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6 실 상자
오늘 동경은 맑고 기온도 높은 따뜻한 날이다. 요즘 며칠 춥고 눅눅한 날씨였는 데, 오랜만에 맑게 개인 아주 따뜻한 날이 되었다. 저녁이 되면 비가 온다는 데 모르겠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쫄면을 삶아서 아침으로 먹었다. 요새 밥이 맛있어서 쌀을 먹다 보니 쌀이 떨어졌다. 월요일은 쌀이 할인하는 날인 것 같아 마트에 사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을 주문한 것이 오늘 도착한다. 아마, 낮에 도착하겠지. 지난 금요일에 왔던 게 제멋대로 반품되어서 다시 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니 집에서 실이 오는 걸 기다려서 결재해야 한다. 도서관에도 가고 싶었지만, 실을 기다리면 시간이 아주 어중간하다. 저녁에 외출하니까, 그 때에 맞춰서 볼 일을 봐야겠다.
오늘 저녁에는 김석범선생님이 4.3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 제주도에서 4.3평화재단사람들이 와서 동경에서 4.3추도회를 해왔던 사람들을 저녁에 초대한단다. 학기가 끝나서 시간이 있으니 거기에 간다. 실은 4.3추도회에서 도우미를 하지만, 뒷풀이는 거의 간 적이 없다. 뒷날 일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거리가 멀어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늦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성격이라서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 알지만, 개인적으로는 친분이 없는 관계다. 일본에서는 이런 인간관계가 많은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니까, 김석범선생님 작품을 강의에 쓰고 있는 친구가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 저녁에 시간이 있으면 같이 가자고, 그 친구는 서울에 갔을 때 4.3집회에도 갔다. 김석범선생님과의 만남도 내가 주선했고, 아이누를 연구하는 영국친구다. 이따가, 오카치마치역에서 만나서 같이 가려고… 그런데, 내가 구제불능한 길치라는 것이다. 만나면 그 친구에게 가게를 찾으라고 해야 겠다.
사진을 찍어와서 블로그에 올리려고 밧데리도 충전 중이다. 요새, 컴퓨터가 돈을 달라고 흐물거리는 데, 저 싸구려 카메라도 돈을 달라고 보채기 시작한지 한참된다. 애써, 모르는 체 외면하고 쓸 수 있는 데까지 쓴다.
지지난 주 금요일에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내가 수업에서 학생에게 아카데믹하라스멘트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조사위원회에서 조사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나는 지금까지 피해자로 살아왔는 데, 어느 날 갑자기 가해자가 되었다. 그래서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더구나, 지난 주는 종강이라서 더욱 신경이 쓰이는 시기인 데… 어쨌든 강의는 아름답게 마쳐야 한다. 강의라는 걸 인연으로 인간과 인간이 만남이었으니까… 기분이 엉망일 때는 뭔가 쇼핑이라도 해서 풀어야 한다. 그 때에 실이 나왔다는 걸 보고 색상이 괜찮아서 대량으로 주문한 것이다.
주문한 실이 왔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색상이 있어서, 아주 많이 주문했다. 실은 나에게 작품을 하는 재료라서 항상 관심을 갖고 본다. 그러나, 실이 아주 비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품질이 좋은 소재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공장에서 쓰다가 남은 걸 싸게 파는 곳에 주문해서 산다. 쓰다가 남은 것이라, 내가 원하는 색상이나, 굵기가 없다. 있는 재료에서 작품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거기에다 실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결국, 실을 주문해서 도착해봐야 주문한 것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결론이 난다. 이번은 성공이었다. 세상에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실을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실자체가 예쁘다. 이번 실 상자가 색상조합이 좀 괜찮다. 그래서 사진을 찍었다. 실이 좋은 데, 색상조합도 괜찮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재료가 있으면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다. 더 많은 상상에 실험과 실패와 성공이 담겨있다. 실상자 사진을 찍고 남은 햇살이 아까워서 집청소를 시작했다. 매주마다 하는 일이지만, 기분도 새롭게 청소했다.
찜찜한 기분과 학기말의 피곤함을 털어내고 닦아내듯 청소를 했다. 청소를 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실 상자에는 나의 꿈이 담겨있기도 하다. 기막힌 현실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는 비밀통로도 있다. 보물찾기에 숨은 그림찾기다.
