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11 오블 동네 마실 1
오늘도 동경은 청명하게 맑은 날씨에 가을색을 띤 햇살이 따갑다. 이 따가운 햇살은 익어가는 감과 밤, 쌀에 달콤한 맛을 더해줄 것 같다. 따갑지만, 느긋하고 나른한 행복감을 주는 햇살이다. 한편으로 내 얼굴에 햇살이 화살처럼 꽂힐까 봐 아까 밖에 나갈 때는 선크림을 발랐다. 내 얼굴은 더 익으면 안 되거든… 단맛이 드는 게 아니라, 기미 주근깨가 생성될 터라…
지난주 수요일에 아침 첫 교시를 마치고 밤에 서울에 갔었다. 서울에서 일주일 지내고 화요일 아침에 돌아왔다. 개강 첫 수업에 들어갔더니 학생이 40명 정도로 적었다. 학생이 적어서 좋다고 싱글벙글하다. 500명 수업 후유증으로 학생들 얼굴을 하나하나 볼 수 있다는 게 좋다. 전날 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긴장했고, 자명종 소리가 나기 전에 잠이 깨어 자명종이 울리는 걸 기다려서 껐다. 몇십 년인 데, 아직도 이렇게 긴장을 한다. 입을 옷은 새하얗게 위아래에 구두까지 정했다. 비가 온다고 했지만, 첫날이라, 뭔가 하얗게 시작하고 싶었다. 첫 교시 수업시간에 맞게 가져갈 도구를 챙기고 가느라고, 막상 도착했는 데,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느라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아무리 흰옷을 입었지만, 머릿속까지 하얗게 하고 싶진 않았다…
다음 시간을 준비해 놓고 잘 가던 가게가 문을 닫는다고 해서 인사를 갔다. 그랬더니, 9월 말까지 문을 연단다. 그리고 오전에 야채만 팔기로 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섭섭해 한단다. 나도 가게가 문을 닫는다고 섭섭해서 인사를 간 적이 없었다. 요즘 일본에서는 거의 쇼핑을 하면서 말을 할 일이 없다. 말을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묵묵히 쇼핑을 하고 계산을 한다. 캐시어는 로봇처럼 필요한 말을 하면서 계산을 한다.
집에 와서 입었던 흰옷을 빨아서 널고 점심을 먹고, 청소를 했다. 일주일 집을 비워도 먼지 냄새가 배이는 게 싫다. 서울은 선선하다고 해서 긴소매 옷을 집어넣는다. 밤비행기라, 짐을 맡지기 않고 비행기에 들고 들어갔다가 내리려고 적게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날씨가 분간이 안 가고 빨래를 할 수 있을지 몰라서 옷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하네다 공항에 가는 시간이 퇴근시간과 맞물린다. 짐을 들고 붐비는 전철을 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짐가방 운전을 잘한다고 해도 교통량이 많으면 어쩔 수가 없다. 마치, 폭풍이나, 폭설처럼 불가항력이라는 말이다. 폼은 안 나지만 아주 편한 청바지에 오부 소매 티셔츠를 입고 공항에 갔다.
하네다 공항 국제선 청사는 한적했다. 국제선이 적은 것도 있지만, 밤이 늦은 탓도 있다. 조금 일찍 가서 체크인을 하고 좌석을 앞쪽으로 달라고 했다. 남자들 사이에 끼여서 앉는 불편한 좌석이었지만 비행시간이 짧아서 참을 만하다. 같은 비행기를 타도 먼저 내리느냐, 나중에 내리느냐에 따라 시간차가 많이 난다. 또 하나는 짐이 나오는 시간이다. 짐은 들고 탔으니 걱정이 없다. 아시아나 기내잡지에 틀린 그림 찾기를 했다. 나는 이 걸 잘한다. 비행중에 7번 방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봤는 데, 비행시간이 짧아서 끝까지 못 봤다..
10분쯤 연착했다. 일찍 나왔으니 수속을 하는 데도 사람이 없어서 빨리 나왔다. 아직 공항버스가 있는 것 같아서 찾아 헤매느라 시간을 보내고 결국 전철을 탔다.
목적지는 창동역, 공항에서 이렇게 멀리 가는 건 처음이다. 11시가 넘은 시간에 전철을 탔는 데, 전철에 사람이 많다. 공항에서 동대문역사공원역까지 가는 길은 옆에 일본인 모녀 관광객이 있어서 수다를 떨면서 갔다. 말을 하다 보니 아들이 출신 대학 후배라고 한다. 세상은 좁다. 딸이 서울에 자주 다닌다고, 자기는 딸이랑 같이 다녀서 잘 모른단다. 동대문 역사공원에서 창동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탔다. 사람들이 많아서 서서 갔다. 12시가 넘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전철에 타고 있다는 것은 그 시간까지 밖에서 뭔가를 했다는 것이다. 축척된 피곤함이 배어 있다. 고령이신 분들도 꽤 있었다. 어린이와 고령자는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간에 전철을 타지 않는 것은 불문율인 줄 알았는 데, 서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누적된 피곤함에 쩐 생기 없는 젊은이나, 고령인 분들에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이 살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가끔씩 서울에 가면 한국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확연히 보여온다. 점점 더 피폐해지고 각박해져 간다. 생기와 웃음을 잃어가는 표정을 보면서, 한국이 점점 여유를 잃고 가난한 나라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린다. 백화점의 호화로움과 더불어 표정을 잃어가는 얼굴들이 낯설다. 심야에 전철을 탔으니 그 시간에 전철을 탄 사람들이라 피곤하겠지, 피곤함에도 종류가 있고 축척과 누적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이미, 찜질방에 다녀오거나 일주일 쉰다고 해서 벗어날 피곤함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침투한 피곤함이었다.
