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최고기온이 26도였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로 이상한 날로 날씨마저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침에는 날씨도 맑고 나쁘지 않았다. 일기예보로는 비가 온 다음에 흐린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친한 이웃에게 전화했더니 지금 우체국에 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갑자기 비가 온다고 한다. 내가 있는 곳은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 거리가 그다지 떨어진 곳도 아닌데 이상하다고 했더니 금방 강한 바람과 함께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북풍이 불어서 서둘러 북쪽 창문을 다 닫아야 했다. 더 이상한 것은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데 날씨는 맑은 채로 햇볕이 나고 밝다는 것이다. 이런 폭우라면 친한 이웃은 우산을 들고 갔어도 다 젖겠다 싶었다. 전화도 들리지 않아서 나중에 통화하기로 하고 끊었다.
어제 언니가 택배를 보내서 오늘은 평소보다 1시간이나 일찍 배달이 왔다. 언니에게서 택배를 받는 날은 나에게 잔칫날이 된다. 오늘도 먹을게 많아서 점심을 일찌감치 잔치상처럼 차려서 먹었다. 점심에 먹은 것은 참돔 구이에 오징어회, 상추 무침, 고사리 볶음, 비트피클이었다. 냉장고에는 아직 꺼내지도 않은 반찬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이 완전 부자가 된 느낌이다. 어제 오이소박이를 담글 예정으로 오이를 많이 샀는데 천천히 해도 될 것 같다.
오늘 오전에는 어제 시에서 온 3월분 고액 의료비 환급 신청서가 왔는데 마감이 매달 5일과 20일이라고 한다. 수입에 따라 매달 일정 금액 이상 의료비를 지불한 것에 대해 환급을 신청하라는 통지서로 환급받을 수 있는 것이 다 정해져서 온다. 5일은 일요일이라서 오늘 중으로 하지 않으면 20일 마감이 된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서 갔다. 작년 12월분은 받았는데 1월과 2월은 없었다. 왜 3월이지? 하는 것도 있었다. 나는 3시쯤에 5분도 걸리지 않는 주민센터에 가서 일을 보고 널널하게 우체국에도 들렀다가 4시에 친한 이웃과 만나서 산책할 예정이었다. 주민센터에 갔더니 기다리는 사람이 1명도 없어서 바로 접수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런 신청서 하나 제출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내가 1월과 2월이 없고 3월분이라고 하는데, 내용을 맞춰보니 2월분인 것 같다. 약국 영수증은 3월 분과 금액이 일치한다. 그랬더니 자기는 모르니까, 본청 담당 직원에게 전화 연결해서 확인하라고 한다. 그래서 본청 직원과 전화해서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확인했더니 3월분이 맞다고 한다. 그래서 신청서를 제출하려면 영수증을 복사해서 첨부해야 하기에 복사할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옆에 시민센터에 가서 문의하라고 한다. 같은 건물에 있는 시민센터에 가서 영수증 복사를 부탁해서 복사했다. 신청서를 낼 때 복사한 영수증을 보였더니 다음부터는 영수증을 주면 자기네가 복사한다고 한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해야지, 시민센터에 가서 문의하라고 해서 시민센터에 가서 직원에게 부탁해서 복사하고 요금도 냈다. 여기서는 그냥 참고 알았다고 하는 것이 일이 간단하게 끝난다. 참고로 5일 마감에 맞게 오늘 내면 되냐고 했더니 다른 서류를 보고 확인한다. 오늘 내면 5일 마감에 맞는다고 한다. 환급이 되는 것은 빨라도 월말이나 다음 달이 된다고 한다. 신청서를 내고 최소 한 달이 걸린다. 이미 다 계산이 되고 입력이 된 상태인데도 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바깥을 봤더니 다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었다. 분명히 내가 나갈 때는 맑아서 비가 올 낌새도 없어 우산을 들고 가지 않았다. 내가 걱정인 것은 비가 개었다고 환기하느라 북쪽 창문을 열어놓고 나가서 아까처럼 비바람이 불었다면 물난리가 났을 거다. 휴대폰이 든 작은 포치만 비닐 주머니로 싸고 비가 좀 와도 젖으면서 그냥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봤더니 다행히 북풍이 불지 않았는지 방이 젖지 않았다. 거기에 비가 거진 그쳤다. 날씨는 맑은 채로 폭우가 쏟아지는 걸 하루에 두 번이나 경험했다. 그랬더니 남쪽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그것도 쌍무지개였다. 친한 이웃에게 전화해서 오늘 비를 맞았다고 했더니 친한 이웃은 속옷까지 몽땅 젖을 정도로 비를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가 온 직후라 길이 젖어서 산책을 나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시간이 늦었다고 해서 봤더니 5시였다.
