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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셔니스타?

작은 친절

2013/12/19 작은 친절

 

오늘도 동경은 비가 오는 아주 추운 날이었다. 어젯밤에 침대에 들어가서 소설을 읽기 시작해서 2시가 넘게까지 읽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자명종이 울리는 걸 끄고 다시 잤다. 8시가 되어 일어났다. 보통 때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났다. 고구마를 찌기 시작하면서 요가를 조금 했다. 고구마는 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물을 끓여서 카페오레를 만들어서 마셨다. 따뜻한 게 뱃속에 들어가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아침은 거르고 그냥 씻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고구마도 쪄진 걸 비닐봉지에 넣어서 오렌지 하나와 같이 도시락으로 가방에 넣는다. 아침을 못 먹었으니 점심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야지. 집 근처는 잔뜩 흐려 있어도 비가 오지는 않았다. 일기예보도 잘 안 봐서 비가 올 줄 모르고 그냥 나갔다

연내에 끝나는 강의가 있어서 학생들 기분을 업시키려고 빨간색 옷을 입었다. 위 아래로 다, 새빨갛게… 역에서 내려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데 비가 내린다. 겨울비가 춥다. 학생들이 있어도 우산을 같이 쓰자는 말이 없다. 내가 우산을 씌워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냥 비를 맞았다

옛날 학부 1학년 때, 대만에서 온 친구와 같이 학교에서 갑자기 비가 왔을 때, 아무도 우산을 같이 쓰자는 말을 안 해서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모른다. 주위 아이들은 아주 인사도 친절히 하는 데… 우리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 데… 산성비라고 남자가 맞으면 대머리가 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친구나 나도 한국이나 대만에서 같은 상황이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할 텐데, 일본에서는 아는 사람도 아무 말도 안 했다. 인정머리가 없는 줄 모르고 우리가 인간이하 취급을 받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들인 것을… 아침에 비를 맞으면서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씁쓸하게 웃었다. 겨울비가 추웠다. 지금은 기대를 안 하니까, 마음이 복잡해지진 않는다. 그냥 비를 맞을 뿐이다.

전철을 탔더니 건너편에 앉은 서양 남자가 나를 쳐다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럼, 나같은 인종 별로 없걸랑… 어쩔 수가 없지, 오늘 같은 차림은… 빨간색 옷에 파란색 표지를 씌운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거의 책 속에 들어갈 것 같은 기세로 집중해서 읽고 있었으니 얼마나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을까… 가끔은 그렇게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사회봉사도 해야 한다

수업에서 학생들은 내 옷차림을 보고 신이 났다. 방방뜨는 학생들도 있다. 학생들에게 크리스마스도 가까워서 빨간색을 입었다고 가슴에 쓰인 LOVE는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해뒀다. 중요한 거야… 학생들은 좋아서 죽겠나 보다. 남학생들도 수업이 끝났을 때 괜히 내 주위를 맴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싶은 건가

수업이 끝나서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데, 빗방울이 아침보다 굵어졌다. 앞에 있는 남학생 아이가 내가 우산에 들어갈 틈을 만들어준다. 그래도 내가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할 수는 없는 일. 그냥 비를 맞고 있었다. 그 학생이 자꾸 꼼지락 거린다. 아무래도 내가 비 맞고 있는 게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다. 나는 학생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학생이 긴장할 것이라… 한참 있다가 학생이 아주 용기를 내서 나에게 말을 건다. 선생님 비가 오니까, 우산 같이 써요.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고맙다고 우산을 같이 썼다. 그러면서 몇 학년이냐고 물어봤다. 1학년이란다. 그러냐고, 나는 변명처럼 오늘 종강인 수업이 있어서 옷을 이렇게 입었다고 중얼거렸다. 나에게 말을 걸려니까, 용기가 필요했지? 그렇단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래, 너의 용기가 나를 조금 행복하게 해 줬어, 말은 못 한다. 그리고 버스가 와서 내가 먼저 타면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근데 학생이 너무 수줍어서 긴장한 탓인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질 못한다. 나도 덩달아 수줍어서 인사를 하면서 눈도 맞추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는 춥고 피곤해서 잠을 잤지만, 행복한 기분이었다. 작은 친절… 내 마음을 조금 따뜻하게 해 줬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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