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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도 사람들/'파친코'와 재일 제주도 사람들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역사, 제주도 어민 일본 진출-1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 25도로 맑은 날씨였다. 오후에는 습도가 올라갔지만 집에서 지내기 쾌적한 날씨다. 오후에 친한 이웃과 다시 장미꽃을 보러 산책을 나갔다. 둘이 걸으면서 예쁘게 핀 꽃을 관찰하면서 이건 다른 꽃과 달리 크다거나 여러 겹이라는 등 품평을 한다. 가만히 보면 같은 종류의 꽃이라도 크기나 색상 등 다른 점이 많다. 오늘 산책은 앞집 아이들과 네 잎 클로버 찾기에서 시작해서 바로 앞에 핀 철쭉을 봤다. 앞에 핀 철쭉이 길 건너 3층에서 봤더니 장미꽃으로 보였다. 장미가 아니었지만 꽃이 크고 여러 겹으로 색상도 주홍색이라 본 적이 없는 철쭉이었다. 지금 주변에는 크고 작은 철쭉꽃이 아주 많이 폈다.

 

친한 이웃과 장미가 화려하게 핀 정원을 목표로 걸어갔다. 마침, 정원에 사람이 있어서 인사하고 꽃구경을 좀 하게 해달라고 했다. 정원에 들어가 보니 미술 공방도 하는 곳이었다. 정원에서 실컷 장미꽃 구경을 하고 사진도 찍어서 나왔다. 화려한 장미꽃 정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행운인 것 같았다. 가는 길에 일찍 핀 수국을 봤더니 며칠 사이에 꽃이 더 많이 폈다. 공원까지 걸어가서 벤치에 잠깐 앉았다가 강가 길을 따라서 돌아왔다. 친한 이웃과 둘이 산책할 때는 예쁜 꽃이나 못 보던 꽃이 있으면 남의 집 정원이라도 가까이 가서 볼 수가 있다. 거기에 사람이 있으면 꽃이 예쁘게 폈다면서 인사를 건넨다. 대부분 아주 좋아한다. 자신들이 정성 들여 가꾼 정원의 꽃을 예쁘다고, 사진을 찍겠다고 하면 좋은 모양이다. 사람이 없어도 꽃을 가까이 본다고 해도 밖에서 보는 것이라, 이상하지는 않다. 내일부터 다시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계속될 모양이다. 오늘은 빨래도 하고 청소를 했으니 다행이다. 

 

 

제주도 어민들이 일본에 진출하게 되는 이야기다. 1910년 한일 병합 이전에 제주도와 접촉이 빈번했던 일본 어민들과 교류가 많았다. 나중에는 제주도인이 일본 선박에 선원으로 고용되어 외국인 노동자로 일본인과 함께 일하게 된다.

 

 

2절 일본의 어업 침략과 제주도

1.    제주도 어민의 일본 진출-1-1

 

일본인 어민의 제주도 어업 침략이 빈번함에 따라, 제주도인도 일본인을 많이 접하며 익숙해져 갔다. 일본인 어민의 한반도 및 제주도에 어업 침략의 장기화에 따라 일본인보다 낮은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제주도인을 고용하게 되었다. “거기도 대정 7-8(1918-9)년경에는 일본말을 알고, 우리도 몇 년이나 가면서 조선인 상대하니까 -중략- 말이 통하거든”에서 일본인 어민과 빈번하게 접하는 지역 사람들이 일본어를 이해하고 일본인 어민이 현지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137). 그리고, 조선인이 “선장에게 써주겠냐고 찾아와서, 우리가 쓴 사람은 조선학교 선생 했던 사람이라 -중략- 착한 사람이었어”라고 했다(138). 그 조선인을 “3년이나 쓴 적도 있었지. 어느 나라 사람이나 나쁜 놈은 나쁘고, 좋은 사람은 변함없지”(139). 거기에 일본인에 익숙했던 조선인 중에는 일본인이 귀국할 때 일본에 데려가 달라고 해서 “우리들은 17,8(명치 44-5년) 때는 몇 명 데려온 적도 있었지”라는 기록이 있다(140).