나는 시간을 보고 순간 믿기지 않아서 멍하고 말았다. 아니, 내가 주민센터에서 그걸 하느라고 2시간이나 있었다는 건가? 본청 담당 직원과 통화를 1시간 반 이상 했다는 말인가? 매우 단순한 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길게 통화할 필요가 전혀 없다. 10분 이내에 끝나는 일이다. 나는 어제 이미 정리해서 월별로 영수증을 스태플로 집어서 갔다. 직원과 통화하면서도 영수증을 손에 들고 확인했다. 아니, 시간이 어떻게 날아간 거지?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역시, 일본, 동경은 만만하지가 않다. 그래도 오늘 할 일을 하나라도 할 수 있었으니 다행으로 생각하자. 매사가 이런 식이라, 일 하나 보려면 전날부터 다 준비해 가서 기다리는 사람이 1명도 없어도 단지 서류를 제출하는데 2시간이나 걸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사실 있는 그대로다. 도대체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 시스템은 시간을 잡아먹는데 도사인 것이 특징인 모양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봤더니 시간을 잡아먹은 것은 직원이 용건을 접수할 때도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하더니, 신청서를 접수할 때는 다른 직원이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런데 직원이 그렇게 확인할 필요가 없는 서류다. 통지서에 이미 다 인쇄가 된 걸 그에 맞는 영수증을 복사해서 첨부하면 신청서 제출이 끝나는 일이다. 영수증을 복사한 것도 단 2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하나하나 세세하게 확인한다. 이건 뭐 거의 '광기' 수준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이렇다.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다 보면 시간만 잡아먹고 진이 다 빠지고 만다.
오늘 소개하는 내용은 어제에 이어 90년대 중반 이후 10년에 걸친 B섬 어업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이다. 거기에 B섬사람들이 인근 마을로 이주해서 섬에 사는 사람이 확 줄었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섬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보내는 지연 결합과 상호부조에 관한 것이다. 제주도 마을 사람들의 지연 결합을 지탱하는 공동체 의식의 핵심이 물심양면의 상호부조이다. 그들은 같은 마을 사람들과 운명공동체처럼 상호부조를 하면서 살아왔다.
큰 파도의 시작과 끝남- B섬사람들을 중심으로
4. B섬의 변화 -2
B섬의 주 산업인 어업의 변화를 한국 전체와 제주도의 변화에서 보기로 하자. B섬은 1970년대까지 반농반어로 ‘식량 자급을 위해 농업을 하고 어업에서 현금수입을 얻고 있었는데 1980년대에 들면서 농업을 하지 않고 어업이 중심이 된다”19). 그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B섬의 어업은 수입면에서 순조롭게 늘어났다. 그것은 어획량 증가로 인한 것이 아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한 것이다. 한국의 수산물 공급은 1980년대 후반부터 늘면서 국내 수요가 한층 증가해 해외에서 수입한 것으로 국내 소비를 충당하게 된다. 근래 한국의 수산물 수입량도 증가 일보에 있을 뿐이다. 그런 걸 배경으로 국내산 수산물, 특히 1990년대 이후 제주도에서 잡는 생선은 일종의 브랜드가 되었다. 수입물보다 국내산, 그 중에서도 해양오염이 적은 지역으로 청정해역 제주도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제주도산 생선은 고급화되어 간다. 그런 경향은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생활이 풍요로워지는 것과 동시에 수산물 소비가 증대해서 어업종사자에게는 좋은 환경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한편, 한국의 산업화의 진전과 인구 증가, 생활환경의 변화도 급격히 진행되었다. 즉, 산업화의 진전으로 폐기물이나 공해가 늘고, 가전제품과 자동차의 보급으로 편리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도로건설, 교통량의 증대로 인한 배기가스가 증가했다. 거기에 임업과 농업의 쇠퇴와 해안개발 등은 어업에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해 어장 오염에 직결되어 어장은 축소되어 간다. 그리고 지구규모 문제로 지구온난화, 근래 수온상승과 이상기후는 어업환경을 보다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어업부문에서 개발이 진행된 것은 양식업이다. 제주도에서도 연안에 검은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그 안에서 생선을 양식하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다.
어업은 지금도 B섬의 주산업인 것은 변함이 없다. 다른 지역보다 소규모 가족경영으로 B섬의 어업경영을 합리화해서 다른 지역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소규모 가족경영인 섬에서는 그 경영이 성립하는 분업체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조업을 나가면 마을에 사는 노인이 미끼를 끼우거나 작업 준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나 B섬사람들이 인근 마을에 살게 되면서 이런 사정도 조금 변했다. 부부가 조업을 하는 것은 B섬에서는 당연했지만 다른 마을에 살면서 남편만 조업을 나간다. 배는 기계화로 혼자서 조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작업준비나 미끼를 끼우는 일감을 섬으로 가져가 일을 맡겼다가 다시 배에 싣는다. 이런 부분은 일손이 필요하기에 유지되고 있다. 섬에서 살 때처럼 선주 집에 노인들이 모여서 일을 하면서 수다를 떨고 선주 부인은 시간이 되면 식사나 간식을 내놓고 같이 먹는 교류는 없어졌다.
