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경생활

할아버지의 야채와 매화나무

2016/01/26 할아버지의 야채와 매화나무

 

오늘 동경은 날씨가 맑고 조금은 포근해졌다. 지난 주말이 추위가 피크였다면 좀 누그러진 것이다. 오늘 최고기온이 9도로 높지만, 최저기온이 영하 5도라서 춥다는 것이다

어제는 월요일, 새 책이 진열 배치되는 날이라, 도서관에 갔다. 아직 날씨가 추워서 밖에 나가기 싫었지만, 가끔 밖에 나다니지 않으면 게을러진다. 농가에서 파는 야채도 사고 싶어서 나갔다. 아침에 나가면서 우체국에 들러서 우표를 샀다. 주로 한국에 엽서를 보낼 때 우표를 쓴다. 70엔을 붙이는 데, 70엔짜리 우표 종류가 하나다. 그냥 요금에 맞게 붙이면 재미없는 건조한 우표가 된다. 그래도 예쁜 걸로 산다. 어제는 국내용 52엔짜리에 18엔짜리 우표가 있었다. 원래 18엔짜리 우표는 없는 데, 국내용 52엔짜리와 같이 쓰게 특별히 나온 판매기간 한정이다. 참고로 52엔짜리 우표는 국내용이라, 귀여운 것들이 있다. 어제 산 18엔짜리 우표 그림은 라면과 스키야키였다. 거기에 어울릴 우표를 사서 엽서에 붙였다. 엽서를 고르고 우표를 고르는 것이 소소하게 재미있다

우체국에 가기 직전에 매화꽃이 핀 공원이 있다. 매화나무가 몇 그루 있는 데, 올해 매화는 일찌감치 1월 초에 몽글몽글 올라와 있었다. 요새 찍은 신선한 사진이 없어서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주변에는 지난 주 내린 눈이 아직도 남아있다. 매화를 찍으러 갔더니, 지난 주 내린 눈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생으로 찢겨져 아파 보였다. 차마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부러진 가지에도 매화꽃이 피어 있었지만, 약간 생기가 부족해 보였다. 매화나무가 크진 않지만, 가만히 보니 고목들이었다. 고목들이 눈 때문에 부러졌다. 매화는 추워서 그런지 그다지 많이 피지 않았다. 지금 내 방에도 매화가 두 가지 꽂혀 있다. 동백과 같이 꽃병에 꽂았는 데, 매화꽃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우체국에서 한국에 소포를 보내는 요금표를 받고 우표를 사면서 직원과 수다를 떨었다. 우체국에는 다른 손님이 없어서 직원과 수다도 떨 수 있었다. 요새 일본에서도 우표가 잘 안 팔려서 그런지 우표 디자인이 아주 귀여워졌다. 노력하는 흔적이 보인다고 할까… 

그리고, 야채를 사려고 농가 마당에 들렀다. 가는 길에 야채를 사서 뒤에 감췄다가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다. 마침, 할아버지가 차를 타고 돌아오신다. 지난 번에 야채를 사면서 잔돈이 부족해서 180엔짜리에 200엔을 넣었다. 어제는 280엔어치 사서 260엔을 넣었다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알았다고, 웃으신다. 나는 오해받기 싫어서 사람이 있으면 말을 하는 게 속이 편하다. 돌아오는 길에 봤더니, 할아버지가 아침에 산 쑥갓과 양배추 위에 수건을 두 장이나 겹쳐서 덮어 놓으셨다. 나는 그 수건을 곱게 접어서 젖지 않게 놓았다. 작은 배려가 느껴져 기분이 좋아진다. 실은, 할아버지 야채를 사 먹으면 마트에서 산 야채가 맛이 없어서 먹기가 싫다. 할아버지 야채에서 벌레가 나오는 일이 허다하고 흙이 묻어 있어 씻기도 귀찮지만, 마트에서 사는 모양은 멀쩡하지만 야채 본래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할아버지 야채는 신선하고 야성적인 맛이 난다. 야채나 파도 향기가 강하고 사람의 손길에 땅과 계절의 기운이 느껴진다. 야채를 사면 선물을 받는 느낌이 든다. 감사하다

도서관에 갔더니, 읽을 만한 책이 꽤 있었다. 역시, 가길 잘했다. 아직 시험기간이라, 책을 빌릴 수도 없지만, 집중해서 책을 몇 권 읽었다. 책을 집중해서 읽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이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장소는 4층으로 한쪽 벽면이 30미터가 넘는 데, 통유리창으로 시야가 아주 넓다. 마지막에는 허둥지둥 엽서를 두 장 쓰고 가져간 일을 성급히 마치고 귀갓길에 오른다. 정문을 나왔더니 엽서를 넣는 우체통 앞에 우체국 차가 서있다. 서둘러 길을 건너서 시동을 건 우체국 차를 붙잡고 엽서를 넘겨준다

아무래도 집중해서 책을 읽고 나면 운동을 하고 난 뒤처럼 기분이 개운하고 상쾌해진다.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신선한 당근을 한 봉지 사고 농가 마당에 들러서 아침에 산 야채를 들고 왔다. 집에 와서 쑥갓과 유채나물, 양배추를 데쳐서 찬 물에 식혀서 들기름에 간장, 깨를 넣고 무쳤다. 나물에서 향기가 나서 아주 맛있다. 국수를 삶아서 나물과 같이 먹었다

하루에 조금 충실한 시간과 계절을 느끼는 소박한 식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행복하다. 세상이 아무리 살벌하고 인간들이 추악해도 계절은 가고 있다. 오랜만에 밖에서 계절과 교감하면서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

'동경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타마의 겨울  (0) 2020.01.31
매화  (0) 2020.01.31
눈이 온다  (0) 2020.01.31
대설의 밤과 아침  (0) 2020.01.25
대설경보  (0) 2020.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