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30 눈이 온다
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눈이 오고 있다. 어젯밤부터 내렸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좀 쌓여있다. 바람이 전혀 없어서 눈이 직선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함박눈이 소복 소복 내리고 있다.
어제 일기예보를 봤더니 최고기온이 2도라서 걱정했다. 동경의 겨울 날씨는 최고기온이 10도 정도로 그다지 춥지 않다. 그러나, 집안은 난방이 부실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춥게 느끼고 춥게 산다. 이틀 전에는 최고기온이 15-16도나 되는 봄날 같은 날씨여서 땀이 날 정도였다. 요새, 우울한 일이 많아서 집안에 틀어 박혀서 지낸다. 채점을 해야 하는 데, 도무지 채점할 기분이 안난다. 이번 주까지 게으름을 피우고 다음 주가 되면 채점해서 성적을 낼 생각으로 지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을 열었더니, 눈이 와서 세상이 하얗다. 바람이 없어서 포근한 느낌이 전해진다. 우울한 마음에도 눈이 와서 하얗게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 눈이 와서 우울함도 하얗게 덮혀서 리셋트하는 거야. 눈이 녹아서 질척거리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 아침에 일어나서 베란다에 나가서 사진을 찍었다. 뒷쪽 베란다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가끔 자연이 주는 날씨의 변화에 감사한다. 동경에서 눈이 오는 것은 아주 드물다. 나에게는 선물로 느껴지는 눈이다.
하늘도 하얗고 나뭇가지에도 눈이 소복히 쌓여간다. 눈이 내릴 때만 보여주는 나뭇가지의 자태가 있다. 이럴 때만 드러내는 은밀한 자태가 아름답다. 가녀린 가지에는 눈이 쌓여서 꽃이 핀 것 같다. 꽃이 너무 흐드러지게 피어서 가지가 무겁게 아랫쪽으로 쳐져있다. 나뭇잎이 무성할 때도 이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텐데… 더 무거워지면 가지가 더 밑으로 쳐지면서 쌓인 눈을 떨구어 내겠지.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를 풀셋트로 하고 쌀을 씻어서 불리고 있다. 요새는 밥을 해먹는다. 쌀을 씻어서 불리는 것도 새롭게 배운 것이다. 지금까지 쌀을 씻어서 불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쌀포대에 쓰여진 대로 쌀을 씻어 두 시간 불려서 밥을 했더니 밥이 더 맛있어졌다. 밥을 해서 먹는 것은 순전히 12월에 한국에 갔을 때 받아온 반찬들 덕분이다. 특히, 프라우고님께 받은 김치의 공로가 크다. 김치가 다 떨어져 가지만, 김치와 밥이 이렇게 맛있는 조합이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낀다. 밑반찬이 좀 있으면, 새로운 반찬이 없어도 대충 먹을 만하다. 무엇보다도 밥을 먹으면 든든하다. 전에는 소화가 잘 안되서 밥이 싫었는 데, 먹는 것도 변하는 모양이다. 오늘도 밥을 하고 김을 구어서 양념장에 찍어 먹을 생각이다.
새삼스럽게 밥을 해서 먹는 걸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밥냄새도 좋아졌다. 밥과의 관계개선에도 때가 있는 모양이다. 쌀에 잡곡을 약간 섞어서 밥을 한다. 어릴 때 할머니와 살면서 잡곡밥을 먹어서 그런지 잡곡이 들어간 것이 맛있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참 허황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어쩌면 산다는 자체가 허황된 것인지도 모른다. 허황된 세상에서 뭔가 확실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허황된 세상이라고 해도 먹는 것은 제대로 된 걸 먹어야 하지 않을까? 허황된 먹거리를 먹으면 항상 허기질 것 같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허덕거리면서 먹는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허기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참 빈곤하다. 아무리 먹어도, 돈을 벌어도 허기진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제대로 된 먹을 것이 중요하다. 한가지라도 먹을 것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내가 먹기에 이른 것인지, 만드는 사람들의 노고를 상상할 수 있는 먹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 할머니가 밥을 흘리면 주의를 했다. 밥을 먹게 되기까지 농부 손이 몇 번 가서 얼마나 힘들게 쌀을 만드는지. 먹는 것이 그냥 먹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노고가 들어간 것이라는 것이다. 물을 낭비하면, 죽어서 저 세상에 가면 이 세상에서 썼던 물을 다 마셔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은 그런 걸 잊고 살지만, 거기에는 자연과 먹거리와 사람들의 관계를 일깨워주는 지혜가 있었다.
우리의 생을 구성하고 있는 주변의 소소함과 소중함을 소홀히 하면서 어딘가로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눈으로 하얗게 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뒤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눈으로 하얗게, 마음도 리세트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