어부에게는 조업을 할 수 있는 날이 이전보다 줄었다고 한다. 이전처럼 날씨가 나빠서 조업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수산 자원량이 부족해진 탓이다. 그러나, B섬에서 잡은 생선 가격은 먼저 쓴 것처럼 한국 내 조건에 따라 가격이 올랐다. 이런 요인이 현재 B섬의 어업을 지탱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업을 할 수 없는 날이 많아지면서 경비가 들고 수입은 이전보다 줄었다. 그리고 B섬사람들이 인근 마을로 옮긴 거주환경의 변화에 어업 상황과 섬 상주인구의 감소로 섬에 사는 사람과 섬 밖으로 나간 사람 양쪽 모두 활기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꼭 경제적으로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B섬의 어업으로 얻는 수입은 제주도에서 가장 안정된 직업으로 치는 공무원 수입보다 많은 편이다.
B섬은 노인을 남기고 다른 세대가 인근 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섬이 텅 비고 말았다. 여성을 중심으로 섬사람들의 교류의 대부분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일상적인 교제가 없어지고 관혼상제와 같은 비일상적인 장면에서 교류하는 식으로 변화했다. 다른 마을에 살아도 B섬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B섬사람들 사이에 그 정보가 교환된다. 예를 들어 2006년 11월 초순 B섬사람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했다. 거기에는 금방 B섬사람들이 모여서 장례를 의논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B섬사람들은 현재 B섬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마을로 이주한 사람도 모인다.
그리고 B섬사람 딸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하는 본인은 B섬에서 떨어져서 성장했다. 부모도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 결혼식에는 B섬 여성들이 모여서 며칠간에 걸쳐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결혼식에는 제주도에 사는 B섬사람만이 아닌 부산에 이주해서 20년이 넘는 B섬사람도 참석했다. 결혼식에 손길을 보태던 여성들은 일이 끝나자 단체로 목욕탕에 가서 같이 목욕을 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거기에서는 B섬에서 떨어져서 살고 있으니까 더욱더 적극적으로 근황을 묻고 관심을 보인다. 제주도에서 결혼식은 결혼식장에서 하지만 결혼식과 별도로 집에서도 잔치를 한다. 이전에는 3일 전에 잔치를 위해 돼지를 잡고 이틀 전에는 가문잔치라고 해서 이날이 손님이 많이 오는 날이다. 이전에는 결혼식도 집에서 했지만 지금은 결혼식장에서 한다. 돼지를 잡던 것도 이제는 사는 걸로 대체하지만 가문잔치를 하지 않으면 섭섭하다고 가문잔치를 한다. 돼지를 잡을 때는 동네 남자들이 모여서 하고 잔치를 하는 동안 음식을 준비하고 접대하는 것은 여성들이 하는 역할이었다. 온 동네 잔치가 되는 것이다 20). 아직도 B섬사람들에게 관혼상제는 B섬에 살고 있을 때와 변함없이 B섬사람들 사이에서 일이 진행되고 운영된다.
예를 들어 나에게는 제주도에 사는 오빠가 있고 아들이 둘이다. 조카 둘은 B섬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부터 다른 마을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조카 둘은 자신들이 B섬사람이라는 인식이 있고 그들이 결혼한다면 제주도에서 할 가능성이 크고, B섬사람들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런 한편, 남동생은 서울에 사는데 여기도 조카가 둘이다. 첫번째는 B섬에서 태어났고 두 번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둘 다 성장은 서울이다. 하지만 조카 둘은 자신들 부모가 제주도 사람이라, 자신들도 제주도 B섬사람이라는 인식인 모양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결혼한다면 서울이나 그 근처에 있는 B섬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나 B섬에서는 가족 이외는 참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는 오빠와 남동생이 거주지가 다른 것과 B섬사람들과 교제하는 정도의 차가 있다. 오빠는 제주도 B섬 중심으로 살았고 B섬사람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 사람들과도 폭넓게 교제한다. 남동생은 그런 과정이 없이 서울로 이주했기 때문에 본인이 B섬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어도 그건 개인적인 인식일 뿐 B섬사람들 중심으로 교제하고 관혼상제에서 상호 부조하는 지연 결합 네트워크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그의 자녀도 B섬 지연결합 네트워크에는 들어있지 않다. 제주도의 지연결합은 같은 지역 출신이면 무조건 그 네트워크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출신 마을을 매개체로 한 상호부조가 목적인 그룹으로 유연한 경계를 가진 일종의 멤버십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B섬사람의 지연결합과 핵심 요소인 상호부조는 거주지 이동으로 그 기능과 구성원이 구별된다는 걸 알 수 있다. B섬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은 섬을 떠났지만 여전히 B섬을 중심으로 살아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각주
19)高 鮮 徽 前掲書h 26 ページ
20) 제주도 결혼식 가문잔치 https://ncms.nculture.org/ceremonial/story/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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