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경은 최고기온 25도까지 올라간 맑은 날이었다. 낮에는 햇볕이 좀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오후 늦은 시간에 친한 이웃과 산책을 나갔는데 햇볕이 따갑다고 그늘을 찾아서 강가를 걸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어제보다 햇볕이 따갑기는 따가웠다. 오늘도 일을 조금 하고 하루 세끼를 챙겨 먹고 산책을 주된 일과로 보냈다.
오늘 소개하는 내용은 어제에 이어 도일 제주도인 '제3세대'이다. 그들은 밀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제주도에서 성장해서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밀항하거나 제주도에서 성인이 되어 일본으로 밀항했다. 한국전쟁을 피해서 밀항을 한 사람들도 있다. 도일 제주도인 중에 남에게 이해받지 못할 어려움을 많이 겪어야 했던 고독한 세대이기도 하다.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애착이 가고 매력적인 사람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어려움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제3절 도일 제주도인의 세대 구분
1. 제3세대(1951-1985년)
‘제3세대’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에 도일했던 ‘제2세대’처럼 밀항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제2세대’와 ‘제3세대’를 구분한다면 ‘제2세대’가 이전에 생활했던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에 비해 ‘제3세대’는 일본을 목적지로 건너갔던 밀항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세대에 관해서는 잠재 거주자(밀항자)를(밀항자) 다루는 장에서 상세히 쓰고 있다.
이 시기에 도일했던 제주도인은 앞에서 쓴 밀항자만이 아니라, 재일 제주도인의 신부가 되어 도일했던 여성도 적지 않다. 거기에 일본에 사는 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와서 정해진 체재 기일을 초과해서 눌러앉은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합법적으로 도일했던 사람들이 그 이전 세대와 다른 특징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제3세대’로 분류하는 사람들은 주로 밀항자를 가리킨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이후 한국과 국교가 성립되는 1965년 한일조약까지, 아니 그 이후도 재일 제주도인의 한국 및 제주도 왕래는 합법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한국이나 제주도에서 일본을 합법적으로 왕래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다. 그렇지만 이전부터 제주도와 일본은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제주도인의 이동은 일본과 한국의 국교관계나 일본의 입국관리법에 따라 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이 일본을 향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나 한국의 상황과 도일하고 싶은 사람들의 자주적인 의지에 따라 다양한 목적으로 동기부여가 되어 밀항이라는 수단을 선택했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은 한국과 일본 국가 간의 관계와 일본 입국관리법이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3세대’가 도일하는 시기는 일본으로부터 독립 후, 제주도는 4.3 항쟁, 한반도에서는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 전쟁 직후는 일본의 전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국내는 오키나와를 제외하고 전쟁터가 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 한반도 전역이 전쟁터가 되어 초토화되었다. 거기에 태평양전쟁은 일본과 외부의 전쟁으로 일본이 외국을 침략한 것에 비해 한국전쟁은 같은 민족끼리 동족상잔의 비극이었기에 물질적인 피해에 그치지 않은 정신적인 상처를 너무도 깊게 입었다. 한반도의 상황은 일본 식민지로 태평양전쟁에도 강제 동원당해 착취를 당할 대로 당해서 피폐해진 상태에서 일본의 패전에 의해 독립했지만 한반도가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을 자원도 부족한 상태에 한국전쟁으로 돌입했다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한국의 전후는 미국의 원조에 의지하여 연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전후 일본에게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은 경제적 도약의 기회였다.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경제적 기반을 닦아 고도성장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 한편, 일본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노동력 수요는 제주도인을 일본으로 불러들이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밀항자 중에서 제주도인이 차지하는 비율을 살펴보자. 소화 45-49(1970-74)년 불법입국자 일제검거에서 제주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82.2%이고, 남녀의 차가 적다고 한다(160). 제주도인에게 밀항 또한 당시는 보편적인 이동수단이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밀항자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밀항에 성공해서 일본에 체재하고 있다고 해도 그 수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먼저 쓴 대로 밀항자 중에서 제주도인의 비율은 그 전체를 추측하게 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본다.
제주도인의 일본 이동에 대한 고찰에서 많은 제약을 뛰어넘어서라도 비합법적인 도일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제3세대’를 빼고 논하기는 어렵다. 현재, 재일 제주도인 커뮤니티 민단 간부는‘제3세대’가 많다고 하며 일본에서 한국과 제주도와 활발한 교류를 담당하고 있는 세대이다. 그래서 ‘제3세대’는 이전 도일 세대에게 차별당하면서도 은폐되어 겉으로 드러날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체류자격을 획득하기까지 10-20년간 체재기간을 거치며 자신의 노력과 주위에서 협력을 얻어 체류자격을 얻어낸 존재이다.
