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최고기온이 19도 밖에 올라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잔뜩 흐려서 비가 오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결국, 밤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요새 아침에 일어날 때 오늘은 뭘 맛있게 먹을까 한다. 날씨도 꿀꿀한데 맛있는 걸 먹고 잘 지내고 싶다. 아침에 옥돔을 프라이팬에 굽고 거기에 친구가 히로시마에서 꺾은 삶은 고사리를 넣고 볶았다. 요전에 옥돔으로 국을 끓였는데 구워서 먹는 편이 훨씬 좋았다. 옥돔은 비늘이나 뼈도 맛있다. 오늘 먹은 옥돔은 커서 그런지 정말로 맛있어서 감동할 정도였다. 나는 음식을 먹고 감동하거나 그런 일은 없는데 감동했다. 보통 생선을 조리한 다음 나는 생선 냄새가 거슬린다. 생선을 먹고 난 다음 입안을 맴도는 냄새가 싫어서 빨리 입을 헹구고 양치를 하고 싶어 진다. 그런데 오늘 옥돔을 조리하고 난 다음 환기선을 틀어도 집안에 냄새가 좀 나는데 전혀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옥돔을 먹고 난 다음 입안을 맴도는 것도 좋은 여운으로 느껴졌다. 정말로 몇십 년 만에 감동할 정도로 맛있는 옥돔을 먹었다.
오후에 들어서 비가 그친 것 같아서 친한 이웃과 산책하기로 했다. 요즘 친한 이웃이 자신이 물건 이름도 잊고 반찬도 만들기 싫어서 사 오기도 한단다. 그래도 걷기도 많이 하고 가격이 싼 곳으로 쇼핑을 가기도 하지만 자신의 노화에 대해 걱정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코로나로 사람들과 만나지 않아서 수다를 떨 일도 없으니까,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내가 항상 가까운 곳에 살면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도 이사할 예정이다. 그래서 어제 친한 이웃의 불안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했다.
코로나 이전에 나이 든 사람들이 수다를 떨기 위해 짐에 간다는 걸 들었다. 그래서 뭔가 배우러 다니면 어떠냐고 했다. 배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수다를 떠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있는 동안에 나이가 들면 들어가고 싶은 양로원 같은 곳을 좀 다니면서 알아보자고 했다. 어떤 곳이 좋은지 생각해서 여러 곳을 다녀보면 양로원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다녀보고 가능한 집에서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면 나중에 사람을 써서라도 집에서 지내는 걸 생각하자고 했다. 양로원이라도 전혀 모르는 곳에 가지 말고 이 근처에서 살면 친한 이웃이 아는 사람들과 만나서 산책도 할 수 있다. 자연이 많은 곳을 좋아하는 친한 이웃이 답답한 곳에 가게 되면 정말 싫을 것 같다. 아들도 어머니를 좋은 곳으로 보내겠지만 본인이 마음에 드는 곳을 몇 군데 정해두거나 이런 곳이 좋다고 아들에게 구체적으로 전해 두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같이 다니면서 보겠다고 했더니, 친한 이웃은 지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더 걱정이 되고 말았다. 최근에 보면 말하는 걸 보면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것 같은데 의욕도 많이 떨어진 모양이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제주도 어민의 일본 진출에 관한 내용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장사를 하거나 조업을 위해 한반도 북부까지 이동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해녀의 경우도 해마다 다른 어장, 지역에 장기간 출가를 하는 일이 허다했다. 제주도 어민의 일본 진출은 그런 이동성이 풍부한 생활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2절 일본의 어업침략과 제주도
6. 제주도 어민의 일본진출-2
다시 제주도인이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는 곳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먼저 쓴 것처럼 제주도인이 일본에 진출하게 되는 것은 명치 36(1903)년 해녀부터 시작되었고, 남성은 명치 40(1910)년을 전후로 100명 정도의 어부가 일본 선박 선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151). 조선과 일본의 조약에 따른 제주도에 대한 통어 금지 해제는 명치 25(1892)년 이후이지만 실제는 명치 초기부터 불법으로 어업 침략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걸로 보면 제주도인은 명치 중반 또는 그 이전부터 일본인 어민에게 고용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앞에서 쓴 일본인 어민의 증언에서는 대정 7-8(1918-9)년경에는 저쪽 (한국 또는 제주도)에서도 일본어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먼저 소개한 高橋논문에 따르면 15-6세기 제주도인이 이미 倭人, 漢人과 밀접한 교류가 있고 倭人언어를 알았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명치 시대까지 이동생활을 영위하던 제주도인이 있었다.