 

일본인과 접촉인 빈번한 지역 사람들이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일본인에 고용되어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어른들뿐만 아니라, 어린이도 있었던 모양이다. “미야타에서는 조선에서 어린애를 데려온 사람이 있었어. 조선인 어린애를 훔쳐다 일 시키려고 자기애로 만들고”라는 기록에서 조선인 어린이가 일본으로 건너가는 다양한 형태를 시사하고 있다(141). 가난한 조선인 중에는 어린이를 수양아들로 보내는 것처럼 일본인 아이를 돌보거나 또는 어업 일을 돕다가 일본인 어민과 친분이 생겨 고용되어 일본으로 건너가는 형태도 있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성장해서 일본에서 일하게 되며 “조선인을 쓰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였지. 일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지”라는 증언이 있다(142).

 

이런 지역에서 일본인은 “태평양전쟁 당시까지 조선인을 고용했고” 조선인과 함께 중국 대련까지 어업 침략을 했다(143). 일본인의 조선 및 제주도 침략과 조선인의 유입으로 국지적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빈번한 접촉이 어느 새인가 생활의 일부처럼 정착된 지역도 있었다. 예를 들어 명치 43(1910)년 출생한 일본인 어민의 말에 따르면 “조선인과의 관계는 이전부터 상당히 있었지. 학생 때도, 청년이 된 조선인이 꽤 있어서 현지 청년과 같이 교제했지”라고 한다(144).

 

일본인 어민에게 제주도인이 고용되는 과정도 앞에 쓴 것과 같다. “조선은 대체로 목적지가 제주도지 -중략- 제주도에 도착해서 선원이 있으면 조업하고, 모자라면 현지 한국(제주도)인을 써서”(145). 제주도인을 고용해서 그해 조업 “마지막 항해에서 고기를 싣고 헤어질 때는 제주도에서 헤어져”제주도인이 배에서 내린다(146). 일본에서 제주도는 “저녁 6시경 일본을 향해 제주도를 출발해서 계속 달리면 해 뜰 무렵 고토 열도가 어렴풋이 보여 아침에”, 상당히 가까운 지역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147). 제주도인은 일본 어선의 선원이 되어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어업 침략하는 중국 대련이나 청도 등지까지 진출했다. 이와 같은 제주도 어민의 취로 형태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볼 수 있었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 선박 선원이 되는 일도 있었다.

 

일본인의 어업 침략은 단기간의 출어뿐만 아니라, 이주 어촌이나 상업목적과 같은 장기간 체재하는 방식으로 한반도 및 제주도에서 생활하는 일본인이 증가했다. 일본인의 증가는 일본인만 모여서 사는 일도 있었지만 생활의 구체적인 장면에서 현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인 어민 여성이 “첫 애는 큰집에서, 둘째는 조선 여관에서 낳았지. 세 번째는 중국 대련에서 낳았어”라는 증언에서 이동생활을 함으로 아이 출생지가 다르다는 걸 뜻한다(148).

 

아이의 출생이 있었는가 하면 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배에서 떨어져 죽었어 -중략- 거기서 조선인, 체격이 좋은 놈이 뛰어들어 찾았는데 -중략- 다음날 마누라 시체가 떠올랐어” 이것은 어린애를 등에 업은 채 일본인 어민 여성이 죽어간 모습이다(149). 해적을 만났을 때는 “조선인 어머니가 인정이 있어서, 조선인 어머니가 애를 업고 도망쳐서 그 애는 살아남았어.. 나도 그 애를 보고 왔지, (죽은 일본인 어민을) 조선인 마을에서 장례를 해줬어”라는 증언도 있다(150).

 

국가가 다르고 일본인 어민이 어떤 경위로 조선 및 제주도를 침략했던 아이를 낳거나 사고를 당했으면 그걸 돕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거기에는 일본인, 조선인, 제주도인이라는 국가나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 간의 교류가 있었다.

 

각주

137-9) 久場 전게서 184p

140) 久場 전게서 185p

141) 久場 전게서 131p

142-3) 久場 전게서 185p

144-7) 久場 전게서 187p

148) 久場 전게서 183p

149) 久場 전게서 198p

150) 久場 전게서 130-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