‘제3세대’는 그 이전 세대와 달리 한국의 전후에 강력하게 추진된 민족주의, 반일, 반공의식으로 대표할 수 있는 국가관이 심어져 있다. 그로 인해 강렬한 한국인 의식을 갖고 오랜 세월 갖은 고생을 다해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고 성공한 사람들이 민단 간부가 되어 본국과 유대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제3세대’ 정체성의 기반은 ‘제1세대’와 ‘제2세대’가 확립한 ‘재일적 민족의식’과는 결이 다른 ‘한국적 국가관’이다. 그러나 한국의 국가체제가 추구하는 민족주의와 반일, 반공주의와 ‘제3세대’를 둘러싼 상황은 크게 모순된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태어난 ‘제3세대’가 있다면 그 부모는 재일 제주도인이었을 것이다. 그 부모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형제자매는 1950년대 상황이라면 ‘조선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 ‘제3세대’는 어릴 때부터 제주도에서 한국의 국민교육을 받고 ‘한국적 국가관’을 지니고 일본어도 모른 채 도일해서 민족학교(대부분 총련계)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는데 민족학교에서는 받아준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민족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학교교육을 계속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학교에서는 한국에서 주입된 ‘한국적 국가관’에 비판적인 ‘재일적 민족주의’의 주입이 이루어진다. 제주도(한국)와 일본, 일본의 가족과 본국의 가족, ‘제3세대’와 다른 세대라는 다양한 의미에서 상반된 복잡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세대이다.
‘제2세대’가 태어나 보니 일본 식민지였고 조선인, 제주도인이면서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일본명을 강요당하고 신사 참배를 해야 했다. 철저히 ‘황국 소년’으로 성장한 그들이 일본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조선이 독립을 하게 되면서 갑자기 조선인이라는 걸 각성하게 된다. 고향 제주도에 귀향을 했지만 4.3 항쟁으로 인해 내전상태에 빠졌다. 한반도에서 실제로 내전과 같은 한국전쟁이 일어나 자신의 고향이나 나라였지만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 아니었던 경험을 했다. ‘제2세대’의 정체성의 혼란은 국가단위나 전쟁과 같은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거나 장기간에 걸쳐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어 여기저기로 피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시대의 희생양이 된 측면이 있었지만 그들은 힘든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단위로 역경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했다. 같은 시기에 주위 사람들과 같이 겪은 일이기에 거기서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가 있었기에 고립되는 일은 없었다.
그에 비해 ‘제3세대’의 어려움은 밀항을 함으로 일본에 합법적인 체류를 할 수 없는, 숨어서 살아야 하는 힘든 상황에 놓인다. 일본에 살던 가족과 떨어져 제주도에서 외롭게 성장한 그들이 일본에 와서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지만 떨어져 살던 부모나 모르던 형제와 금방 화목하게 지내기가 어려웠다. 제주도에서 성장하면서 그리워하던 부모와 가족은 ‘제3세대’를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제3세대’도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을 가족과 공유하기가 어려웠다. 일본에 살던 가족들은 제주도에서 와 일본어도 모른 채 바로 일본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제3세대’의 어려움을 공감하지 못하고 제주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다르다고 인식했다. ‘제3세대’는 일본에 와서 가족과 같이 살면서도 고립되어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가족과 주위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그들에게는 자립하는 것도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얻기까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3세대’는 혼자서 가족관계나 학교에서도 방황하고 제주도와 일본이라는 사회에서도 방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던 사람들이다.
각주
160)日本法務省入国管理局 『出入国管理―その現況と課題』昭和50(1975)年度版 122p
'재일 제주도 사람들 > '파친코'와 재일 제주도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역사, 4세대 B섬사람들 -1 (2) | 2022.05.29 |
---|---|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역사, 도일 제주도인 4세대 (2) | 2022.05.25 |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역사, 도일 제주도인 2세대 (2) | 2022.05.23 |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역사, 도일 제주도인 1세대 (2) | 2022.05.22 |
'파친코'에서 보이지 않는 제주도 역사, 제주도 어민 일본 진출-2 (2) | 2022.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