그런 제주도인의 생활환경에서 보면 일본으로 출가를 위한 이동은 앞에 쓴 명치 36(1903)년 이전부터 있었을 걸로 본다. 그 증거로 이하의 내용을 소개할 수 있다. 우선, 15-6세기부터 이동생활을 영위하던 제주도인이 적지 않았다. 명치 43(1910)년에 발행된 『韓国水産誌』에 따르면 “김녕리 -중략- 참빚을 만들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 제품을 각지에 우송할 뿐만 아니라 업자가 배를 꾸려서 원료를 싣고 평양 의주까지 가서 제조판매를 몇 년에 걸쳐 한 다음 돌아와” 더욱이 “미역과 우미를 실어 본토 각지로 우송하는 자도 많으며, 그처럼 자기 마을에 있는 자는 대개 농업과 상업을 하며, 그 외에는 거의 출가를 하고” 있었다(152). 이것은 김녕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마을에 따라서는 외지로 나가거나 또는 상업 등으로 본토(한반도)의 북부까지 이동하는 생활양식이 이미 정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녀가 외부로 출가하는 기간을 보면 대정 4(1915)년에 외지에 나가서 지내는 일수는 6개월 반에 이르고 있다(153).
결국, 해인 문화의 이동성이 풍부한 생활양식이 단단하게 뿌리내려 있었고 이동 범위 또한 상당히 광범위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요지를 종합하면 제주도인의 일본으로 이동은 명치 후반보다 일찍부터 시작된 걸로 본다. 그래서 升田논문에서 제주도 해녀의 한반도 진출이 명치 28(1895)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154). 高橋논문에 따르면 15-6세기(또는 그 이전)부터 제주도인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연안까지 이동하는 생활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쓴 제주도인의 생활양식에는 일본에 이동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다. 거기에 제주도인의 풍부한 이동성을 지닌 생활양식과 그 수단을 고려하면 나중에 일본으로 밀항도 제주도인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제주도인의 직공 모집은 대정 3(1914)년부터 오사카를 시작으로 하는 阪神工業地帯, 北九州라는 西日本에서였다. 그 배경에는 공업지대에서 노동력을 대량으로 필요로 했던 것과 먼저 쓴 西日本 어민의 제주도에서 제주도인을 고용한 경험이 있는 걸로 추측된다. 그리고 京阪神지역의 노동력 수요와 제주도인을 고용했던 회사에서 제주도인에 대한 평판이 제주도인의 일본 진출과 이동을 촉진시켰다고 본다. 그런 요인이 더해져서 대정 11(1922)년 제주-오사카 정기항로 개설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보다 이전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관부연락선이라는 정기항로가 있었지만, 그것은 주로 일본인이 한반도로 진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에 비해 제주-오사카 정기항로는 오로지 제주도인을 일본으로 나르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제주-오사카 정기항로 개설 이전에 제주도인이 이본으로 이동은 관부연락선 또는 일본 어선 등이 이용되었다고 본다. 제주-오사카 정기항로 개설로 인해 제주도인이 일본으로 이동이 용이하게 되어 소화 9(1934)년에는 제주도 인구의 25%가 일본으로 건너갔다(155).
제주도인이 일본으로 진출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외지에 나가 상업에 종사하고 계절에 따라 출가하던 이동성이 풍부한 생활양식을 지닌 개방된 지역이었다. 거기에 일본의 어업 침략으로 인해 어장과 판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일본인과 접촉이 빈번했다. 일본의 근대화한 도시가 제주도인 젊은 세대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일본에는 노동력 수요가 있었고 제주도의 특징인 집성촌, 동족 부락이 많아서 지연 결합으로 상호 부조하면서 이동과 현지 적응을 도왔다. 제주도인은 서당에 다녀서 한문을 알기에 일본에서 적응이 용이했다. 무엇보다도 제주-오사카 정기항로가 있어서 일본으로 이동이 용이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각주
151) 久場 전게서 108p
152) 朝鮮総督府商工部水産局編纂 전게서 441p
153) 江口保考「済州島出稼海女」朝鮮総督府 『朝鮮學報』 大正4(1915)年5月68p
154) 升田 전게서 79p
155)升田 전게서 1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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