전철에 탄 많은 사람들이 화면이 큰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시킨 모습이 스마트폰의 노예가 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스마트폰을 조정하는 것 같지만, 스마트폰이 나를 조정하는 게 아닐까, 홍수 같은 정보에서 이렇다, 저렇다. 어느 새어느새, 내가 스마트폰 주인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나를 노예로 부리는 것 같다. 아마도 기꺼이 나의 분신인 스마트폰을 위해서 일하고 돈을 써서 부양하리라. 스마트폰이 갈수록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 된 느낌이다.
창동역에 도착했다. 전화를 했더니 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실제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블로그에서 사진으로 봤던 터라,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느낌이다.
내가 잠잘 곳에 도착했더니, 포도와 복숭아에 아침으로 먹을 누룽지와 반찬, 오징어, 빵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내가 보고 싶은 책도 있었다. ‘충청도의 힘’이라는 책을 꺼냈다. 조금 읽으니 더 읽으면 잠을 못 잘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책을 덮었다. 한밤중이었지만, 포도를 한송이 씻어서 먹고 잤다.
이튿날 아침에 미의 여신님을 봤다. 그리고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분위기 있는 청국장집, 주인장이 연극 배우셨다는 데,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휴대폰을 충전하러 갔다. 휴대폰을 충전하고 너도님을 만나러 갔다. 너도 님이 퇴근해서 올림픽공원에 산책을 갔다. 나에겐 서울 올림픽도 낯설다.
80년대 초반에 한국을 떠나, 올림픽을 할 적에 서울에 없었으니까… 성내천?이라는 강을 건너 공원에 들어가 옛날 백제였다는 유물도 좀 보고 토성을 한 바퀴 돌았다. 토성이라는 걸, 강풀의 만화에서 처음 알았는 데, 내가 걸을 줄이야… 토성을 돌면서 새들을 봤다. 까치가 그렇게 큰 새인 줄 몰랐다. 흰색에 인상적인 눈 화장을 한 것 같은 토끼네도 봤다. 전혀 인상적이지 않은 토끼도 있었다. 조롱박과 도토리처럼 모자를 쓴 호박이 있는 터널을 지나고, 각종 나무와 가을꽃 맨드라미와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꽃밭을 지나, 벼가 익어가는 밭도 보고 머루가 열린 터널도 지났다. 모과나무가 아주 키가 큰 모과나무에 모과가 많이 열려 있었다. 문제는 둘 다 카메라를 안 가져갔다는 것이다. 아깝다.
산책을 하느라, 땀을 흘려서 가까운 너도님네 집에 가서 샤워를 했다. 거기서 너도님 티셔츠를 얻어서 입었다. 잘 입어서 부드러워진 노란색이다. 너도 님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노란색 티셔츠에 노란색 표지의 책, ‘충청도의 힘’을 읽으면서 킬킬대다가 울다가 했으니, 혹시 나를 본 사람은 ‘미치거나’ 아니면 새로운 ‘책 광고’라도 오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도님네 집은 창밖에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아파트라기보다 전원주택 같은 느낌이었다. 너도님과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완전히 야채 중심인 반찬. 나는 올갱이국?이라는 걸 처음 먹었다. 제주도 보말국과 같은 느낌이었다. 반찬이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고 맛있었다. 김치를 조금 남기고 완전히 깨끗이 싹 먹어 치웠다. 배가 부른 뿌듯함이라니, 행복하다. 야채들이 각기 다른 자연스러운 맛과 개성을 존중한 요리였다. 결코 녹녹지 않은 내공과 지혜를 느끼는 솜씨였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비가 온 후에 저녁시간에 카페에서 어두워가는 길가를 바라봤다. 그렇게 길가를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불쌍한 인생이다. 이번 서울에서 나를 웃기고 울린 책은 ‘충청도의 힘’이었다. 웃기는 대목보다, 울리는 대목 ‘지게꾼 방귀소리’부터가 참 좋았다. 옆에 있던 유홍준 씨가 썼다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도 편과 일본 편은 훑어보기 만했을 뿐 전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에게 ‘충청도의 힘’이 압도적이었다. 한번 읽고 또 읽었다. 느낌을 말하자면, 전라도닷컴이 농축되어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충청도의 힘을 가마솥에 넣고 달였나 보다. 짙다, 완전 엑기스다.
'한국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포공항 달항아리 (0) | 2019.09.10 |
---|---|
텅 빈 김포공항 (0) | 2019.09.10 |
조국을 지지합니다! (12) | 2019.09.08 |
대학이라는 환경 (0) | 2019.09.06 |
조국 대전 승리 기원! (0) | 2019.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