죽순을 캐러 갈 때 도구를 빌려달라고 했다. 목요일에는 항암치료를 받으러 가니까,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병원에서 보내고 링거를 꽂은 채 나와서 토요일 오후까지 링거를 맞는다. 죽순을 캐러 가는 것도 그전이 아니면 링거를 꽂은 채 가는 건 무리다. 항암치료를 받고 며칠은 좀 힘드니까, 쉬어야 한다. 

 

언니가 어제 바다에 다녀왔다고 바다에서 잡은 걸 택배로 보냈다고 한다. 택배가 오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손질할 것은 손질하고 정리해야 한다. 택배는 항상 12시가 되기 조금 전에 온다. 오늘도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냉장으로 왔는데 상자가 평소 두 배나 될 정도로 크다. 아이고, 이걸 다 어떻게 먹지 했는데 냉장고에 넣을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배말을 씻고 데쳐서 한 번에 먹을 만큼씩 소분해서 냉동하고 보말도 큰 건 삶아서 먹고 나머지는 씻어서 냉동 보관했다. 배말 똥에서도 맛있는 육수가 나오니까, 따로 냉동했다. 보말도 까서 양념간장을 넣고 저녁 반찬도 만들었다. 어제 바다에 갔다 와서 바로 보낸 것이라, 갯내음도 신선했다. 언니는 평소에 이렇게 자주 바다에 가지 않을 텐데, 나에게 보내기 위해 언니와 형부가 자주 바다에 가는 것 같다. 토요일까지 일을 하고 가게를 하기에 피곤한 언니가 쉬는 날이라고 일요일 아침 새벽부터 나서서 바다에 가서 채취해서 먹기 좋게 손질까지 해서 보낸다. 배말과 보말을 그냥 보내는 건 내가 손질하면서 갯내음을 맡고 간접적으로 바다에 간 기분이라도 느끼라고 하는 거다. 

 

비가 오고 날씨도 추워서 산책을 나가는 걸 포기하고 오후에는 간단히 청소를 했다. 청소하면서 음식물 쓰레기와 헌 옷, 재활용 쓰레기를 가져다 버렸다. 평소에 쓰레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 편이라 쓰레기를 모아뒀다가 버린다. 냉장고에도 항상 음식물 쓰레기가 있을 정도다. 그래서 쓰레기를 한꺼번에 버리면 속이 후련해진다. 집에서 멍하니 지내는데 초인종 이 울렸다.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뭐지 잔뜩 긴장해서 현관에 나갔다. 친한 이웃이 공원에서 죽순을 캤다고 가져왔다. 비가 오다가 그쳐서 산책을 겸해서 갔다고 한다. 죽순을 캐는 것이 힘든데 비해 죽순도 크지 않으니까, 나에게는 하지 말라고 한다. 친한 이웃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처음이다. 나도 친한 이웃네 집에 자주 가지만 항상 정원에 있다가 오지 집에는 들어간 적이 없다. 나는 갑작스러워서 당황했다. 서둘러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서 나누고 냉동고에 있던 것도 좀 나눠서 보냈다. 친한 이웃은 항상 나를 챙기면서도 나에게 자기가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친한 이웃은 항상 나를 배려하면서도 부담이 되지 않게 신경 쓴다. 친한 이웃은 다른 사람에게 죽순을 받아서 집에 죽순이 있다고 했다. 나에게 주려고 비가 오고 추운 날에 죽순을 캐러 간 것이다. 목요일에 항암치료를 간다니까, 힘들까 봐 혼자 간 모양이다. 죽순을 캐는 게 정말 힘들었을 텐데, 비가 오고 추운 날에 가서 고생했을 텐데, 그런 고생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이전에 나 같으면 추운 날에 이런 걸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쁘게 죽순을 받아서 바로 삶아 저녁에 먹었다. 그게 친한 이웃이 나에게 바라는 것일 거다. 에고, 정말로 화가 나고, 그 정성이 고마워서 눈물이 나서 정작 죽순 맛을 즐기지 못했다.

 

나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가족들이 걱정해서 언니와 올케에게 하루 세끼 차려 먹는 걸 사진으로 찍어서 보낸다. 그러면 나도 신경 써서 조금이라도 잘 차려서 먹게 될 것이고 언니나 올케 걱정도 덜 것 같아서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언니 덕분이기는 하지만, 나는 정말로 요새 잘 먹고 있다. 

 

오늘 저녁에 먹은 걸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흑미와 검은콩을 넣은 현미밥 조금, 된장국, 삶은 죽순 두 개, 데친 굼벗, 죽순에 튀긴 두부, 머위를 넣고 조린 것, 미역줄기와 무말랭이 볶음, 삶은 보말을 까서 양념장을 한 것을 먹었다. 흑미와 검은콩은 큰 언니가 제주도 한림에서 샀다고 한림 꺼라면서 나에게 줬다. 한림에서 산 것이지, 한림에서 난 것이 아닌데도 한림에서 왔다니 고향에서 온 것이라, 괜히 반갑다. 죽순은 친한 이웃이 준 걸 삶았다. 굼벗과 다른 반찬은 둘째 언니가 바다에 가서 채취하고 야산에서 딴 산나물이다. 미역줄기에 넣은 무말랭이도 크게 하는 게 맛있다고 언니가 직접 말렸다고 한다. 보말도 어제 바다에 가서 잡아다가 바로 택배로 보낸 거라서 삶은 냄새도 신선했다. 낮에 배말을 데쳐서 초장에 찍어서 먹고 보말도 삶아서 먹다가 까서 반찬으로 했다. 냉장고에는 미우라 바닷가에서 따온 미역도 있다. 나에게는 이보다 더 사치스러운 저녁은 상상하기 힘들다. 영양면에서 밸런스가 어쩌고 할 수도 있지만 동경 내륙에 사는 내가 제주도에서 어릴 때 먹던 음식, 지금 제주도에서도 먹기가 힘든 갯가에서 나는 신선한 걸 먹을 수 있다니 돈 주고도 누리지 못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편리해졌다고 해도 방금 캐온 죽순을 받아서 삶은 것만큼 신선한 죽순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 계절에 가장 맛있는 걸 산과 바다, 들에서 직접 채취한 자연산 제철 먹거리로 채워진 밥상이었다. 거기에는 언니와 친한 이웃의 노고와 정성이 깃든, 그리움과 추억이 얽힌 눈물 어린 밥상이었다. 언니의 노고와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잘 먹어야 한다. 

 

사진은 2년 전에 찍을 겹벚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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